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구 기업인 방달성
 
한국의 당구사는 당구장 경영주와 당구 치는 사람이 먼저 이름을 올렸고, 당구용품을 만들고 유통하는 사람들이 그다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한일 합병 직전에 시작된 한국 당구사의 출발은 초창기에는 일본인들만의 전유물로 특권층에서만 할 수 있었고, 1920년대 이후 한국인이 경영하는 당구장이 생겼으나 모든 당구용품이 일본을 주도로 한 외국에서 수입됨으로써 한국의 당구용품 산업은 해방 이후 그것도 6.25 전쟁 후에 태동,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서도 당구용품 생산에 대하여 가장 먼저 눈을 뜨고 체계적으로 사업을 영위한 사람은 방달성이다.
 
그는 승리기업사라는 당구용품 업체를 세워 사무실을 서울 을지로1가의 육군 PX 내에 두고, 충남 보령군에서 당구대용 석판을 생산하는 것을 기반으로 각종 당구대를 제작하는 외에 청쿠션을 생산하고 당구용품을 도・산매하는 유통까지 겸한 당구용품 업체를 운영하였다. 
 
방달성은 당구용품 생산・유통업에 종사하면서도 평소 당구 발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승리기업사가 기반을 잡게 되자 방달성은 그가 염원하던 일에 착수하였다.
 
당구가 발전하려면 당구인들의 수준을 높이고 당구계에 새 정보와 지식을 공급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여, 최초의 당구 전문 잡지를 발간하기로 한 것이다. 
 
■ 최초의 당구 잡지 <월간 당구>
 
방달성은 1958년 11월에 당국으로부터 허가번호 666호로 <월간 당구> 잡지의 발행 허가를 받아 이종걸을 주간으로 위촉하여 다음 해 1959년 1월 30일 자로 창간호를 펴냈다. 
 
잡지 크기는 국판(15cm×21cm), 표지는 2색, 본문은 총 50페이지로 갱지를 사용하였다.
 
이 당구 잡지가 출간되자 잡지 발행에 관계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당구인들이 환영하고 기뻐하였다.
 
물론 백 퍼센트 만족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당구인들이 당구계의 소식을 처음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기쁨은 대단하였다. 
 
잡지가 발간되자 당시 당구선수로서 철도국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김영재가 당구대를 운송하는 열차에 잡지를 싣고 다니면서 전국 각지에 두루 보급하는 일을 맡았다.
 
김영재는 잡지 보급 역할뿐만 아니라, 다음 호에 실릴 기사 정보까지 잡지사에 실어 날랐다. 
 
<월간 당구>는 월간 잡지였으나 다음 2호가 발간된 것은 3개월 뒤인 4월 30일이었다.
 
이런 현상은 당시로서는 시대 상황이나 당구업계의 열악한 사정으로 보아 그만큼 월간 잡지 발행이 쉽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제2호의 표지는 큐를 잡고 당구공을 겨냥한 브리지한 손 사진이 실렸는데, 이 손의 주인공은 김영재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제3호가 발간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다. 다음 해인 1960년에 들어와 잡지 발행을 준비하고 있는 중에 4・19가 발발하여 중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그것이 제3호인지 제4호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이로써 최초의 당구 잡지 <월간 당구>는 2호만을 세상에 남기고 단명으로 끝났다. 
 
■ 당시의 당구계를 거울같이 비친 <월간 당구>
 
비록 잡지이기는 하지만 <월간 당구>는 그당시의 당구계를 한눈에 알 수 있도록 거울같이 비쳐 주고 있다. <월간 당구> 창간호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발행・편집인인 방달성 사장의 창간사에 이어 칼럼으로 방용하가 기고한 <당구도(撞球道)와 당구도의(撞球道義)의 본질>이라는 당시의 당구인들에게 큰가르침이 되는 내용의 무게 있는 글이 실렸다.
 
그리고 <당구는 오락이 아니라>라는 타이틀과 ‘건전한 실내운동임을 재인식하자’는 부제의 좌담회 기사를 실었다.
 
참석자는 방용하(대한당구협회 부회장), 조동성(전국 3쿠션 선수권자), 이상만(고점자), 이한종(대한당구협회 이사장), 방달성 사장이며, 사회는 이종걸 <월간 당구> 주간이 맡았다. 이어 사론(社論)으로서 <사멸이냐 재건이냐>라는 제목과 ‘서울시 당구업조합은 각성하여야 한다’는 부제로 결성한 지 4년이 된 서울시 당구업조합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한 각성을 촉구한 글을 실었다.
 
그리고 최근 당구장 입장세를 10배 가까이 인상한다는 세무 당국의 방침에 대해 만일 그렇게 되는 경우 당구업은 망한다는 당구장 업주들의 결의를 담은 세금인상반대 진정서를 실었다.
 
서울특별시 당구업자조합과 부산시 당구업자조합이 당국에 각 업자들의 연판장을 첨부하여 제출한 진정서 전문을 게재하였다.
 
당구 강좌도 3편이 실렸다. 당구 기능의 일인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방용하가 <당구입문>의 첫 번째 연재를 무려 8페이지 분량으로 집필함으로써 당구 기량을 감이 아닌 학술적 이론으로 접근하는 계기를 제시하였고, 조동성은 <스리쿠션 계산법의 연구>를 3페이지에 실어 당사로서는 이제 막 일기 시작한 3쿠션에 대한 관심을 당구 이론으로 연구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당구 고점자 노기호는 <경기규정 해설>을 소개하였다.
 
3쿠션 경기규정, 4구 경기규정, 그리고 보크라인 경기규정 외에 경기에서 사용되는 영문 약어, 즉 W(윈・승리), L(로스・패), H・R(하이런・최고연속득점), B・G(베스트게임・최소 큐수), T・P(토탈포인트・총득점), R(랭킹・성적 순위) 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잡지사 기술부에서 50점부터 100점의 지점자를 위한 <모음공 정석>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또한 당구인 이상만의 독일을 거쳐 일본을 방문한 기행문 <일본 당구계를 돌아보고>라는 기고문은 우물안 개구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당시의 당구인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내용을 담았다.
 
그 밖에도 <우량공장 탐방기>, 대만과 미국 및 일본의 <국외 소식>, 전국 각 도시의 <모범 당구장을 찾아서>, <지방 소식>, 동정(動靜)에 해당하는 <당구장 스냅>, 주간 이종걸의 <당구예찬>, 로이트 한이 그린 <방향 전환>이라는 만화, 그리고 당구인들(8명)을 대상으로 7가지 항목에 걸쳐 질문한 <설문>이 각 페이지 하단에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수필 한 편도 실렸다. 
 
1959년 4월 30일에 발행된 제2호에는, 시사 기사로서 대한당구협회와 대한당구선수협회, 업자 대표 등 7명이 서울특별시 위생과장 초청으로 서울시를 방문하여 전문 17개 조로 성안된 ‘당구장 영업시설 규격’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여 수정한 내용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그리고 <우리 선수의 국제적인 진출을 기약하며> ‘대한당구선수회 드디어 발족’이라는 전국 각지의 38명 발기인 명단과 함께 8장 26조로 된 헌장(憲章) 전문을 수록하였다.
 
현역 선수 모두가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므로 당시의 당구선수 분포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다. 
 
제2호에도 <당구는 체육부문으로 육박하여야 한다>는 주제로 부산에서 좌담회를 개최, 이를 수록하였다.
 
참석자는 전병학(부산당구협회장), 박기환(대한당구선수회 선수), 허근, 이건종, 김정환, 김창섭, 박윤조, 강두석, 윤진태(이상 대한당구선수회 선수), 변옥용(당구기재업), 조동성(선수회 부회장)이며, 사회는 이종걸 주간이 맡아 진행하였다. 
 
그리고 제2호에는 우리나라 당구의 큰 맥을 이룬 최용이 <당구계의 작금상(昨今相)>이라는 칼럼 행태의 글을 기고하였는데, 이 글은 최용의 유일무이한 삶의 발자취라 할 수 있는 귀한 글이다.
 
그는 이 기고에서 자신이 일제시 만주로 진출하여 만주 황실에 출입하며 부의 황제와 함께 당구로 일과를 보냈던 일을 술회하고 있다. 
 
당구 강좌는 창간호에 이어 방용하의 <당구입문>이 장장 13페이지에 걸쳐 실렸으며, 노기호의 <최신당구학강좌>의 연재가 ‘당구용어편’으로 수록되었다.
 
그리고 잡지사 기술부편으로 <3쿠션 계보>를 도면 해설로 소개하고, 그에 잇달아 조동성의 ‘미구(美球, 나이스볼)’와 박수복의 ‘난구’ 풀이를 하였다. <4개 공의 유래>에 대해서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해외 소식으로 <거성은 떨어지다>라는 제목으로 ‘당구왕 윌리 호프 71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는 소식을 비중 있게 다루었으며, 그 밖에 토막 소식으로 일본 당구계 뉴스를 실었다. 
또한 김귀선이라는 여성 당구 애호가가 <여성의 당구계 진출과 당구장의 이모저모>라는 글을 기고하여 당구에 대하여 여성의 요구를 이미 이때부터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훌쭉이와 뚱뚱이 대전에 오다> ‘훈련소 아닌 2・3・5당구장에’라는 기사가 코미디언 양석천과 양훈의 당구 치는 사진과 함게 재미있는 글로 소개되었다. 
 
L기자는 <영남지방 당구계의 현황을 보고 와서>라는 기행문을 대전편, 대구편, 부산편으로 구분하여 소개하였다. 당시의 지방 도시의 당구장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비록 두 권의 잡지에 실린 내용이지만, 이 잡지 기사를 통해 당시의 당구계 시대상과 당구계의 현실을 그대로 알고 느낄 수 있다. 
 
‘때와 사람은 가도 사실은 남기는’ 언론 매체의 역할을 실감할 수 있는 산 증거를 이 잡지는 보여 주고 있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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