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천 회장의 대한당구연맹 제4대 회장 취임과 안타까운 죽음

미국에서 1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상천 선수는 대한당구연맹 회장으로 추대되어 한국 당구의 새로운 변화를 과감하게 추진하던 중 안타깝게도 그의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위암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이상천이 당구와 맺었던 마지막 인연은 한국 당구 스포츠화의 튼튼한 토대가 될 수 있었다.
 
대한당구연맹 제4대 이상천 회장 취임식. 사진 김민영 기자
대한당구연맹  제4대 회장으로 추대   
 
이상천 선수가 2003년 11월에 미국에서 귀국해 한국 당구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서 추진한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국당구대회’는 2004년 한국 당구계를 후끈 달궜다.

전국 각 지역에서 투어 형식으로 매월 진행된 이 대회는 이상천 선수가 기획한 것이었고, 그 기획은 당구계와 선수들의 호응을 얻어 당구계 안팎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신감을 얻은 이상천은 한 사람의 당구선수로서가 아닌 당구지도자로서 그의 포부와 꿈을 펼칠 큰 구상을 하게 된다.

그것은, 대한당구연맹 제3대 회장으로 영입했던 유태성 회장이 사회적으로 파문을 일으키고 잠적한 후 6개월 동안 대한당구연맹이 표류하던 중에 새 회장을 물색하게 됨에 따라 이상천이 그를 따르는 선수들의 지지를 얻어 출사표를 던지게 된 것이다.

어느 날 이상천 선수가 필자에게 만나자고 연락이 와 홍대역 부근의 서교호텔 일식집에서 점심을 같이했던 적이 있다. 이상천은 이 자리에서 필자에게, 자신이 대한당구연맹 회장을 맡아 한국의 당구계를 책임지는 자리에서 꿈을 펼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나는 이상천의 이 제의에 대하여, 왜 어려운 길에 들어서려고 하느냐고 하며, 지금처럼 플레이어로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당구계에 헌신하면 되지 않느냐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미 뚜렷하게 목표가 서 있는 그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그와 당구의 마지막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상천의 집념은 초지일관 대단했다. 그의 지지자들을 통한 물밑작업이 계속되었고 대한당구연맹 대의원들이 다음과 같은 조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이상천의 회장 영입을 잠정 결정하였다.

즉, 첫째는 이상천이 미국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대한체육회의 회장 승인에 필요한 제반 증빙서류를 완벽하게 갖추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초대 연맹 회장 취임식 때부터 2대, 3대 회장 재임 기간에 진 연맹 부채를 모두 변제하는 것이었다.

이 조건을 회장 취임식 전에 충족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2004년 5월 14일 대한당구연맹 임시대의원총회는 이상천을 회장으로 추대하는 결의를 했다.

연맹 부채는 전임 회장들이 해결을 못하고 계속 미루어 오는 동안에 법정 이자 등이 누적하여 악성 부채가 된 상태였다. 이 금액이 만만치가 않아 선수 출신의 이상천이 감당하기에는 다소 벅찼으나, 이상천은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국당구대회’의 연속적인 우승상금과 그의 회장 취임에 기대를 건 후원자들의 성금으로 무난히 변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취임식을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국당구대회’ 2004년도 전반기 대회가 끝나는 6월 27일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발표했다.   
 
이상천 회장 영결식
 
 
대한당구연맹 제4대 이상천 회장 취임식은 예정대로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국당구대회’ 투어의 전반기 대회가 끝난 오후 6시 산본의 궁전웨딩홀에서 많은 당구인들과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열렸다.
 
하지만 그는 웃음을 잃지 않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취임사를 통해 그의 회장으로서의 포부를 밝혔다.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 이상천입니다. ‘꿈을 꾸는 자는 아름답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 많은 꿈들을 꾸며 살아왔습니다. 당구의 매력에 흠뻑 빠져 당구선수의 길을 꿈꾸었고, 세계 챔피언을 꿈꾸었습니다.

그 꿈들은 다행히도 신의 축복으로 모두 이루어 보았습니다. 이제 제 생애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꿈을 꾸어 볼까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 모두가 평소에 꿈꿔 왔던 꿈과 동일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포츠로서의 당구, 이것이 저의 꿈입니다.”  

이날 이상천 회장이 발표한 집행부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당구용품생산 유통업자들을 중용하여 당구계 전체를 아우르는 편성으로 짜여졌다. 이렇게 이상천은 과감한 방식을 시도하여 연맹의 취약한 재정을 보완하고, 당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을 선수들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취임식을 끝낸 후 이상천 회장은 미뤄왔던 건강검진을 받은 결과 그가 대회 중에 수시로 통증을 호소하던 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정밀검사를 받고 위암 판정을 받았고, 취임식 얼마 후인 7월에 병원에 입원했다.

이상천 회장이 2003년 11월에 미국에서 왔을 때나 그후 대회 투어 과정에서 건강에 대한 문제는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날부터 위에 통증을 자주 호소했다. 주위에서는 그에게 병원에 가서 진료와 검사를 받아 보라고 권유했으나, 그는 그럴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계속 미뤘다고 한다.

이상천 회장은 그가 세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건강이 나빠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무리하게 일에 몰두하다가 안타깝게도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이상천 회장은 일산 암센터에 입원하여 진료를 받던 중에 일시 호전되는 기미를 보이기도 했으나, 3개월 만인 10월 19일에 향년 51세로 끝내 타계하고 말았다.

한창 일할 나이에 그가 성취한 위치에서 한국의 당구 발전을 위해 꿈을 펼치기를 기대했던 많은 당구인들과 당구선수들은 충격적인 이상천 회장의 사망 소식에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그의 장례는 10월 21일 당구인들의 애도 속에 대한당구연맹장으로 치러졌다. 그의 영결식장에는 미국에서 온 부인과 딸 혜진 양이 참석했다. 장례위원장인 홍광선 연맹 고문(허리우드 대표이사)과 선수를 대표한 김경률 선수, 당구인을 대표한 필자의 조사가 이어지는 동안 영결식장은 눈물의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장례식을 끝내고 노제를 지낸 다음 이상천 회장의 유해를 실은 영구차가 일산 국립암센터를 떠날 때의 그 비통함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떠나는 영구차를 붙잡고 “상천아, 이놈아 나를 두고 어디를 가느냐”고 울부짖던 모친의 가슴 찢어지는 애곡소리에 당구인 모두가 끝내 참았던 울음을 쏟았다.

이상천 회장의 유해는 벽제화장장에서 화장되어 유골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의 보광사에 안치되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시대의 ‘당구천재’ 이상천은 마지막 당구인으로 세웠던 꿈을 못다 이루고 아쉽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러나 이상천 회장이 떠난 후 그가 세운 토대 위에 김경률이라는 위대한 거목을 비롯한 여러 명의 유명 선수가 탄생할 수 있었고, 대한당구연맹은 조직을 새로 정비하여 대한체육회 정가맹, 전국체전 정식종목이라는 당구인들의 염원을 이뤄낼 수 있었다.

1990년대 이상천이 없었다면 한국 당구는 목표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고, 2004년 이상천의 대한당구연맹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한국 당구는 어떤 길 위에 놓여있을지 모른다. 이상천과 한국 당구의 짧았던 마지막 인연은 한국 당구사에 길이 남게 될 것이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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