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 고종부터 홍난파, 나운규까지 당구를 즐겼다.

순종(좌)은 1912년 3월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당구대를 놓았고, 고종은 1913년 8월 덕수궁 덕홍전에 처음 당구대를 놓았다.
1912년 3월 순종이 먼저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당구대 2대를 설치
고종은 1913년 8월에 덕수궁 덕흥전에 당구대 놓고 궁중 사람들과 함께 즐겨
순종은 현재 150~200점대의 실력, 작곡가 홍난파는 현재 300점대의 당구 실력 갖춰
 
한국 당구의 기원은 1883년 인천 개항기로 거슬러 오른다. 호텔과 외교구락부에 일본으로부터 당구대가 수입된 기록이 있고, 1884년 9월 20일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처음 조선에 들어오면서 인천(당시 제물포)의 한 오두막 호텔에 설치된 당구대 위에서 새우잠을 잤다는 사실이 기록에 남아 있기도 하다.
 
그 이후 당구는 개화기 외국 세력들의 각축장이 된 서울 중심의 외교구락부에 설치되어 각국 외교관들의 교류와 여가 이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다가 마침내 퇴위한 임금들의 여가 선용과 건강 유지를 위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들 순종이 1912년 3월에 일본에서 당구대 2대를 사들여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설치하였고, 부친 고종은 이보다 1년 5개월 뒤인 1913년 8월에 덕수궁 덕홍전에 설치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당구를 접한 사람은 순종과 고종이다.
 
고종의 당구 기량이 얼마쯤 되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순종의 당구 실력은 <순종국장록>의 기록에 따르면 60에서 70 내외라고 하였으므로 현재의 점수로 환산하면 150~200점대의 결코 낮은 점수가 아니었던 듯하다. 특히 순종은 전 창덕궁경찰서장 야노와 자주 겨루었고, 국내외 선수들을 불러 대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다음으로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매일신보> 1915년 2월 17일 자에 보도된 십여 년의 표박생활, 당구명인, 조선말 못하는 조선사람 일본 이름 키노시타 초키치다. 그는 일본과 중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생활하는 중에 당구를 500점(지금의 1,000점 이상)이나 치게 되었고 귀국 후 순종을 알현하여 한판을 겨루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 이름 키노시타 초키치 외에 한국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무렵 궁중에 출입하면서 어용 당구대의 시설관리자 겸 순종의 당구교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전상운이 있다. 이 사람을 직접 만난 현존 당구인은 없고 그에게서 당구를 배운 김효근을 통해서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김효근은 300점의 실력자로서 와세다대학 출신의 임정호가 1924년에 현 조흥은행 맞은편 광교통에 한국인 최초로 무궁헌 당구장을 세웠을 때 자주 출입하면서 이 당구장을 이따금 출입하던 윤치호, 유진오 두 사람에게 애국지사들의 연락책을 맡아 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2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보다 좀 앞선 사실로서는, 기미년(1919년) 독립선언서 낭독 사건으로 영업정지를 당한 명월관 인사동 분점으로 사용되기 전 이완용의 사저로 쓰이던 저택에 당구대가 놓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와 조카 한상용이 당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벼락이 정원의 고목을 때려 분질러 버렸다고 하였다.
 
이들은 고관대작의 아들과 조카로서 사저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당구를 즐긴 당구 마니아로 기록되는 행운을 얻었다. 1925년경에는 서울 장안에 당구장이 속속 생기기 시작하였다. 주로 종로1, 2가를 중심으로 인사동, 낙원동 일대가 중심이었으며, 동아(2대), 중앙(4대), 테이라(1대) 당구장이 그것이다.
 
점차 상업당구장이 성행하게 됨에 따라 사각모의 대학생들과 포목상, 양복점, 요식업에 종사하는 호상들 그리고 일제하 작위 집안의 귀족 자제들이 출입하였다. 초기 보급단계에서 알려진 인물로는 음악가 홍난파로서 종로3가에서 바이올린 강습소를 하고 있던 홍난파 외에도 친조카인 안과의사 홍재유와 이비인후과 의사인 홍사유가 종로당구장에 자주 출입하던 당구가족으로 알려져 있다. 
 
작곡가 홍난파 선생. 사진 한겨레음악대사전
홍난파의 당구실력은 120점(현재의 300점대)으로 적수가 흔치 않았다고 하며, 큰조카 홍재유는 당구장에 살다시피 할 정도로 당구를 좋아해서 급한 환자가 있을 때는 당구장에서 간호원에 떠밀려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영화감독 안종화와 당대의 유명 영화배우 나운규도 당구를 즐겨 쳤다.
 
이들의 실력은 60점(현 200점대) 정도였다. 그리고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과 명월관 대표 이시우는 당구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당구 실력도 300점대(현 1,000점)로 뛰어났으며, 내기당구를 자주 즐기며 경기 후의 여흥까지 책임졌다고 한다. 이상이 1930년대까지의 한국의 초창기 당구사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저작권자 © 빌리어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