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아마추어 당구 활성화와 당구 저변 확산 위해 전국 동시다발의 대회 기획

제1회 월간당구배 지역예선전이 경기도 의정부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개회식에서 이 지역 출신 문희상 국회의원(오른쪽 세 번째)이 축사를 해주었다. 그 옆(왼쪽)에는 본사 김기제 발행인과 의정부지역 운영위원 강현복 선수.
우리나라에 체계적인 전국당구대회가 열린 것은 1962년 사단법인 대한환경위생협회 내에 중앙당구분과위원회(대한당구협회의 전신)가 조직되어 그해 11월 7일 서울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제1회 전국당구대회가 개최된 것이 그 효시이다. 
 
그 이후 이 당구대회는 거의 매년 개최되다가 65년에는 장충체육관에서 한일친선 당구대회와 겸하여 열렸고, 66년에는 중앙유기분과위원회를 사단법인 대한빌리아드협회로, 83년에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로 개칭하면서도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 88년 10월의 제18회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 대회는 이로써 애석하게도 맥을 끊고 대한당구협회에서는 그 대신 회장기쟁탈 전국당구선수권대회를 남성우 회장 재임 시기인 90년에 1회 개최한 것을 마지막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경기인들 주관의 대회로서는 대한당구경기인협회가 발족되기 이전까지는 프로당구위원회가 85년에 제1회 대회를 연 이후 89년까지 선발대회를 겸하여 6회 대회까지 열었다. 그리고 87년 일간스포츠배 당구대회가 최초의 TV 방송대회로 2회 열렸다. 
 
그러나 서울당구월드컵이 한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다음 해인 1992년 무렵에도 한국에는 아직 당구동호인의 관심을 끌거나 그들의 기량을 발굴할 체계적인 규모의 전국 아마추어 당구대회는 열리지 못하고 있었다. 
 
창간 5년째를 맞이한 <월간당구>에서는 한국 당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마추어 당구동호인이 관심을 갖고 당구를 활성화시키고 나아가 한국 당구가 세계 진출의 디딤돌을 놓으려면 지속적인 아마추어 당구대회가 열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기획한 것이 ‘월간당구배 전국 아마추어 당구대회’였다. 
 
<월간당구>에서는 1992년 중반에 잡지를 통해 개최 요강을 발표하였는데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출전자격은 공인선수회에 가입하지 않은 아마추어 동호인, 경기종목은 국내 보급형 테이블(중대:254cm×127cm) 3쿠션 경기로 A조(지점 500점 이상)와 B조(지점 500점 이하) 2개 부문으로 하였다.
 
대전 방법은 각 지역 시·군·구 단위로 운영위원 신청을 받아 3개월에 1회씩 1년간 4회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예선전을 치러 각조 우승자 1명에게 본선 진출권을 주고 1년 동안 선발된 지역 예선 통과자들이 서울에서 본선대회에 참가하여 대망의 입상자를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예선전의 모든 경기는 <월간당구>에 계속 소개함으로써 출전자들의 관심을 고조시키고, 예선전에 참가하였다가 우승을 놓친 동호인들은 차기 예선전을 노리고 열심히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서 기량이 향상되며, 예선전 경기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전국에 당구 붐을 일으키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대회가 많은 동호인들의 큰 관심을 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파격적인 상금을 제시하였다. A조의 우승은 93년도 유럽 월드컵 대회, 준우승은 일본 개최의 국제대회, 3위는 대만 개최의 세계 포켓볼 대회를 참관할 수 있는 여비와 제반 편의를 제공하며, B조의 우승은 일본 개최의 월드컵 대회, 준우승은 일본 개최의 국제대회, 3위는 대만 개최의 세계 포켓볼 대회를 참관할 수 있는 여비와 제반 편의를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각 지역 운영위원의 신청을 접수한 결과 현 당구선수들과 대한당구협회 지회 관계자들이 다수 지원하여 전국적으로 25개 지역이 구성되었다. 그리하여 그 첫 예선전이 경기도 의정부지역(운영위원 강현복)에서 10월 25일 개막식과 함께 1년간의 대장정의 테이프를 끊었다. 
 
이날 개막식에는 이 지역 출신의 문희상 국회의원이 지역 당구동호회의 고문자격으로 출전자들을 격려하는 축사를 해주었고, 필자도 이 대회의 대회장으로서 대회의 성공적인 진행을 기원하는 대회사를 하였다.
 
대회장에는 당구대를 흰 종이로 깔아 임시로 만든 개식대 위에 본사에서 각조 입상자들에게 시상하기 위해 준비한 6개의 입상 트로피가 가지런히 놓인 가운데 대장정의 첫 경기가 시작되었다.
 
이날 이후 본사의 기자들은 예선전을 치르는 지역의 경기장마다 입상자 트로피 6개와 상장과 부상을 갖고 방문하여 대회를 지켜보고 기사를 작성하는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의정부 지역에서 첫 예선전을 시작한 지 꼭 1년 만인 1993년 10월 25일에 대망의 본선대회가 올림픽공원 제3체육관(역도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1년간 25개 지역에서 연인원 약 1,000명의 아마추어 동호인들이 참가해 장기 레이스를 펼친 결과 A조에서 34명, B조에서 48명 등 모두 82명이 본선 진출권을 따내 명실공히 아마추어 당구의 고수를 가리는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제1회 월간당구배 전국 아마추어 3쿠션 당구대회 본선대회가 1993년 10월에 올림픽공원 제3체육관에서 성대히 개최되었다
대회장에는 한라상사(대표 박학용)의  ‘퍼펙트’ 당구대(시공 서울당구상사) 8대가 상단에 청색 4대, 하단에 녹색 4대의 라사지가 선명한 색상을 드러내며 경기장의 분위기를 밝게 하였다. 
 
이날의 대회를 축하하기 위해 경기단체와 대한당구협회 임원진들과 용품 생산유통업자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개회식 사회와 경기 진행은 현역 당구선수들과 운영위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진행하였다. 본선에 참가한 82명의 출전자들은 대회 규정에 따라 상의는 흰색 셔츠, 하의는 검은색 바지를 입고 구두를 신게 함으로써 당구가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스포츠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성황리에 개최된 이 대회를 TV 중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당구인들과 일부 당구 마니아들만이 관전한 점이다. 
 
필자는 대회장의 대회사에서 “언론사에서 전국 규모의 당구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당구 역사상 초유의 일로서, 월간당구배는 우리나라 당구 인구의 저변 확산과 당구의 올바른 발전을 아마추어 당구를 통하여 실현한다는 목적 아래 창설된 것이며, 한국 당구 발전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으리라 자부한다.”고 하였다. 
 
대한당구협회 양태주 회장과 대한당구선수협회 김문장 회장이 축사를 해주었고, 대한당구협회 회장을 역임한 본사 양창종 고문이 격려사를 하였다.
 
강현복 운영위원의 경기규칙 설명에 이어 서울 여의도지역 출전자인 김상호가 선수대표로서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할 것을 선서한 다음 경기가 속행되었다.
 
이날 월간당구배 당구대회를 성공적인 대회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대회 진행을 맡은 운영위원들의 헌신적인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적어둔다. 사회의 김석규(서울 도봉지역), 심판의 강현복(경기 북부지역), 진행의 박태호(서울 영등포지역), 기록의 고종익(서울 종로지역), 남정훈(경기 동부지역) 등이다. 
 
오후 늦은 시간까지 진행된 경기는 폐회식을 마지막으로 다음 대회를 약속하며, 1년간의 장기 레이스의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데, 다음의 본선 출전자들이 영광의 자리에 올라 소정의 상금을 수령하였다. 
 
A조(500점 이상) : 우승 김경진(경기 포천지역), 준우승 김용각(서울 서초지역), 3위 배흥동(경북 안동지역), H.R상 동기주(경기 북부지역), B.G상 배흥동(경북 안동지역), G.A상 김경진(경기 포천지역)
 
B조(500점 이하) : 우승 김진우(경기 동부지역), 준우승 주원진(경기 성남지역), 3위 이종철(서울 서초지역), H.R상·G.A상 김진우(경기 동부지역), B.G상 문순찬(서울 영등포지역)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저작권자 © 빌리어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