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 파퀴아오.

후줄근한 차림에 지저분한 수염, 며칠은 감지 않은 듯해 보이는 머리까지 그를 처음 본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인지 결코 눈치채지 못한다. 마치 ‘포켓볼 황제’로 불리는 필리핀의 에프런 레이즈와 비슷한 경우다.

동네 아저씨 같은 행색으로 포켓볼 클럽이나 경기장에 나타나는 레이즈처럼 그는 항상 수수한 차림으로 편하게 사람들을 만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들의 행색은 서구권과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은 다 저렇게 지저분한 것 아니냐는 선입견이 들게 할 정도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행색에 불과하다. 그는 복싱 역사상 8개 체급을 석권한 유일한 선수이며, 자국 필리핀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받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기부하는 ‘영웅 중의 영웅’으로 추앙받는다. 그는 바로 ‘복싱 영웅 매니 파퀴아오’다.

매니 파퀴아오(36, 필리핀)는 필리핀에서 신성과 같은 존재다. 필리핀 사람들은 우리가 느끼는 박지성, 김연아에 대한 애정 그 이상으로 파퀴아오를 생각한다. 만약 필리핀에서 파퀴아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을 수 있는 용자가 있다면, 최단 시간 안에 필리핀을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스스로 떠나지 않는다면 강제로 떠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달 25일 필리핀 프로농구리그에서 뛰었던 다니엘 오튼(24, 208cm)은 25만 페소(한화 약 624만 원)의 벌금을 물고 리그에서 퇴출당했다. 인터뷰에서 생각 없이 내뱉었던 말 한마디가 원인이었다.

파퀴아오

오튼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파퀴아오의 농구실력은 장난(a joke)에 불과한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NBA 프로 농구에서 뛰었던 오튼이 봤을 때 파퀴아오의 실력을 냉정하게 평가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의 이런 발언은 필리핀 사람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막말로 받아들여졌다.

그가 소속되었던 퓨어푸드 스타 핫샷 구단의 르네 파도 이사는 “오튼은 미국에서 마틴 루터 킹을 모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오튼에게 ‘신성모독’이라는 혐의를 씌워 팀에서 퇴출시켰다. 필리핀농구협회도 오튼을 방출시키며 “오튼의 발언은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며 우리는 그의 경솔하고 무례한 행동을 묵과할 수 없다”라고 방출 이유를 밝혔다.

191억 원 기부한 ‘복싱 영웅’

반대로 필리핀 사람들은 파퀴아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조건 없는 친근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난해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현지인들은 필자가 파퀴아오의 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떤 조건도 달지 않고 무한한 신뢰와 애정을 표시했다.

비즈니스로 만난 사람이든 술집에서 가볍게 대화를 나눴던 사람이든, 그들과는 ‘파퀴아오 이야기’를 하며 쉽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파퀴아오는 단순한 복싱 선수 이상이었고, 존재만으로도 희망이었다. 파퀴아오가 보여준 선행이나 행적이 그를 ‘필리핀의 영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파퀴아오의 선행은 유명하다. 고향인 제너럴산토스에서 창고를 빌려서 생필품과 식량을 가득 채운 다음 주민들에게 나눠주는가 하면, 2013년에는 태풍 하이옌으로 고통받는 자국민을 위해 자신이 피땀 흘려 받아온 대전료 191억 원을 전액 기부하기도 했다.

크고 작은 기부와 선행을 계속하는 이유에 대해 파퀴아오는 “어차피 죽어서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 사람들에게 무언가 하나라도 돌아갈 때까지 기부하고 싶다”고 말했다. 파퀴아오에게 기부를 받은 사람이 무려 1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니 필리핀 사람들이 그를 ‘신성’으로 여기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홀어머니와 함께 먹고살기 위해 고물을 줍고 껌을 팔았던 파퀴아오가 복싱 역사상 최초로 무려 8체급을 석권하기까지 체중 20kg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자신처럼 어려운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며 자신이 이룬 노력의 보상을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는 모습이 인생역전 그 이상의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은 파퀴아오를 칭송하는 것이다.

파퀴아오의 경기가 열릴 때면 교통량이 급감하고, 우범지역에서조차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는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암묵적 휴전이 이뤄질 정도다. 이런 인기를 바탕으로 파퀴아오는 2009년 5월에 고향인 산토 토마스 사가니의 하원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차기 대선 후보로 나설 것이라는 전망까지 조심스럽게 들린다.

정치권에서도 그가 차기에 대선 후보로 나서는 것에 대해 긴장하고 있다. 그 어떤 정치인도 파퀴아오의 인기를 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파퀴아오는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정계에서 정상에 올라서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다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신의 의지를 따르겠다”는 말을 마지막에 남겼다. 파퀴아오는 한때 ‘음주와 도박으로 퇴색된 복싱계’를 자신이 추구하는 종교적 신념과 맞지 않아 떠나려 한 적이 있었다.

복싱계보다 더 지저분한 정치판에서 과연 파퀴아오가 어떻게 버텨낼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지난 2012년 3월에는 필리핀 국세청이 파퀴아오를 탈세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 베니그노 아키노 필리핀 대통령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파퀴아오를 표적 수사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정치적인 목적이라면 충분히 ‘영웅’을 ‘역적’으로 만들고도 남지만, 파퀴아오에 대한 신뢰가 그것을 허락할지 두고 볼 문제다.

그는 왜 포켓볼 대회를 후원했을까.

파퀴아오가 정치인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완전히 복싱선수로 은퇴한 것은 아니다. 복싱선수로는 적지 않은 나이인 37(1978년생)세의 파퀴아오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복서다. 복싱팬들은 파퀴아오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38, 미국)가 벌이는 세기의 대결을 항상 꿈꿔 왔다.

그런데 오는 5월 2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 그랜드 가든 아레나에서 파퀴아오 대 메이웨더가 벌이는 세기의 대결이 열리게 되었다. 수년간 미뤄져 왔던 복싱계의 양대 산맥인 파퀴아오와 메이웨더가 맞대결이 펼쳐지게 된 것이다. 이 시합은 복싱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펼쳐지는 슈퍼 매치로 기록될 예정이다.

세계 주요 언론은 파퀴아오와 메이웨더의 결전을 기다리며 연일 그와 관련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 세기의 대결은 각종 스포츠 및 복싱과 관련된 기록이 갈아치울 것으로 예상된다. 아직 합의가 끝나진 않았지만 두 선수의 대전료만 총 2억 5,000만 달러(약 2,750억 원) 수준으로 알려졌고, 역대 단일 경기 유료 시청 수입 최고액인 370만 달러(약 40억 원, 메이웨더 대 호야)와 단일 경기 유료 방송권 판매 최고 수익 1억 5000만 달러(약 1,650억 원, 메이웨더 대 알바레스) 등 대회와 관련된 모든 기록이 새로 쓰여질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열린 세계10볼선수권대회에서 뜻밖에 파퀴아오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상금을 후원하여 4년 만에 세계10볼선수권대회 남자부 경기를 개최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파퀴아오가 후원하는 포켓볼 대회라니!’ 파퀴아오가 포켓볼을 자주 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수년간 스폰서를 잡지 못했던 세계10볼선수권대회를 그가 후원한다는 것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필리핀 사람들에게 신성과 같은 존재인 파퀴아오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세계10볼선수권대회의 개최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점점 스폰서를 잃어가는 세계 스포츠 시장에서 스포츠로 성공한 선수가 다른 종목 스포츠를 위해 억대의 돈을 투자한다는 것이 쉬운 일일까.

천문학적인 대전료를 받으며 세계 스포츠 부자 6위(<포브스>지 선정)에 오를 정도의 부를 축적한 파퀴아오에게 20만 달러(약 2억 2000만 원)라는 돈이 크지 않은 돈일 수 있지만, 타 종목을 위해 선뜻 후원한다는 것은 이 지구상에서 파퀴아오가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필리핀에서 포켓볼은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다. 필리핀과 포켓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필리핀에 있는 당구클럽에 가 보면 포켓볼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아마추어 허슬러들이 많이 있다. 그들에게 포켓볼은 생활이면서 생계다.

게임에서 지면 가족들이 밥을 굶기 때문에 그들은 죽기 살기로 포켓볼을 친다. 그 때문인지 세계 톱 클래스권에는 항상 필리핀 선수들이 올라있다. 4번의 아시안게임에서도 포켓볼 금메달은 항상 필리핀의 몫이었다. 파퀴아오 역시 포켓볼을 즐긴다.

세계 복싱계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현역 선수이면서도 정치인, 가수, 영화배우, 프로농구 구단주 겸 감독, 코치, 선수의 역할까지 하는 파퀴아오가 시간이 언제 나는지는 확인된 바 없지만, 자주 포켓볼클럽에서 공을 치는 모습이 목격된다.

어린 시절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던 파퀴아오가 먹고 살기 위해 포켓볼 테이블 위에서 발버둥치는 필리핀 사람들의 모습에서 과거의 그림자를 느꼈던 것일까? 같은 스포츠 선수로서 동료 스포츠 선수에 대한 호의일까.

세계10볼선수권대회에 선뜻 억대의 후원금을 내놓은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이번 기부 역시 필리핀과 포켓볼을 사랑하는 그들에게 파퀴아오의 존재를 다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한 일이다. 필리핀의 위대한 희망이 세계 포켓볼을 변화시키는 불씨가 될 것인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세계 당구계가 파퀴아오라는 든든한 우군을 얻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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