나는 퇴직 이후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외롭게 보내지 않을 친구를 만났다.

얼마 전 일 때문에 만난 방송 쪽 사람과 당구에 대한 이야기를 오랜 시간 나누었던 적이 있다. 당구를 밥 먹는 것 못지 않게 좋아한다던 그 사람은 타 방송사 국장급 인사임에도 불구하고 매번 집에 가면 SBS ESPN의 채널을 틀어 놓고 당구 경기를 본다고 슬쩍 이야기하며 멋쩍어했다.

지난해 케이블 채널인 <빌리어즈TV>가 론칭한 이후로는 그 채널의 애청자가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참을 웃으며 당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그 사람이 당구를 치게 된 계기를 듣고 보니 우리 남자들 인생의 씁쓸한 단면이 스며 있어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 사람은 당구를 치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라고 말했다. 평생 몸담아 온 방송국에서 남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몇년 남지 않았는데 퇴직 후의 긴 시간을 보낼 또 한 명의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다. 사실 남자들은 가정보다 더 오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곳이 직장이다. 대부분의 남자가 30년 넘는 긴 시간을 보낸 사회적 울타리를 벗어나면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그는 준비 없이 직장을 나오게 된 가장들이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서 수십년 젖어 있던 습관대로 정장을 입고 아침 일찍 집을 나와 공원 벤치나 사우나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해가 지면 집에 다시 돌아간다는 얘기가 결코 남 일이 아닌 듯한 느낌이 들어서 어느 날 갑자기 당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 온 그는 학창시절엔 공부밖에 몰랐고, 방송국에서 시작된 사회생활에서는 일밖에 몰랐다. 그리고 웬만큼 자리에 오른 뒤에는 남들처럼 골프를 쳤다. 좋아서 쳤다기보다 의무적으로 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골프를 시작했다. 50년 넘게 살면서 당구를 칠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몇 년 전 동생의 권유로 큐를 한 번 잡았다가 공 맞는 소리가 좋아서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구에 푹 빠져 퇴근 후에 당구클럽에 가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당구는 비교적 경제적으로 즐길 수 있는 스포츠다. 물론 깊이 빠져서 장비를 사들이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즐기는 수준을 유지하면 부담 없는 비용으로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에 이만한 아이템도 없다. 그 사람처럼 취미를 가질 새도 없이 직장과 가정을 전부라 생각하던 가장들이 뒤늦게 당구를 만나고서 앞으로 남은 생을 같이 보낼 친구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당구는 체력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장시간 칠 수 있고, 주변에 당구클럽이 많아서 큐 한 자루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많은 사람과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크게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그는 당구를 치기 전에 가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나이를 먹으면 잠도 없어져서 아침에 더 일찍 눈을 뜰텐데, 퇴직하고 나면 그 길고 긴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할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을 때, 처음 큐를 잡게 되었고 지금 3년째 당구를 치고 있다. 앞으로 한 30년은 더 쳐야 당구를 제대로 알 것 같은데, 내가 그만큼 못 살까봐 이제 그게 걱정이다.”

인생의 마지막 친구로 만난 당구와 더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계속되었으면 한다. 나 역시 많은 스포츠를 보고 즐기는 것이 그에 비해 아직은 길지 않은 인생의 전부였지만, 당구만큼 편하고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스포츠도 없다.

언제든지 친구와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며 즐길 수도 있고 정식으로 악수를 청하며 타인에게 도전할 수도 있으니, 당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스포츠다. 생활체육으로 사랑받는 배드민턴이나 테니스 같은 종목이 요구하는 체력적 부담이나, 골프처럼 경제적 부유함이 요구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 같은 서민에게 당구는 더 친밀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동네마다 당구클럽이 많이 생긴 이유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당구는 정말 좋은 친구다. 이런 친구를 만났다는 것이 어찌보면 행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당구가 없었더라면 인생의 무료함과 활력을 찾기 위해 많이 고민해야 했을 것이다.

나이가 더 많아지면 체력적인 부담으로 할 수 있는 스포츠가 더 적어질 터인데, 당구는 60살이 되고 70살이 되어서도 언제든지 즐길 수 있다. 흔히 골프는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나이가 들면 몸이 굳어서 스윙을 제대로 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몸과 머리를 같이 써야 하는 당구 역시 한 살이라도 더 젊었을 때 시작하는 것이 좋다. 좋은 벗은 일찍 만나야 한다고 하지 않나. 당구는 한 번 만나면 늙어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 준다. 이제는 나에게도 당구는 ‘인생의 마지막 친구’ 같은 존재다.
 
글 강동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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