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설치된 옥돌실 모습. 옥돌대 2대가 상아공과 큐 등 비품과 함께 놓여 있다.

[주] 이 항목의 글은, 조동성 씨의 <내가 본 당구사>(1980년 발행)에서“우리나라의 당구사는 1909년 황실에서 시작”이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한국 당구의 기원을 확정한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다시 변개(變改)하는 것이므로 참으로 조심스럽다.

그러나 조동성 씨가 <내가 본 당구사>를 집필할 당시 이후로 당구에 관한 역사적 고증자료들이 속속 발굴되어 당구의 기원과 역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필자로서는 한국 당구의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여 현 당구계와 후대에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입장과 책임감에서 이 글을 역사적 자료에 의거해 객관적으로 쓰게 됨을 밝혀 둔다. 아울러 한국의 당구 기원도 1909년이 아닌 1884년으로 25년 앞당겨져 올해로 130년이 된다.


1912년에는 순종이 머무는 창덕궁 동행각에,
1913년에는 고종이 거처하는 덕수궁 덕홍전에도 설치

“우리나라에 당구가 처음 전래된 것은 1909년이고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당구대 2대가 설치되었다”는 것이 오늘날까지 정설처럼 되어 왔다. 그러나 이 설은 새로운 사료(史料)들이 속속 발굴됨으로써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왕실에 당구대(옥돌대)가 설치된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12년 3월 1일자의 <매일신보> 제1면에서다. ‘이왕가 개설(李王家 開設)의 옥돌실(玉突室)’이라는 제목으로 보도사진까지 수록했다. 그리고 6일 뒤인 3월 7일자에는 다시‘이왕전하(李王殿下) 옥돌(玉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창덕궁에서는 기보(旣報)와 여(如)히 이왕전하 어운동(御運動)으로 인하여 특히 동경(東京) 일승정(日勝亭, 닛쇼테이)으로 주문하여 2대의 옥돌대를 구구(購求)하여 동행각(東行閣)으로써 옥돌운동장에 충(充)하였는데 기후(其後) 매주 월목 양요일을 옥돌운동일로 정한지라 근경(近頃)에는 동기(同技)에 심히 흥미가 유하사 정일(定日) 이외에도 동장(同場)에 빈빈(頻頻) 어림(御臨)하신다더라.”

경술국치(1910년 8월 22일) 후 순종황제(純宗皇帝)가‘창덕궁 이왕’으로 전락한 지 1년 반 뒤에 건강 유지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위락시설로 일본으로부터 당구대를 들여왔다는 최초의 기록인 셈이다. 그런데 <매일신보> 1913년 8월 29일자에는 다시 ‘이태왕전하(李太王殿下) 어환력연(御還曆宴)과 근상(近狀), 이태왕전하 환갑수연’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이태왕전하는 곧 고종(高宗)이다.

“덕수궁 이태왕 전하께오서는 작년이 환갑되시는 해이나 양암 중인고로 축하하는 예절을 정지하였더라. 금년에는 구월 팔일 어탄신에 성대히 잔치를 배설한다더라. (중략) 소견하시는 것은 돌옥과 유성기가 연래로 습관이 되샤 아침에는 열한 시까지 함녕전 침실에서 취침하시고 밤 두세 시까지 침실에 들지 아니하시는 고로 소견하시는 것은 덕후전(덕홍전)에 설비하여 놓은 옥돌장에 출어하샤 공채를 잡으시는 일도 있고 전하께오서는 공치시는 데 극히 재미를 붙이샤 전에는 내전에서 여관들을 데리시고 공을 치게 하시고 즐거워하시며 여름에는 오후 서늘한 때에 석조전 누상에서 수음 사이로 흘러 돌아오는 청량한 바람을 몸에 받으시며 내인들을 데리시고 이야기도 시키시고 서늘한 달그림자 아래에 유성기 소리도 즐거워하신다더라.”

이 기록으로 볼 때, 순종뿐만 아니라 아버지 고종도 덕수궁 덕홍전(德弘殿)에 당구대를 비치하고 자신뿐 아니라 궁중 여인들까지도 당구를 치게 하며 당구에 심취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당구가 등장함으로써 무료한 생활을 하던 전직 황제들은 건강을 챙기고 취미까지 붙이게 되었으며, 당구는 대표적인 궁중오락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순종의 당구에 관한 기록은 1926년 순종의 국장(國葬)을 치르면서 발간된 <순종국장기념사진첩>과 <순종국장록>에 보다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순종국장기념사진첩>(1926년, 경성사진통신사 발행)

운동과 옥돌
시계에 대한 기이한 취미를 가지신 전하께서는 또다시 고 이완용후(故 李完用候, 죽은 이완용 후작이라는 뜻)의 진언으로 실내운동을 겸하옵시사 옥돌(玉突)에 취미를 우(寓)하시고 승하하옵시던 당시까지 인정전(仁政殿) 동행각(東行閣)에는 옥돌장을 설치하셨으니 차(此)는 평일에 매일 오후 2시부터 동 4시경까지 시신(侍臣)을 데리시고 차(此)를 농(弄)하시는 것으로써 일과를 삼으시며 일본 혹은 각국에서 옥돌선수가 경성(京城)에 도착하면 반드시 일차식을 인견(引見)하사 기기능(其技能)의 여하를 하시(下試)하옵셨다 한다.”

당구에 취미를 붙인 순종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운동을 겸하여 매일 오후 2시부터 4시 무렵까지 일과로서 당구를 즐겼고, 외국 선수들이 서울에 오면 반드시 한 차례씩 불러 경기를 해 기량을 테스트해 본다는 내용의 기록이다.


<순종국장록>(1926년, 조선박문사 발행) 86~87쪽

운동의 필요로 옥돌
무술(戊戌) 7월 25일 김홍륙(金鴻陸)의 음모로 진어(進御)하신 가배차(珈琲茶, 커피)에 아편중독을 소해(消解)하기 위하여 대소 양변도(大小 兩便道)로 체독(滯毒)을 유하(流下)케 하는 해독제를 과복하신 결과 위장과 신장이 아울러 어고장을 생하신 것이 연래(年來)의 원인이 되시었다. 그러므로 운동을 하시면 다소 보효(補效)가 되실까 하여 인정전 동행각에 옥돌대 두 대가 놓여 있으니 간간 시신(侍臣)들을 데리고‘큐’를 잡으시었섰다. 내외국에 옥돌선수가 경성(京城)에 이르기만 하면 반드시 한 번씩은 인견(引見)하옵시었섰다. 옥돌의 적수되는 사람은 전 창덕궁경찰서장 야노(矢野)인데 결코 이기시려는 욕심이 없으시고 항상 어찌하면 자미있게 마칠까 하시는 고아(高雅)하옵신 생각으로 옥돌판을 대하옵시는 터이라. 실력은 60에서 70 내외까지이시었다 한다.”

위의 기록에 대하여 조동성(趙東成) 씨는 <내가 본 당구사>에서“참고로 그 당시의 이 점수는 현재의 1백50~2백점대로 비교적 고점자의 수준이었다고 본다. 사진과‘원로인’을 통한 내 나름의 판단은, 당시 게임 방법은 정통의 4구치기였으며 당구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중대, 공은 당연히 상아공이었고 직경이 지금의 65.5mm 보다 약간 큰 69mm였다. 그러나 이상은 기록상의 추정이고 그것도 궁중 내이고 보니 보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다.”고 적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원로인’은 초창기 당구인 김효근(金孝根) 씨이며, 그는 당구 스승인 궁정당구대의 시설관리자 겸 개인교수였던 전상운(全相雲) 씨를 통해 전해 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저작권자 © 빌리어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