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기관차처럼 질주하던 다비드 사파타(31·블루원리조트)가 멈춰 섰다. 8강에서 한국의 이상용(42)이 우승으로 향하던 사파타호를 잡아 세우는 이변을 연출했다.
사파타는 이번 대회에서 퍼펙트큐와 애버리지 5.626를 기록하고, 거침없는 전진을 거듭하며 준결승은 물론 결승행도 유력해 보였다. 8강까지 합산 애버리지 2.360. 사파타 외에 아무도 2점대를 친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타율은 28.6%로 8강에 올라온 다른 선수들과 6.5~13.7%까지 차이가 났다. 8강 상대인 이상용과는 8명 중 1등과 8등의 차이였다. 이상용은 16강이 끝나고 애버리지 1.432, 공타율 42.3%를 기록했다.
사파타는 8강전을 이기면 준결승에서 만나는 최성원(휴온스)도 애버리지 1.537과 공타율 39.6%로 차이가 컸고, 결승에 올라가면 만나게 될 스페인 동료 선수들도 사파타의 기록에 한참 못 미쳤다. 이만하면 준결승, 결승 모두 사파타 아래에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8강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이상용이 기록은 단지 기록일 뿐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29일 오후 9시 30분에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열린 시즌 5차 투어 '휴온스 PBA 챔피언십' 8강전에서 이상용이 세트스코어 3-1로 사파타를 꺾었다.
세트스코어는 2-0에서 2-1, 다시 3-1로 끝났지만, 내용을 보면 사파타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상용은 2세트에서 사파타의 강한 압박이 있었지만, 간발의 차로 사파타의 세트포인트가 빗나가면서 절호의 찬스가 왔고 이를 살렸다.
또한, 이상용이 승리를 거둔 1세트와 2세트, 4세트에서는 적시에 장타가 터져 사파타의 공격력에 직접 맞선 것이 승리의 원동력이었다. 1세트에 이상용은 4이닝에서 7점타를 터트리며 12:2로 시작부터 크게 리드했다.
반면에 사파타는 초반 컨디션이 저조했다. 1이닝 2득점과 2이닝 3득점, 그리고 4이닝에 7득점을 이상용이 올리는 사이에 사파타는 단 2점을 치는 데 그쳤다. 이후 네 타석 동안 이상용의 점수를 내지 못했지만, 사파타는 2점을 더 보탰을 뿐 큰 점수 차를 따라올 만한 연속득점이 터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
결국, 1세트는 이상용이 9이닝 공격에서 원뱅크 샷으로 멋진 옆돌리기를 시도해 2득점을 성공한 뒤 뒤돌리기로 깔끔하게 마무리하며 15:4로 승리했다.
2세트에서도 이상용은 서서히 발동을 거는 사파타를 팽팽하게 끌고 갔다. 3:4로 지고 있던 6이닝에서 이상용이 3점을 올리자 사파타는 2점을 쫓아와 6:6 동점이 됐고, 7이닝과 8이닝에서는 이상용이 다시 2점씩 보태 10:6으로 앞섰다.
이상용이 2세트 승리까지 5점을 남겨둔 사파타 8이닝 후공에서 장타가 터졌다. 사파타는 대거 8점을 득점하며 그대로 세트가 끝낼 뻔했다. 계속 갈피를 잡지 못하던 사파타가 날린 회심의 한 방으로 점수는 10:14로 뒤집혔다.
이상용의 리버스 공격이 아깝게 빗나갔는데, 사파타에게 앞돌리기 찬스가 왔다. 사파타는 앞돌리기를 성공시킨 뒤 옆돌리기 포지셔닝으로 두 점을 더 뽑았고, 비껴치기와 스리뱅크 샷까지 득점을 이어가며 순식간에 6점을 올리고 12:10으로 역전했다.
사파타는 앞돌리기를 시작으로 옆돌리기 연타와 비껴치기, 스리뱅크 샷으로 6점을 뽑은 뒤 옆돌리기로 다시 2점을 득점하며 10:14를 만들었다. 마지막 세트포인트 시도에서 사파타는 수구에 회전을 많이 주고 두껍게 제1적구를 겨냥해 옆돌리기를 시도했다. 그런데 이 공이 마지막 5번째 쿠션을 맞고 제2적구 옆을 스치듯이 지나쳤다.
사파타에게는 결정적인 장면이었다. 이 공격이 맞았다면 세트스코어 1-1을 만들고 다음 3세트와 4세트 승부도 한결 가볍게 이상용을 상대할 수 있었지만, 이 공격이 빗나가면서 기회를 잡은 이상용이 5점을 마무리해 세트스코어는 2-0이 됐다.
2세트를 놓친 타격은 컸다. 3세트도 이상용이 11:8로 리드하며 승리까지 단 4점을 남겨둔 것. 패색이 짙어진 사파타는 회생이 어려워 보였는데, 이를 뒤집고 3세트를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사파타는 12이닝에서 4점을 득점하고 11:12로 역전했고, 이상용의 식스뱅크 샷이 실패하자 13이닝에서 옆돌리기 두 방과 절묘한 비껴치기로 3점을 마무리하고 11:15로 3세트를 승리했다.
사파타가 어렵게 4세트로 승부를 끌고 왔지만, 이상용의 초구에서 장타가 터졌다. 이상용은 초구에 호쾌한 샷을 이어가며 하이런 11점을 득점하고 사파타를 끝내 무너트렸다. 사파타가 1이닝 후공에서 3점을 득점하는 데 그쳤고, 2이닝에서 이상용이 원뱅크 걸어치기로 2점을 더해 점수는 13:3.
한 큐가 아쉬운 상황이었는데 후공에서 사파타는 비껴치기 공격에 실패하며 이상용에게 공격권을 넘겼다. 3이닝에서 이상용은 뒤돌리기와 앞돌리기로 남은 2점을 모두 득점하고 15:3으로 4세트를 승리했다. 이상용이 가장 잘나가던 사파타를 잡고 사상 최초로 준결승에 진출하는 돌풍을 완성하는 순간이었다.
경기 후 만난 이상용은 "상대가 워낙 잘치는 선수고 처음 올라온 준결승전이어서 긴장이 많이 됐다. 즐기자는 생각으로 쳤는데 승리해서 기분이 좋다. 아내가 제일 좋아할 것 같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나름대로 연습을 많이 했다. 준결승에서 만나는 최성원 선수는 내가 존경하는 선배다.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준결승전의 각오를 다졌다.
이상용은 프로당구 원년 시즌에 드림투어에서 데뷔해 이듬해 1부 투어로 올라왔고, 매 시즌 16강에 올라가며 얼굴도장을 찍었다. 이번 시즌에는 지난 4차 투어 '에스와이 챔피언십' 32강이 최고 성적이었지만, 이 대회 64강에서 다니엘 산체스(에스와이)를 세트스코어 3-1로 꺾었고 이번 대회에서 사파타를 꺾으며 준결승에 진출, 새로운 다크호스로 떠올랐다.
사파타가 8강에서 패하면서 처음으로 준결승 세 자리를 노렸던 스페인은 다비드 마르티네스(크라운해태)와 하비에르 팔라존(휴온스)만 4강에 진출하게 됐다. 또한, 결승전에서 스페인 선수 맞대결도 무산됐다.
30일 열리는 준결승전에서는 마르티네스 대 팔라존(오전 11시), 최성원 대 이상용(오후 2시)의 대결이 벌어진다.
이날 스페인은 팔라존의 3차 투어 우승과 마르티네스의 4차 투어 우승에 이어 5차 투어까지 첫 3연승에 도전한다. 팔라존은 징검다리 시즌 2승과 통산 3승, 마르티네스는 전년도 휴온스 챔피언십에 이어 대회 2연패와 시즌 2연승, 통산 5승을 노리고 있다.
또한, 최성원과 이상용 중 준결승 승자는 이번 시즌 4차례나 우승한 외인들의 질주를 막고 시즌 첫 한국 선수 우승에 도전하게 된다.
(사진=고양/이용휘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