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WPBA의 가장 큰 투어 이벤트인 여자 US 오픈 9볼 챔피언십에서 김가영과 차유람 이후 또다시 한국 선수 한 명이 세계 포켓볼 팬들의 시선을 끌었다.

중국에서 출발한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대회 전날 밤 겨우 호텔에 도착한 박은지는 자신의 경기 시간조차 알지 못한 채 아침 일찍 경기장으로 향했고, 예선 첫 경기에서 90년대 초를 장악했던 세계 챔피언인 이와마탸아 라우랜스에게 7-9로 지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US 오픈은 더블 예선전이었기 때문에 알바니아의 보라나 안도니를 9-5로 이긴 박은지는 겨우 다음 경기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박은지는 세계 랭킹 1위의 카렌 코어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포켓볼 선수라는 자넷 리를 연속해서 이기며 앨리슨 피셔와의 준결승까지 올랐다.

비록 2011 US 오픈 9볼 챔피언십의 최종 승자인 앨리슨 피셔를 꺾을 수는 없었지만, 박은지는 이 대회를 통해 US 오픈 역사상 예선전부터 출전해 방송 중계되는 준결승까지 오른 첫 번째 선수라는 기록을 세웠다.

 

미국 포켓볼 프로 데뷔 무대를 아주 훌륭히 치러냈다. 미국 진출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2011년 2월에 드래곤프로모션 소속으로 미국으로 찰리 윌리엄스에게 훈련을 받으러 갔었다. 거기에서 9개월 정도 훈련을 받으면서 프로 데뷔를 준비했다.

솔직히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아마추어들과의 시합은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3월의 첫 아마추어 대회에서 13위, 그리고 5월에 열린 라스베이거스 대회에서 9위를 했다.

세계 무대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하지만 훈련을 하면 할수록 자신감이 붙었다. 특히 정신력이나 체력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당시에는 잘 못 느꼈지만, 확실히 경기에 도움이 되었고 지금도 역시 도움이 되고 있는 걸 느낀다.

이후 여러 대회에 참가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은 없었는데, 첫 프로 데뷔 무대인 US 오픈 9볼 챔피언십에서 준결승전까지 진출해 3위에 올랐다.

예선전부터 출전해 준결승전까지 오를 동안 총 7게임을 연속해서 해야 했다. 체력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을 텐데.

6번째 경기였던 카렌 코어와의 경기가 끝나고 보니 발에는 물집이 생기고, 무릎에는 통증이 느껴졌다.

14시간 동안이나 대회를 치렀다. 하지만 내 발이 그렇게 될 때까지 고통스러운지도 느끼지 못할 만큼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으며 프로 데뷔를 마쳤고, 어느새 3년이 흘렀다. 그 후 금방 큰 대회에서 입상 소식이 들릴 줄 알았는데, 아직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

나는 내가 늦게 되는 사람이란 걸 안다. 가끔 가영 언니나 유람 언니처럼 빨리 유명해지고, 세계 챔피언도 돼야 하지 않냐며 조급해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난 굳이 나를 뛰어난 언니들과 비교하고 채찍질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갈 길을 꾸준히 가자는 주의다. 그렇게 한발 한발 가다 보면 가영 언니가 간 길, 유람 언니가 간 길처럼 언젠가는 내가 간 길도 나 있지 않을까? 조금 느리지만, 차근차근 나만의 방법으로 준비하고 있다. 지켜봐 줬으면 좋겠다.

미국 진출까지 쉽지 않았다. 꽤 큰 진통을 겪었다. 대한당구연맹을 탈퇴하면서 선수의 자격을 잃었고, 우여곡절 끝에 다시 선수 등록을 하게 됐다.

내 실수였다. 바보 같은 선택을 했고, 그때는 그게 최선의 방법처럼 보였다. 그때는 지금보다 포켓볼이 더 열악했던 시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들에게 월급을 주는 프로 리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금이 큰 포켓볼 대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던 시기에 실업리그를 만드니 그쪽으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대한당구연맹에 등록된 당구선수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포켓볼을 계속 치면서 경제 여건까지 나아질 기회 같았다.

주변에서도 좋은 기회라고 했고, 다른 선수분들도 옮기려는 분위기가 만연했다. 그때 같이 옮겨간 당구선수들도 제법 됐다.

그러면서 별로 크게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두 번의 리그 동안 두 번 다 내가 우승을 해 부모님께 경제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런데 후폭풍이 그렇게 클 줄 몰랐다. 해외 진출의 기회가 드디어 왔는데, 대한당구연맹 소속의 선수가 아니면 참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게 당연한 건데, 실업리그로 옮길 때 몇몇 사람들이 꼭 연맹 선수가 아니어도 해외 진출에 상관없을 거라 했던 걸 바보처럼 믿었던 거다.

국내의 실업리그가 내 최종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해외 진출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서든 대한당구연맹 소속 선수가 되어야 했다.

그 당시 반대 의견이 많았다. 심리적으로도 쉽지 않은 시기였을 텐데.

솔직히 실업리그의 유혹에 안 끌렸을 당구선수가 어딨겠는가. 그래도 엘리트 선수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리를 지킨 선배 선수들에게 내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다행히 대한당구연맹에서 다시 받아줘서 선수 생활은 시작할 수 있었지만, 정말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되어 있었다.

선배들한테야 당연히 혼날 거 혼나고 다시 잘하면 되는데, 후배들에게까지 눈치를 봐야 하고 또 내 이런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게 마음이 많이 상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시합 전에 공식적으로 선수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시간이 점점 흐르니 자연스레 다시금 같은 동료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

개인적인 인생과 당구 인생을 통틀어 아버지(박승칠 당구학교 원장)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시다.

그리고 개인적인 삶에서는 가장 친한 친구 한 명이 있는데, 그 친구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당구에서는 김가영 선수가 나의 롤모델이자 나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아버지는 항상 내가 어떤 길을 가야 할지 그 길을 제시해주신 분이시다.

물론 같은 분야에 있다 보니 종종 부딪칠 때도 있지만,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하고, 내가 나약해지거나 힘들어할 때마다 아버지와 친구가 정신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가영 언니 같은 경우는 내가 선수로서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언니로도 좋아하는 사람이다.

가영 언니는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고, 또 많이 닮고 싶은 사람이다. 시합 후에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 못하는 고민들을 언니한테 털어놓으면 언니가 조언을 많이 해주신다.

해외 시합에 같이 나가게 되면 일부러 언니 게임을 챙겨서 보는 편이다. 언니의 경기를 보는 것 자체도 훈련이고 같이 경기를 할 때도 비록 상대편이지만 많이 배우게 된다.

 

함께 경기를 했던 외국 선수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누구인가?

캘리 피셔 선수다. 캘리 피셔 같은 경우 그동안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만날 때마다 압박감을 느낀다. 개성이 강하고 자기 스타일이 분명한 선수라 색다르게 기억된다.


자신의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되나?

아직 안 왔다. 지금 그 전성기를 위해 열심히 준비 중이다. 앞으로 2~3년 이내에 내 생애 최고 성적을 낼 계획이다.

물론 계획만 한다고 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20대의 나는 30대의 나를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선수가 30대에 최고의 기량을 선보이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나 역시 30대가 되면 비로소 내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다.


전성기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한 가지만 힌트를 달라.

우선 대만 진출을 생각 중이다. 한국에서는 대회도 많지 않고 한계가 있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더 많이 배우고 부딪혀야 한다.

아버지는 중국도 괜찮은 것 같다고 하셔서 그쪽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기대하고 있겠다. 박은지 선수가 한 차원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요즘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보인다. 무슨 일 있었나?

슬럼프가 좀 길었다. 그리고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마음 추스르는 게 쉽지 않았다.

벌써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큰일을 겪었다. 하늘에 계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그렇다. 이제는 다시 힘을 내고 있다. 중국으로 훈련을 갔다가 지난 주에 귀국했다. 연습도 하루에 6~8시간씩 하고 있다. 배우고 온 것들을 계속 되새기고 복습하고 있다.

대회에 참가했을 때 연습이 충분히 안 되어 있으면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안 생긴다. 곧 있을 대회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지금 세계 랭킹은 몇 위인가?

21위 정도다. 엄마 돌아가시고 방황하는 동안 많이 떨어졌는데, 겨우겨우 이만큼까지 다시 올라왔다.


목표 랭킹은 몇 위인가?

최소 16~10위 안에는 들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으로 열리는 모든 시합에서 16강 안에 들어야 한다.


제보에 의하면 중국에서 박은지 선수의 인기가 제법 높다던데? 시합 후에 박은지 선수 사인을 받겠다며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

인기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웃음) 그저 내 시합을 보러 와주시고, 또 시합 후에 사진을 찍자거나 사인을 해달라는 분들을 볼 때마다 큰 힘을 얻는다. 정말 감사하다.


박은지 선수의 인생 목표는 무엇인가?

당구가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 채택되어서 국가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따는 것. 그게 내 인생의 목표다. 그런 날이 반드시 왔으면 좋겠다.


꼭 기다리겠다. 마지막으로 박은지 선수를 아껴주신 가족들, 동료 선수들, 그리고 팬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당구를 시작하는 처음부터 그리고 지금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날 지켜주고 도와주는 우리 아빠, 내 옆에 항상 함께 있어주는 나의 절친,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영 언니와 현지원 언니를 비롯해 부족하고 실수도 많이 하고 본의 아니게 상처도 주는 저를 끝까지 믿고 이해해 주시고 때로는 혼내 주시고 또 품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

절대 잊지 않고 항상 끝까지 그 사랑에 보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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