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에 이완용의 사저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완용과 명월관

이완용의 사저에 당구대를 설치하여 아들과 조카가 당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벼락이 때려 정원의 고목을 분질렀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이 저택은 후에 명월관 분점으로 바뀌어 기미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사건으로 영업정지를 당했다.

개인 사저에 당구대가 설치된 최초의 기록, 역사로 조명한다

명월관 인사동 분점은 원래 중종반정 때 공신 구수영의 집이었는데 후일 안동 김씨 김흥근의 소유가 되었다가 헌종의 후궁 경빈 이씨의 순화궁이 되었다. 그러다가 순화궁이 이전하게 되자 이완용이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 집에는 태화정과 부용당이라는 아름다운 정자가 있었고, 부용당 앞에는 영조가 친필로 잠용지란 현판을 걸게 한 연못이 있었다. 인현왕후의 생가인 이곳에서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태화궁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이완용이 집주인이 되자 자꾸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가 조카 한상용과 당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난데없는 소나기가 오며 벼락이 때려 정원에 있는 고목을 분질러 버렸다.

또 이유도 없이 항아리 6개가 깨어지기도 했다. 그런 일을 두고 사람들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에게 하늘이 벌을 준 것이라고 수근댔다. 괴이한 변괴가 잇따르자 이완용은 이 집을 팔려 내놓았고, 황토마루 명월관이 화재로 타버리자 명월관 주인 안순환이 인사동에 명월관 분점을 열게 된 것이다.

1919년 3월 1일. 11시가 넘자 명월관 인사동 분점으로 한두 명씩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전에 음밀히 내약된 사람들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기 위해서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명월관 인사동 분점은 영업정지를 당했다.

이상의 역사적 사실에서 당구인들에게 더욱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이 나라 고관대작의 사저에 기미독립만세를 부르기 이전인 1910년대에 당구대가 설치되었다는 기록이다.

명월관 주인이었던 이시우의 초상화. <빌리어즈 자료>

그 후 명월관은 신식 문화에 탐닉한 이시우라는 사람이 인수하였는데, 그는 당구를 300점이나 치는 당구애호가였다. 그는 명월관을 운영하는 틈틈이 당시 막 시중에 생기기 시작한 당구장을 인텔리들과 자주 찾아 당구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과 함께 이들은 어떤 면에서 보이지 않게 우리 당구 발전의 간접 지원자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 이유는 경제력이 월등한 데서 고급 사교장의 재정적 후원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시우는 경영하는 업종이 업종이라 수준급 게임에는 으레 내기가 따르게 마련이고 그는 산해진미에다 기생까지 거느리고 보니 풍류한량들에게는 안성맞춤의 내기 상대였다. 여기에다 이시우 자신도 놀이판의 낭만이라면 녹록지 않은 품성이라 당구장에서의 그의 인기는 대단할 수밖에.

한판 승부에 명월관 파티로 이어졌음도 흔히 있는 일이었을 테니 그의 호방함이 이를 물리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내기 게임에서 이기든 지든 간에 그는 이 선심 파티를 즐겨 감수했다는 것이다.

1920년에 조선총독부 직원용으로 경성구락부가 생기면서 시중에 당구장이 전파

당구는 1884년 9월 20일 미국인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제물포(인천)에 상륙하여 오두막 호텔에 놓여진 당구대 위에서 밤잠을 잤다는 것이 한국에 최초로 전파된 시기의 기록으로 보인다.

그 후 세계의 외교 각축장이 된 각국 외교관들이 서울에 머물면서 그들의 정보교환과 교류를 위해 만들어진 외교구락부에서 활발히 성행되었으며, 1912년에는 이씨조선 마지막 황제 순종과 그의 부친 고종이 심신의 피로를 달래고 여가를 선용하는 레저 스포츠로 당구에 심취하였던 것이다.

1920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직원용 휴게실로써 지금의 남산 입구에 경성구락부(대지 약 2,000평에 2층 건물)를 세웠다. 경성구락부의 1층에 일반직원용 3대, 2층에는 고등관용 2대 등 모두 5대의 당구대를 설치하였다.

일인 거주지역에 동행해 한국인도 당구를 즐길 기회가 있었을 것이므로 그런 점에서 경성구락부는 우리 당구의 시발점이었다고도 하겠다.

또 이와는 별도로 서대문 전매청 앞에 1대, 지금의 용산우체국 뒤인 관사촌에 1대, 총독부 옆 왜성대에 3대를 설치하여 총독부 직원들만 이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성제국대학 예과(현 청량리 라이프주택 자리)에 1대를 설치하여 교직원들이 이용하도록 하였다.

당구 기구의 수리는 당시 총독부 직원으로 근무하던 한국인 전상운(당시 500점)과 경성구락부 직원 김효근(당시 300점)이 맡았는데, 특히 전상운은 순종의 당구 코치 직책도 맡고 있었다. 이때부터 당구는 시중에 서서히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영업적인 당구장도 등장하게 되었다.

1923년 왜인촌이 있던 진고개(지금의 충무로2가) 방면에 일본인이 경영하는‘파주정’이라는 당구장이 그 시초였다. 당시‘파주정’에는 1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그 옆에 일본인 아히라라는 사람이 경영하는‘지하지가’에 2대, 충무로1가 제일은행 본점 뒤‘아사이 당구장’에 2대가 설치되었다.

당시 한 게임 요금은 1인당 5전이었는데 만약 4명이 게임을 했다면 1등 1명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3명이 각각 5전씩을 내어 15전을 요금으로 지불하였다. 그 당시에는 백미 한 가마가 3엔이 채 못 되었던 때이니 꽤 비싼 요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전에는 1인당 8전씩 하다가 시간제로 받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백미 한 말 값에 해당하는 1엔 20전씩이었다.

한국 사람으로는 192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인 임정호씨가 종로 방면 지금의 청계천2가 조흥은행 건너편에‘무궁헌’이라는 2대의 당구장을 처음으로 개설하였다. 이 당구장에는 주로 일본 유학생들을 비롯한 유학파 출신들이 이용하였다. 윤치호 선생이나 유진오 선생 등도 이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자주 왕래하였다고 한다.

이어 ‘광교당구장’, ‘종로당구장’이 각각 2대의 당구대를 설치하고 개업하였으며, 그 다음 해인 1925년에 인사동 입구에 ‘동아’(2대), 종로2가에 ‘중앙’(4구대 4대, 로테이션 1대), ‘테이라’(2대) 등이 개업하게 되는 등 8·15 해방 무렵에 이르러서는 서울만 하여도 33개소의 당구장이 개업하였다.

1940년에는 인천 시내 학생들이 당구장 출입이 극심하여 풍기문란하므로 경찰이 적극적으로 엄중 단속에 들어갔다는 보도가 실렸다

1940년에는 마침내 중학생(지금의 고등학생)들이 당구를 치기 시작하여 그것이 풍기문란한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어 경찰이 강력히 단속하게 된 사실을 신문이 보도하였다.

1940년 2월 9일자 조선일보에는 ‘불량학생 청소공작 - 당구장·영화관·카페·바에 출입자를 단속, 인천서에서 금후 엄벌 방침’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인천] 인천부 내에 있는 아홉 군데의 당구장에도 요즘 중등학교 생도들이 몰려 들어 일반의 풍기상 가장 자미롭지 못한 일이 적지 않다.

그 중에도 심한 생도들은 책보를 낀 채로 당구장에 들어와서 정모정복에 담배까지 괴워물고 게임 보는 여자들에게 농담까지 해가며 유희를 한다 하여 인천서에서는 매일같이 투서가 들어오므로 인천서 고등계에서는 그들을 이대로 두어서는 중학생 풍기가 점점 문란해지리라 하여 지난 8일 아침에는 횡산 고등계 주임이 계원들을 독려하여 학생들이 당구장에나 바, 카페, 활동사진관 등에 출입하는 것을 엄중히 조사하여 온정주의를 버리고 또 적극적으로 취체를 한 후 불량학생은 근절을 시키도록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보안계에서는 당구장 주인이 생도들의 출입을 묵과할 때에는 영업장까지 몰수하려고 각 파출소에 통첩을 하리라 한다.”

학생들의 당구장 출입에 대한 사회적 물의는 벌써 일제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의 당구의 기원은 고상하게 출발하였으나, 전파 과정에서 왜곡되는 시대상을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은 한국의 당구를 유기의 굴레에서 오래도록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위의 기사에서 1940년에는 인천 시내에 아홉 군데의 당구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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