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가슴 시리도록 보고 싶은 날에

황경득 & 고 김경률

그를 처음 봤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처음 만나 무슨 이야길 했는지, 처음 모습은 어땠는지, 머리는 짧았었는지, 길었었는지, 정장을 입고 있었는지, 청바지를 입고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김경률이라는 이름이 그냥 옆에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이.

2003년, 고 이상천 대한당구구연맹 전 회장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경기도 한 당구장에서 열리는 당구대회에 참가한다는 소식에 그를 만나기 위해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어깨에 메고는 그를 찾아갔다.

마침 점심시간이라며 같이 밥이나 먹자던 이상천 선수가 자기 옆자리를 비워두고는 누군가를 애타게 찾았다. 김경률이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본다고 했나? 김경률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이상천 선수였다. 이제 막 데뷔를 하고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어린 신인 선수인 김경률을 자신의 옆에 꼭 붙여둔 이상천 선수는 나에게 그를 꼭 지켜보라고 했다.

개구리라는 김경률 선수의 별명을 그때 처음 들었다. 이상천 선수가 “개구리 어디 갔니? 개굴아 밥 먹자”라며 그를 찾을 때까지만 해도 그게 김경률 선수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개굴아”라는 소리에 뛰어오는 김경률 선수를 보고는 ‘아, 이렇게 큰 개구리라니...’라는 안 웃긴 생각을 잠시 했다. 이상천 선수는 김경률 선수를 옆에 앉혀 두고는 밥 먹는 내내 이것저것 조언을 건냈다.

‘연습밖에 없다, 연습 안하는 선수는 성공할 수 없다.’, ‘교만하지 말아라, 항상 겸손해라.’, ‘선배들에게, 윗 사람들에게 예의를 잃지 말아라.’ 등등 당구계 대스타 선배가 해주는 충고에 김경률 선수는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예”라고. 그리고 그는 정말 그렇게 살았다.

김경률은 내가 본 가장 겸손한 챔피언이었다. 이상천 선수를 제외한 토종 한국 선수 중 제일 먼저, 제일 높이 세계에서 인정받은 선수였지만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든 달려갔다. 동호인들과도 거리낌없이 지냈고, 선배든 후배든 가리지 않고 그와 친하게 지냈다.

김경률은 내가 아는 선수들 중 가장 연습을 많이 하는 선수였다. 성적이 안 난다며 푸념하는 선수들에겐 항상 “김경률 선수처럼 연습해. 그럼 돼”라고 말해 왔다. 그가 하는 만큼 연습하지도 않으면서 그처럼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다른 선수들이 당구클럽에서의 게임이 연습이라고 말할 때 김경률은 항상 혼자만의 고독한 연습을 하고 또 했다.

김경률 선수는 내가 유일하게 소개팅을 주선해 준 당구선수였다. 아끼는 후배를 그에게 소개해준 이유는 단 한 가지, 그의 착한 심성때문이었다.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 뒤에 보여주는 사람 좋은 웃음은 말도 안 통하는 전 세계의 당구선수들을 자신의 친구로 만들었다.

영어 한마디 못하던 그가 한국 선수들이 감히 엄두도 못내던 세계 대회에 무작정 뛰어들어 길을 만들어 놓았고, 지금 그의 동료들이 그가 닦아 놓은 그 길 위에서 최고의 순간을 누리고 있다. 한국에서 세계 챔피언이 나온다면 당연히 그일거라고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비록 첫 한국 세계 챔피언은 그에게 항상 힘이 되던 동료 최성원이 되었지만, 그 언젠가 김경률 선수 역시 그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김경률 선수는 우리에게 이미 월드 챔피언이었다. 한국 당구가 얼마나 멋진지, 한국 당구선수들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통해 전 세계가 알게 되었고, 그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어 지금의 한국 당구가 있게 되었다.

가슴 아프게도 우린 대한민국 최고의 3쿠션 선수이자 한국 당구계를 이렇게 발전시켜 놓은 장본인인 두 선수를 모두 잃고 말았다. 우리가 이상천 전 회장을 잃은지 불과 10년, 그를 잃었을 때의 아픔이 이제서야 모두 잊혀질 무렵 다시 예상치도 못한 커다란 슬픔을 마주쳐야 했다. 김경률 선수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추모식에서 그의 밝게 웃는 영정 사진을 보고 있자니 이상천 전 회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10년 만에 만난 이상천 전 회장과 김경률 선수는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이상천 전 회장은 그동안 수고했다며, 잘 했다며 김경률 선수의 어깨를 툭, 툭 쳐 줬을까? 10여년 전 그때처럼 ‘개굴아’라며 그를 반겨 줬을까? 이상천 전 회장의 푸근한 미소가, 김경률 선수의 장난기 가득한 눈웃음이 가슴 시리도록 보고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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