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김경률

당구선수가 되기 위해 지난 2003년 경남 양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김경률 선수는 줄곧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의 한 아파트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2012년 결혼 후 아내가 딸을 출산하자 지난해 4월 서울 용산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번 명절을 맞아 아내와 딸을 데리고 부모님댁을 찾아 가족과 함께 명절을 보냈다.

명절 연휴 마지막 날인 22일, 그는 저녁 6시 인천의 한 당구클럽에서 동호인들과 게임을 쳐주기로 했다. 아내와 딸에게 먼저 서울로 올라가고, 자신은 저녁에 올라가겠다고 했다. 아내와 딸을 배웅한 그는 다시 부모님댁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날 아침부터 분주했다. 당장 다음 주부터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다시 부모님댁인 행신동 아파트에서 당분간 머물기로 했기 때문이다. 김경률 선수의 어머니는 지난해 유방암 수술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다른 장기로 전이되고 말았다.

주변 친구나 동료들의 어려움조차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심성을 가진 그가,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어머니가 아픈 상황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어머니의 병세를 돌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한 그와 아내는 올해 초부터 부동산을 쫓아다녔다. 행신동 아파트 같은 동에 집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같은 동에 살면서 친누나와 함께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명절 연휴가 끝나면 집을 구할 때까지 당분간 전에 살던 방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생활하기로 했다. 막상 부모님댁에 와 보니 자신의 방이 너무 지저분했다. 둘째를 임신한 지 4개월째인 아내가 있을 때를 피했던지, 그는 아내를 배웅하고 돌아와서 청소를 시작했다.

명절 내내 어린 조카와 음식 장만에 시달렸던 친누나와 몸이 아픈 어머니는 안방에서 잠시 눈을 붙였다. 어머니는 안방에 들어가기 전 베란다에 나와 있던 김경률 선수를 보았다.
 
 “경률아, 베란다는 뭐하러 치우노. 그냥 들어가서 쉬어라”
 “이것만 치우고 들어갈께예”
 “바닥이 찬데, 양말만 신고 나갔노. 신발이라도 신고 해라”
 “금방 끝내고 들어갈께예”
 
그것은 그가 어머니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잠시 후 베란다에 있던 그는 땅에서 50미터 높이의 20층 아래로 추락했다.

자살인가, 사고사인가?
김경률 선수가 20층 아래로 추락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 주민의 신고를 받은 경찰이 현장을 수습했고, 부모님댁에 올라가 열려 있던 베란다 창문과 방충망을 확인했다. 그리고 경찰은 ‘타살 혐의점이 없음. 자살로 추정됨’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비통한 김경률 선수의 죽음 앞에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그를 아는 모든 이가 자살로 추정된다는 경찰측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경률 선수는 절대로 자살할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낙천적이고 가족애가 강한 본인의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어머니가 암과 싸우고 있는 현실과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지 4개월인 정황만 놓고 보아도 자살이라는 이야기를 섣불리 내놓을 수 없다.

더군다나 김경률이라는 이름 석 자가 갖는 의미를 감안하면 목격자도 없고 결정적 근거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사인에 대한 판단이 철저한 과정 없이 내려져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쉽게도 언론 속보를 통해 ‘김경률, 자살’이라는 보도가 나갔고, 이러한 사실이 아닌 사실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며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우리는 그를 잃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아픔이 너무 큰데, 그의 죽음에 혹여나 사실과 다른 불명예가 씌워지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진실이 알고 싶었다. 그동안 우리가 보았던 김경률 선수가 자살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고, 그가 처한 현실이 결코 스스로 세상을 등질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사고의 정황이 없었는지를 살펴봐야 했다.

장례식이 열린 첫날 김경률 선수의 친누나는 평소 준비성이 그렇게 철저한 그가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흐느꼈다. 당시의 정황을 놓고 판단해 볼 때 베란다에 김경률 선수가 청소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던 내용과 오래된 아파트의 방충망이 자주 고장이 났다는 점, 건축된 지 오래된 아파트의 난간이 높지 않다는 점, 사고 후 방충망 윗부분이 바깥으로 휘어져 있다는 점 등을 종합해 볼 때 자살이 아닌, 사고사의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18년 전인 97년 8월에 건축된 이 행신동 아파트는 베란다 창문 밖에 사고 방지를 위한 120cm 높이의 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김경률 선수의 키는 185cm. 키가 큰 그에게는 불과 허리밖에 오지 않는 높이다. 그리고 오래된 방충망은 끼익거리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기도 했고, 어떤 때는 걸려서 줄곧 힘을 줘야만 다시 닫혔다.

유족들은 그가 만약 방충망을 애써 닫기 위해 창틀을 밟고 올라서서 힘을 주다가 밖으로 튕겨져 나가지는 않았을까? 튕겨져 나가던 그가 방충망을 손으로 잡아서 밖으로 휘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물론 팩트는 아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정에 불과하다. 사고의 현장을 본 이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고 현장과 당시 여러 가지 정황을 유추한 것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경찰 측에서 내놓았던 자살이라는 판단도 근거는 없다. 유서도 없고, 자살이라는 정황도 확인되지 않은 낭설에 불과하다. 사인은 장례가 끝나고 재수사 후 경찰에서 판단할 것이다. 사고사를 주장하는 유족이나 당구인들은 물론, 경찰 측의 반박 보도자료를 발표했던 대한당구연맹은 수사기관도 아니고 일개 체육 단체에 불과하다.

이들은 어떤 결정 권한도 없다. 단지 의견을 제시할 뿐이다. 김경률 선수의 비통한 죽음에 자살이라는 멍에마저 씌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진실을 바랄 뿐이다. 유족과 주변 인물 조사, 정황 분석, 과학적 근거를 토대로 진실이 밝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김경률 선수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

장례를 치르는 내내 유족들이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바로 사업 실패로 인한 빚더미에 앉은 그가 자살했을 것이라는 수군거림이었다. 김경률 선수는 지난해부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후배 선수들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당구클럽을 여러 개 운영하는 수익으로 소속 당구선수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업이었다.

일종의 매니지먼트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이 그의 세 번째 사업 시도였다. 그런데 얼마 전 그는 지인들에게 이제 그만 사업하고 다시 공만 열심히 치겠다고 말했다. 다시 실패한 것이다. 그가 품은 뜻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당구만 열심히 쳐도 충분히 재기가 가능한 김경률이기 때문에 오히려 반가워했다.

장례 중에 그가 사업 실패로 진 빚이 어마어마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례 첫날에는 10억 원이었다가, 둘째 날에는 20억 원이 되더니, 발인 전날 밤에는 30억 원으로 불어났다. 들어 보니 대부분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퍼트려 점점 액수가 늘어나게 된 것이다.

유족을 통해 파악된 김경률 선수의 자산은 대회 상금과 광고, 이벤트 출연료, 사업 수익 등 약 12억 원이다. 대부분 당구클럽이나 원룸, 아파트 등의 부동산에 투자된 금액이고, 대출과 부채 등을 최대로 잡고 정리해도 4억 원 이상은 남게 된다고 한다. 그의 사업 규모로 봤을 때 그 이상의 빚을 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럴 만한 규모의 사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승 상금 1억원’ 대회 만들려던 꿈

김경률 선수는 당구용품 유통, 당구클럽 운영 등을 하며 스스로 가진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1층에는 식당, 2층에는 당구클럽, 3층부터 5층까지는 원룸으로 된 건물을 갖겠다고 했다. 그가 왜 그 건물을 갖고 싶어 했는지는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동료 선수들에게 더 이상 생계 걱정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맘껏 당구 치고,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였다. 그의 목표가 순수했기 때문에 사업 방향이나 진행 역시 항상 건전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그는 양보해야 했다. 단지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다. 김경률 선수의 천성이 그렇다.

이런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나름대로 단계적인 계획이 있었다. 먼저 월드컵 챔피언에 오르고, 연봉 1억 이상을 받고, 그 중 일부를 모아서 조금씩 조금씩 자신의 꿈을 이뤄가겠다는 계획이다. 2010년 2월에 김경률 선수는 한국 선수 최초로 월드컵 챔피언이 되었다.

그 무렵 즈음에 이미 연봉 1억 이상을 받는, 당구선수로는 사상 최고의 연봉을 받는 선수였다. 물론, 타 스포츠 종목과 비교해 볼때 김경률 선수와 같은 위치의 선수가 받는 연봉치고는 터무니없이 적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당구 종목은 단계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

앞으로 시스템이 갖춰지면 그 이상을 바라보게 되겠지만, 아직은 당구 종목 스스로 역량을 갖추는 시간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간혹 김경률 선수는 그 시간에 대한 아쉬움과 급한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래서 스스로 당구선수들에게 ‘우승상금 1억 원’ 이상의 토너먼트를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그것이 김경률 선수가 그토록 좋아하던 당구에 대한 욕심을 접어 두고, 체질에 맞지 않는 사업에 뛰어든 이유다.

김경률이 없는 한국 당구

한국 당구는 ‘김경률’이 대변했다. 그는 한국 당구를 칭하는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김경률 선수가 없었다면 한국 당구는 이만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선수에게 꼭 넘고 싶은, 꼭 따라가고 싶은 우상과도 같았던 그는 스포츠 당구가 성장하는 디딤돌이 되었다.

장례 이튿날,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올해의 선수상을 받고 귀국길에 장례식장으로 곧바로 달려온 최성원 선수는 슬픔을 억누르며 “경률이가 없었다면, 내가 과연 있었을까?”라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김경률 선수와 동갑내기인 조재호, 강동궁 선수도 마찬가지로 당구를 더 열심히 치게 된 원동력에 항상 ‘김경률’을 떠올렸다.

그를 좋아하는 팬이나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 하나는 ‘김경률’이 한국 당구의 대명사라는 것이다. 그가 없는 한국 당구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예상치 못한 비극이 지금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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