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핵물리연구소의 핵물리학자인 박우진 박사는 분데스리가 2부리그 BF만하임 클럽 소속 3쿠션 선수다. 인터넷 블로거‘매드박’으로도 잘 알려진 박우진 박사는 정통한 세계 3쿠션 정보를 수년 전부터 국내에 전달하고 있다.
어떤 수익이 생기는 일도 아닌데도 그저 당구를 좋아하는 당구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모든 휴가를 당구와 관련된 일에 쏟아 부을 정도의 열정으로 한국과 유럽, 그리고 3쿠션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얼마 전 귀국한 그를 만나 유럽의 클럽 리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유럽은 100년 넘게 클럽 스포츠 제도를 정착시켜 왔다. 분데스리가나 프리메라리그, 프리미어리그 등 유럽 각국에서 치러지는 클럽 리그는 우리에게도 무척 친숙하다.
대부분 축구 프로리그로 알고 있지만, 축구뿐만 아니라 농구, 배구, 당구, 탁구, 테니스 등 모든 스포츠가 같은 명칭으로 매년 리그를 치르고 있다.
한국은 2017년에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의 합병을 앞두고 있다. 엘리트와 아마추어가 분할된 현재의 스포츠 정책을 일원화하고, 유럽형 클럽 스포츠를 접목한 한국형 클럽 스포츠를 양성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앞서 당구는 유럽형 클럽 스포츠의 테두리 안에서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 박우진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본인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독자들이 많이 있다. 간단히 소개 좀 부탁한다.
나는 독일 핵물리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학위 과정을 마쳤고, 학위 기간에 뉴욕 롱아일랜드 섬에 있는 핵물리연구소에서 교환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당구와 인연을 맺었다.
가까운 거리에 고 이상천 회장님이 계셨던 한국에도 많이 알려진 캐롬카페라는 당구클럽이 있었다. 아버지가 이상천 회장님과 친분이 있으셔서 우연찮은 계기로 3쿠션을 접하게 됐다.
2007년에 독일 핵물리연구소로 옮기면서 분데스리가에서 당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다.
보통 분데스리가라고 하면 축구를 많이 생각하는데?
분데스리가는‘전국리그’라는 뜻이다. 각 도시의 클럽들을 기반으로 치러지는 리그라고 할 수 있다.
축구뿐만 아니라, 당구를 비롯하여 탁구, 테니스, 농구 등 모든 스포츠가 매년 분데스리가를 치른다.
단지 축구가 인기 스포츠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독일 축구 프로리그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
당구 분데스리가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가?
당구는 유럽 전역에서 리그가 시작된 지 130~140년 정도 되었다. 내가 속했던 클럽은 신생 클럽인데도 불구하고 1947년에 만들어졌다.
오래된 클럽은 1800년대에 만들어진 클럽도 있다. 대부분 클럽 역사가 깊다. 클럽에 소속된 회원들은 그런 것을 굉장히 자랑스러워 한다.
유럽 사람들 성향 자체가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 이런 자기 도시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강해서 거의 대다수가 평생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구성원들의 결속력이 강하다. 자기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스스로 노력을 많이 하기 때문에 도시마다 특색 있게 발전해 나간다.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부터 분데스리가 2부리그에서 당구선수로 활동하게 되었나?
미국 캐롬카페에서 당구선수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를 갖게 되면서 당구에 대해 많이 알게 되었고, 2007년에 독일로 연구소를 옮긴 다음에는 만하임BC(Mannheim Billiard Club)에 들어가면서 선수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처음부터 선수를 하려고 만하임BC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어떻게 만하임BC에서 3쿠션 선수가 되었나?
독일에 와서 3쿠션을 치려고 당구클럽을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알아보니 3쿠션은 한 도시에 한 군데 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그게 바로 그 도시의 명예를 걸고, 그 도시를 대표하여 분데스리가에 출전하는 클럽이었다. 클럽 회원이 되면 3쿠션을 칠 수 있었기 때문에 만하임BC의 회원이 되었고, 만하임BC는 분데스리가 2부리그를 뛰는 팀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리그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당구를 즐기다가 자연스럽게 클럽 대표선수가 되어 분데스리가를 뛰는 것인가?
그렇다. 각 클럽의 회원이 되면 독일당구연맹에 등록된다. 물론 그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등록선수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명확한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유럽은 이런 클럽 시스템이 굉장히 잘 정착되어 있다.
유럽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스포츠를 하기 위해서 자기가 소속된 도시의 클럽에 가입을 한다.
그럼 상업용 당구클럽은 전혀 없나?
전혀 보지 못했다. 대신 각 도시의 클럽에 회원이 되면 즐길 수 있다. 클럽이 오래되다 보니 테이블도 엄청나게 오래됐다.
여러 나라를 다녀봤는데, 한국처럼 이렇게 좋은 테이블이 있고 그런 나라는 별로 없다. 클럽은 종목별로 각 도시당 한 개밖에 없다. 법으로 그렇게 정해져 있다.
종목당 7명 이상이 모이면 누구나 클럽을 만들 수 있지만, 그 도시에 먼저 발족한 해당 종목의 클럽이 있으면 안 된다.
회원을 등록하는 기준은 있나?
딱히 없다. 그것도 클럽에서 알아서 판단한다. 어떤 클럽은 입단 테스트를 하는 데도 있기도 하지만, 3쿠션은 인구가 적어서 무리 없이 클럽에 가입할 수 있다.
분데스리가 시즌 시작 전에 한 클럽당 시즌 엔트리로 실력이 우수한 10명 정도를 제출하고, 그 중 톱 클래스 4명을 한 경기에 출전시킨다.
클럽 회원이 몇 명이나 있고, 회원들은 클럽을 이용하면서 비용을 지불하는가?
한 클럽 당 평균 30여 명의 회원이 있다. 리그를 뛰지 않는 회원들도 클럽에 와서 게임을 즐기고, 맥주를 한 잔씩 하며 얘기도 한다.
클럽 회원들은 한 달 이용료로 50유로 정도를 지불한다. 회원들의 이용료는 클럽 운영비로 쓰인다. 캐롬은 분데스리가 1부리그를 뛰는 클럽을 제외하면 대부분 영세하다.
캐롬과 포켓볼의 비중은 어떤가?
포켓볼 같은 경우에는 독일에서도 대중적인 스포츠여서 카페나 바(bar)에서도 쉽게 칠 수 있다.
포켓볼과 캐롬의 비중은 독일에 있는 총 200여 개 도시의 클럽 중 포켓볼 150여 개, 캐롬 50여 개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그에 따라 분데스리가 규모도 포켓볼과 캐롬은 차이가 크게 난다.
분데스리가는 어디서 운영하는 것인가?
당구처럼 규모가 크지 않은 분데스리가는 클럽들이 알아서 운영한다. 클럽들이 워낙 연계가 잘 되어 있고 체계가 잘 잡혀 있어서 독일당구연맹도 크게 하는 일은 없다.
홈앤어웨이 방식으로 한 팀당 한 달에 두 경기씩 일 년에 총 열여덟 경기를 치르면 되기 때문에 무리 없이 운영되고 있다.
분데스리가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가?
분데스리가는 시즌별로 진행된다. 9월에 2014-2015시즌이 시작된다. 한 시즌은 매년 9월에 시작해서 다음 해 5월에 끝난다.
여름에는 날씨가 덥기 때문에 리그가 없다. 흔히 말하는 분데스리가는 독일 클럽 리그의 1부리그를 말한다.
당구는 공식적으로 4부리그까지 있다. 분데스리가 1부리그와 2부리그가 있고, 그 아래 란데스리가, 오버리가가 있다.
란데스리가는 주 단위의 리그이고, 오버리가는 지역 리그다. 한국으로 치면 충청도, 경상도 등의 도 단위 리그라고 보면 된다.
1개 리그에 몇 개의 클럽이 출전하나?
리그당 기본적으로 10개 클럽이 기본 구성이다. 네덜란드는 12개 클럽, 벨기에는 10개 클럽, 프랑스는 6개 클럽으로 돌아간다.
분데스리가 2부리그부터는 북부리그와 남부리그로 나뉘어 북부에 10개 클럽, 남부에 10개 클럽이 리그를 뛴다.
독일은 땅덩어리가 커서 스폰서가 많지 않은 클럽은 전국리그를 뛸 수가 없다. 클럽 선수에게 교통비, 숙박비, 식비 등을 자비로 요구할 수 없게 되어 있어서 스폰서가 필요하다.
스폰서에 문제가 생기면 1부리그에서 2부리그로 강등되기도 하는가?
그렇다. 보통 1부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한 팀에 세계 랭커가 한 명 정도는 있어야 된다. 분데스리가가 상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폰서가 없으면 선수들 경비나 게임 수당을 줄 수가 없다.
1부리그 팀에는 반드시 일정 규모 이상의 스폰서가 있어야 한다.
스폰서에 문제가 생길 경우 리그에 출전하지 못하거나 하부 리그로 강등될 수 있다.
나도 전 소속클럽이었던 만하임BC에 스폰서 문제가 생겨 분데스리가에 더 이상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서 얼마 전에 BF만하임으로 이적하게 되었다.
당구의 스폰서는 주로 어떤 이들인가?
보통 스폰서라 하면 뭔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1부리그 클럽을 제외하고는 그 지역 소상공인들이 스폰서를 해주는 경우가 많다.
클럽 앞에 있는 약국, 동네 슈퍼, 음식점, 회원이 운영하는 식당 등 대부분 그런 식의 스폰서라고 보면 된다. 한 개 클럽에 무려 30~40개의 스폰서가 있는 경우도 있다.
스폰 금액은 대부분 50만 원 내외의 소액이다. 이들은 자기 지역 발전과 명예 같은 거를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기 때문에 스폰 요청이 들어오면 흔쾌히 응한다.
물론 1부리그를 뛰어야 하는 팀에는 중소기업 이상의 스폰서가 붙는다.
상위 랭커들은 출전 수당을 받는다고 들었는데?
토브욘 블롬달이나 프레데릭 쿠드롱 같은 선수들은 한 경기당 1,500유로 정도의 출전 수당을 받는다.
클럽은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 세계 랭커에게 출전 수당을 주고 영입하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용병이다. 각 클럽의 1번 선수는 용병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나라의 리그에서 용병은 한 경기에 2명까지 출전이 가능하지만, 분데스리가는 보수적이어서 1명밖에 출전이 허용되지 않는다.
지난 시즌에는 세계 랭커 용병들이 2부리그에 몰려서 오히려 2부리그 경기가 재미있었다.
2부리그 클럽이 1부리그로 진출하기 위해 용병을 영입한 것인가?
우연찮게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면서 쿠드롱, 멕스, 자네티, 레펜스, 타이푼, 초클루, 엘플러, 닐센 등이 한꺼번에 2부리그를 뛰었다.
쿠드롱과 멕스, 레펜스가 속한 BC엘버스베악은 1800년대에 생긴 가장 전통있는 클럽으로 과거에 레이몽 클루망이 소속된 클럽이다.
그런데 지난 시즌에 스폰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2부로 강등되었다.
타이푼과 초클루가 뛴 아베스부르크라는 클럽은 원래 4부리그 소속이었는데, 독일에서 사업을 하는 한 터키인 사업가가 몇 년 안에 1부리그까지 올리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우고 타이푼과 초클루를 한 경기당 1,500~2,000유로씩 출전 수당을 주고 영입했다.
4부리그면 수준이 어느 정도 되나?
1번 선수가 애버리지 1.00이 채 안 된다. 4번 선수는 애버리지 0.50 정도의 수준인데, 타이푼과 초클루가 4부리그부터 뛰면서 클럽을 2부리그까지 올려놓은 거다.
2부리그의 상위 2개 클럽은 2014-2015시즌에 1부리그로 올라가고, 반대로 1부리그 하위 2개 클럽은 다음 시즌에 2부리그로 강등된다.
이런 재미있는 경우가 지난해 유러피안챔피언십(UEFA컵)에서도 있었다. 프랑스의 아지피가 쿠드롱, 자네티, 뷰리, 루의 라인업으로 8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는데, 터키에서 작정하고 이스탄불에 타이푼, 초클루, 세네트, 윅셀 등 터키 1위부터 4위까지 선수를 한꺼번에 몰아버렸다.
끝내 이스탄불이 아지피를 결승전에서 누르고 아지피의 8년 독주를 마감시켰다.
유러피안챔피언십도 상금이 없나?
분데스리가도 그렇고, 유러피안챔피언십도 그렇고, 상금은 없다. 오로지 클럽과 도시와 국가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 유럽인들에게 그것은 꿈의 무대다.
유러피안챔피언십은 21개 국가의 챔피언 클럽이 국가와 클럽의 명예를 걸고 대결을 벌인다. 그런 무대에 김행직 선수가 2년 전 아시아인으로 유일하게 유러피안챔피언십에 출전했다.
게다가 파이널라운드 무대를 밟기까지 했다. 분데스리가 1부리그 호스터에악에서 뛰었던 김행직 선수는 팀을 리그 챔피언으로 이끌어 유러피안챔피언십에 출전했다.
6강 파이널에서도 FC포르투의 1번 산체스와 대결해서 승리했지만, 나머지 2, 3, 4번 선수가 모두 패해 아쉽게 탈락한 바 있다.
마지막으로 몇 년 동안 유럽의 클럽 시스템을 직접 경험한 소감 한마디 해달라.
유럽의 스포츠는 클럽 시스템을 통해 오랜 시간 유럽 사람들의 생활 속에 뿌리내렸다. 그들에게 스포츠는 생활이 되었다.
스포츠를 통해 자부심을 고취하고, 도시의 발전을 모색한다. 스포츠는 이제 그들 삶의 주체가 되었다.
유럽과 같은 방식의 클럽 시스템은 단지 스포츠 역량 강화만을 가져오는 게 아니라, 전반적인 삶의 방향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유로운 경쟁을 통한 지속적인 성장이 더 살기 좋은 국가와 도시로 만들어가는 토대가 되고 있다.
스포츠를 통해 보다 즐거운 삶과 발전 방향을 모색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엘리트 위주로 메달 획득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한국 스포츠의 현실에 대한 아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