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터키 이스탄불과 미국 미시간주에서 3쿠션과 여자 9볼 빅매치가 열렸다.

한국은 세계의 이목이 쏠린 두 대회에서 모두 챔피언에 올라 이제 세계 당구의 주역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10여년 전만 해도 유럽의 전통적인 강세를 넘는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다.

여자 9볼은 김가영의 혜성과 같은 등장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지만, 3쿠션은 월드컵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챔피언에 오르기 위해 넘어야 할 야스퍼스나 쿠드롱 같은 세계 톱 클래스의 벽이 너무 높았다.

한국이 넘기에는 어려울 것이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많았지만, 젊은 한국 선수들의 도전은 끝내 그들을 넘어서고 말았다.

이제 캐롬 3쿠션과 포켓 9볼, 두 종목에서 한국은 세계 최강이다. 이번 이스탄불 3쿠션 월드컵과 WPBA 마스터스에서 챔피언에 오른 두 명의 한국 선수가 그것을 말해 준다.

 

조재호

슈퍼맨이라 불리는 사나이

터키 이스탄불에 때아닌‘슈퍼맨 열풍’이 불었다. 이스탄불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가 8강에 5명, 4강에 3명이 오르는 사상 유례없는 일이 일어났다.

한국 선수들이 유럽으로 자리를 옮겨 한국 당구 대잔치를 벌였다. 한국은 한순간에 유럽의 장벽을 넘어선 슈퍼맨이 되었다. 하마터면 4강전을 한국 선수끼리 치를 뻔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당구 역사상 4강전을 한 국가 선수들이 치른 전례는 없다. 당구 뿐만 아니라, 어떤 스포츠 종목의 역사 속에서도 찾을 수 없는 대기록이 탄생할 뻔했다.

이런 전무후무한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었을까? 우리는 한국 당구를 슈퍼맨으로 만든 이스탄불 월드컵 챔피언 조재호에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조재호가 슈퍼맨이라 불린 내막은 이렇다. 32강전에서 딕 야스퍼스를 이긴 조재호가 슈퍼맨 카디건을 입고 나타나면서, 야스퍼스의 아성을 무너뜨린 조재호의 플레이에 매료된 현지 당구팬들은 그를‘슈퍼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관중들의 뇌리에 조재호는 물론, 한국 선수들 모두에게 슈퍼맨 이미지가 각인되기 시작했다.

한국 선수들이 터키 선수들과 친한 모습을 보이자, 관중들은 한국 선수들에게 우호적으로 다가왔다.

사진 촬영과 사인 요청이 쇄도했고, 홈에서 성적이 좋지 못한 터키 선수보다 한국 선수들이 더 많은 관심을 받았다. 분위기를 탄 한국 선수들이 점점 좋은 경기를 보여주었다.

조재호는 32강전에서 세계 최강 딕 야스퍼스를 40:38(14이닝)로 꺾은 기세를 몰아 8강전에서는 다니엘 산체스마저 13이닝 만에 40:26으로 꺾었다.

기록을 보면 얼마나 재밌는 경기를 보여줬고, 현장에서 관중들에게 얼마나 많은 박수를 받았을지 알 수 있다.

스포츠는 관중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 관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숨소리까지 전달되는 당구 경기는 더 그렇다. 이스탄불 월드컵 챔피언 조재호는 관중과 함께 호흡하며 승리를 일궈냈다.

만약 한국 선수들의 활약에 관중들의 탐탁지 않은 반응이 돌아왔다면, 선수들이 자기 플레이를 하는 데에 가장 큰 방해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한국 선수들의 활약으로 유럽 강자 중 4강에 오른 선수는 에디 멕스뿐이었다. 멕스마저 준결승전에서 최성원에게 38:40(24이닝)으로 패하고 말았다.

토브욘 블롬달은 이충복에게 32강전에서 28:40(15이닝)으로 패했고, 마르코 자네티도 16강전에서 강동궁에게 패했다(26:40, 29이닝).

세계 랭킹 1위 쿠드롱은 8강전에서 최성원에게 승부치기 끝에 3:4로 패해 세계 톱 클래스 선수들이 모조리 한국 선수에 무너지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국이 유럽의 높은 벽을 넘어설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바로 경험이다. 조재호는 경험을 통해 이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월드컵에 20번 넘게 출전하다 보니 경험이 하나둘 쌓여서 꼭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후구와 승부치기가 도입된 이후에 유럽의 장벽을 넘기 위한 숙제가 사실상 하나 더 늘었다.

국내에서는 방송 경기 기준으로 후구 없이 30점 단판제를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선수들은 승부치기 경험이 유럽 리그를 뛰는 경쟁자들보다 부족할 수밖에 없다.

경험을 쌓기 위해 조재호는 초구부터 시스템을 만들어 치는 연습을 꾸준히 해왔다.

결승전 마지막 승부치기 공 3개를 보면 그가 짧아지는 플라틴 테이블에서도 완벽하게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쿠드롱을 승부치기에서 꺾은 최성원 역시 평소 많은 훈련을 통해서만 나올 수 있는 자신감 있는 샷을 후구와 승부치기에서 보여주었다. 그들은 경험 부족이라는 핸디캡을 훈련을 통해 극복할 수 있었다.
  
훈련에는 멘토들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속팀 서울시청과 유니버설코리아의 도움이 없었다면 조재호는 월드컵에서의 소중한 경험을 쌓고, 원활하게 훈련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서울시청 스포츠관리팀 이종철 부장, 송동준 팀장, 김영식 주임 등은 많은 종목을 관리하느라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선수단이 입국하는 날 인천공항에까지 마중 나와 꽃다발을 안겨주기도 했다.

유니버설코리아 박석준 대표는 아예 이번 시합에 동행하며 선수들을 독려했다. 당구계 사상 최대의 불황이 지속되고 있는 와중에도 소속팀 선수들을 현지에서 직접 챙기겠다는 박 대표의 의지가 빛을 발한 셈이다.

조재호는 귀국 후 인터뷰에서 경기마다“처음 5이닝을 조심하라”는 박 대표의 주문이 우승의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조재호의 승리 비법이기도 하다. 

뱅킹에서 이기고 처음 5이닝 동안 먼저 치고 가거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경우 상대방의 파이팅이 가장 좋은 5이닝을 철저하게 잠그라는 것이 박 대표의 주문이었다.

세계 톱 클래스 선수와의 경기에서 에러 마지노선은 3번이라는 점, 특히 야스퍼스나 쿠드롱 같은 선수일 경우에는 40점을 치는 동안 1~2번밖에 기회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초반 5이닝이 승패를 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순간을 놓치면 테이블을 파악하기도 전에 경기를 끌려가게 되고, 무리하고 성급한 선택을 하게 된다.

조재호의 코치 역할을 하고 있는 서울시청 소속 정영화 선수는 조재호의 매 경기를 모니터링했고, 평소 기술 훈련을 함께하는 이충복 선수나 서현민 선수 역시 동료이면서 서로 코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재호의 이스탄불 월드컵 우승은 이런 관중과 멘토들의 힘으로 이뤄낸 결과물이다. 이것은 조재호와 한국 당구가 슈퍼맨으로 불린 가장 큰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김가영

유일한 세계선수권자

2004년과 2006년 9볼, 2012년 10볼 등 세 차례나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김가영은 한국 선수 중 유일한 세계선수권자다. 동시에 여자 포켓볼의 최강자로 세계가 인정하는 선수다.

국내 선수들의 경기력 향상과 후배들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한 해의 절반을 한국에서 활동하다 보니 김가영이 얼마나 큰 선수인지를 가끔 잊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김가영은 세계대회 우승 트로피를 들고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벌써 15년 넘게 세계 톱 클래스에 올라 있으면서 수없이 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고 왔다.

스포츠 선수 중에 그녀만큼 많은 우승 기록을 가진 이가 또 있나? 앞으로 한국에서 김가영만큼 대단한 스포츠 선수가 다시 나올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것은 단순히 선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선수를 키워야 하는 의무가 있는 연맹도 스폰서가 붙지 않아 어렵게 살림을 이어가고 있고, 우리 같은 잡지도 마찬가지로 종목의 한계를 뛰어넘지 못해 발전이 더뎌지고 있다.

그런데 현실에 부딪혀 상실감이 들 때마다 김가영의 승전고가 전해져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된다.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김가영을 보라. 그녀는 현실에 지치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라 엄청난 카리스마로 가는 곳마다 주변을 압도한다.

영어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녀의 모습 앞에서는 비인기 종목 선수라는 핸디캡도 무색하고, 여타 인기 종목의 스타들조차 주눅 들게 만든다.

다방면에 실력을 갖추고 있는 그녀가 국제 스포츠와 스포츠 전문분야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갖춘다면 훗날 국제 스포츠 기구에서 한국 스포츠를 대변할 수 있는 재목이 될지도 모른다.

김가영의 재능과 카리스마라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김가영은 항상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고 있다.

평균 두 달에 한 번꼴로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그녀는 매 순간이 도전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도전은 실패할 줄을 모른다.

2014년에도 벌써 그녀는 두 번의 도전에서 모두 세계 정상에 올랐다. 미국 미시간주에서 열린 WPBA 마스터스와 대만에서 열린 WPA 초청 왕중왕전에서 동서양의 강자들을 모두 누르고 챔피언에 올라 명실상부한 여자 포켓볼 최강자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승부처에 강한 ‘강심장’ 김가영은 WPBA 마스터스 결승전에서 가장 막강한 라이벌인 켈리 피셔를 7-6으로 눌렀다. 피셔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강자 자스민 우샨은 김가영에게 예선과 준결승전에서 17-0이라는 수모를 당할 정도로 완벽한 플레이를 보여주었다.

김가영은 상대방에게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는다. 그것이 프로의 자세이고,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 스포츠 정신이다.

이렇게 김가영만큼 제 몫을 다하는 이도 없다.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 금메달은 모든 운동선수의 목표다.

‘세계 1등’이라는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젊음과 인생을 바치는 이들이 바로 운동선수다. 그런데 다른 운동선수들은 한 번 달성하기도 어려운 목표를 김가영은 벌써 세 번이나 달성했다.

그래서 김가영은 10년 넘게 체육연금의 수혜를 받고 있다. 당구선수가 연금을 받는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가 더 많다.

이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다. 국가에서 연금을 준다는 것은 당구선수를 체육 유공자로 인정하고 당구를 스포츠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당구인들은 모두 그녀의 업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당구계 내부에서조차 ‘김가영의 연금’과 같은 선수들의 업적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앞으로 김가영과 같은 선수들은 나오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선수들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지 않으면, 당구에 미래가 있을지 생각해 보라.

김가영도 자신의 노력으로 세운 업적과 성과에 비해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런 섭섭함보다 더 두려운 것은 후배들의 열정이 식는 것이다.

정말 스포츠 역사에 남을 만한 기록을 세워도 보상의 한계가 있다면 누가 도전장을 내밀겠는가? 이런 종목에서는 결코 우수한 선수가 나올 수 없고, 우수한 선수가 없다면 더 이상 종목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지금 당구는 몇 명 안 되는 꿈나무들조차 김가영 같은 세계 챔피언을 꿈꾸기보다 단지 대학에 가고 토너먼트를 즐기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현실이다. 당구인들이 유능한 세계선수권자를 방치한 사이에 당구의 미래와 꿈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사실을 통감한다면 이제는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선수들은 당구계의 전략적 수혜자가 되어야 한다. 당구가 일어서는 기둥이 되는 것은 스폰서가 당구 관련 단체에 지원하는 지원금이 아니라, 바로 김가영 같은 선수들의 열정과 땀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미 많은 일을 했음에도 김가영은“내가 힘이 될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하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한국 당구가 세계 최강의 반열에 올라서는 일등 공신이었고, 몸치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매주 TV에 나가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춤을 췄던 그녀다.

김가영의 이런 노력 덕에 당구의 발전이 조금 더 빨라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는 어디에도 없다.

김가영이 열아홉 살 어린 나이에 홀로 대만으로 떠났던 그때를 돌아보면 현실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더 해야 하고, 더 할 일이 많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김가영의 30년, 어린 후배들에게 15년 뒤를 그리며 현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김가영의 투지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선수가 훈련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결과물을 가져오는 김가영을 격려하고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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