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本色] 프로 당구선수가 된 ‘이상천의 외동딸’ 올리비아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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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本色] 프로 당구선수가 된 ‘이상천의 외동딸’ 올리비아 리
  • 김도하 편집장
  • 승인 2022.06.2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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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당구를 스포츠로 이끈 아버지 이상천과 그 기반 위에 탄생한 프로당구 도전하는 딸 올리비아 리

“당구선수가 되는 첫째 이유는, 아빠가 사람들에게 잊히지 않는 것. 두 번째는 더 많은 사람이 당구를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여자 프로당구 LPBA 데뷔전을 치르는 올리비아 리(30)는 자신이 당구선수로 나서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캐롬 3쿠션 종목의 전설적인 선수 고 이상천(1954-2004)의 외동딸이다.

한국 당구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로 평가받는 이상천이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하던 시기에 얻은 딸이 올리비아 리다.

87년에 미국으로 간 이상천은 91년에 3쿠션 당구월드컵에 출전해 준우승과 우승을 연달아 차지하며 세계적인 선수로 발돋움했다.

그 시기에 미국 뉴욕에서 ‘SL빌리어드(현 캐롬카페)’라는 대형 당구클럽을 연 이상천은 이듬해인 92년 4월에 올리비아 리를 얻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사에 남은 활약을 펼쳤다.

이상천은 92년 말부터 스페인, 네덜란드, 터키에서 열린 3쿠션 당구월드컵 4강에 3회 연속 진출했다. 터키 이스탄불 대회에서는 생애 3번째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91년 이후 총 16번의 당구월드컵이 열리는 동안 이상천은 결승에 5번이나 올라갔고, 그중에 3번을 우승했다.

94년 1월에 벨기에 겐트 대회에서 4번째 우승을 차지한 이상천은 한국인 최초로 마침내 3쿠션 세계챔피언에 등극했다.

올리비아 리가 걸음마를 떼던 시기에 이상천은 세계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이러한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올리비아 리도 당구클럽에 가는 것이 일상이었고, 손쉽게 큐를 잡고 공을 뚝딱거렸다.

틈이 나면 어린 딸에게 세계챔피언인 아버지가 공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런데 워낙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으로 인해 이상천을 따르는 사람이 많았고, 대형 클럽에서 오가는 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다 보니 그것이 부담스럽다고 느껴지기 시작하면서 당구 치는 게 편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당구클럽에 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졌다.

대학에 가기 전까지 당구 큐를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던 올리비아 리는 약학전공으로 대학에 진학하면서 거의 당구를 치지 않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장학금도 받고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도서관에서 공부만 하는 게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느껴 학업을 중단하고 지난 2015년, 한국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아무도 모르게 한국에 온 올리비아 리는 대구 인근의 한 어학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던 올리비아 리에게 다시 당구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 워낙 당구클럽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무 때나 어디서든 당구를 칠 수 있었고 누구도 올리비아 리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는 뉴욕에서처럼 눈치를 보거나 큐를 잡는 것이 조심스럽지 않았다.

마음 편하게 당구클럽을 드나들면서 당구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올리비아 리는 혼자서 큐가방을 어깨에 메고 당구 치러 전국을 돌아다녔다.

타고난 성정을 숨기지 못하듯 올리비아 리에게 새로운 인생이 당구와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의 시간이 지나고 올리비아 리는 운명적으로 지금의 남편 정상훈(44) 씨를 만나게 되었다.

“남편에게 당구를 배우면서 한 2년 정도는 준비를 한 것 같다. 물론, 막연한 생각이었다. 선수를 해야지 이런 것보다는 단지 당구가 재밌었다.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레슨을 받다가 한국어가 조금 늘어 서서히 당구 레슨이 이해가 되기 시작하면서 더 재미가 있어졌다”

정상훈 씨는 외국에서 사업을 하던 중에 지인이 아프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사람이 운영하던 당구클럽을 인수했다.

정상훈 씨는 35점을 치는 아마추어 당구 고수로 알려져 있었다. 어느 날 올리비아 리가 사무라이처럼 큐가방을 메고는 정상훈 씨가 운영하는 클럽을 찾아갔다.

그것이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고, 올리비아 리가 당구선수로 데뷔하는 시작점이었다. 2018년 4월, 만난 지 5개월 만에 두 사람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원래는 남편 정상훈 씨가 당구선수가 되는 것이 목표였다. 물론 정상훈 씨도 선수 못지않은 실력으로 올해 열린 라스베이거스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미국 선발전에 출전해 예선 3라운드(PQ)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올리비아 리가 당구를 배우면서 남다른 유전자 탓에 빠르게 실력이 향상되었고, 남편보다 먼저 프로당구에 데뷔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영향과 남편의 도움, 두 사람으로 인해 올리비아 리는 마침내 당구선수의 길을 가게 되었다.

LPBA 투어 데뷔전을 앞두고 서울 강남의 PBA스퀘어에서 올리비아 리를 만났다. 프로 데뷔 발표가 나간 이후 몇몇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올리비아 리는 불과 몇 년 전까지는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했고, 지금은 많이 배워서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아직 한국어가 어색하기 때문에 본인의 의사가 다르게 전달되어 혹시나 아버지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가 생길까봐 인터뷰를 하는 것도 아직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고 이상천 선수(1954~2004). 2018년 4월 결혼한 올리비아 리와 남편 정상훈 씨. 2004년 이상천 영결식에 참석한 올리비아 리.  빌리어즈 자료사진

“작년에 아는 분이 젊은 사람에게 ‘이상천 선수 딸이야’라고 소개했는데, 아빠가 누군지 모르더라. 딸의 입장에서 그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는 것이. 당구선수로 열정이 넘쳤던 아빠의 모습이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당구선수에 데뷔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고 이상천 선수는 처음 한국이라는 나라를 세계 당구계에 알린 인물이다. 또한, 2004년 대한당구연맹 회장을 맡아 3쿠션 국내 보급의 기반을 닦은 장본인이다.

그가 몸이 안 좋아져 지팡이를 짚고서도 전국을 누비면서 투어를 다닌 결과로, 2000년대 중반 국내에 3쿠션 대대가 급격하게 퍼져 지금의 당구 문화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당구선수가 내기 당구를 하지 못하도록 전면 금지시켰고, 당구선수가 가슴에 패치를 달고 기업의 정기적인 후원을 받는 길을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이상천이다.

그가 발굴한 고 김경률(1980-2015)은 이상천의 후계자로, 기업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상천이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업적이 결국 3쿠션 세계 최강국을 만들었고, 지금의 프로화의 초석이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이상천의 업적은 서서히 잊혀지게 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한 올리비아 리는 여자 프로당구 LPBA에 도전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직접 당구선수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처럼 올리비아 리는 아버지 이상천처럼 열정적인 당구 DNA를 가졌다. 여자 혼자서 큐가방을 메고 전국을 돌아다닐 정도로 당구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그동안 올리비아 리가 언론과 접촉을 피했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는 아버지만큼 당구를 사랑한다.

뒤늦게 아버지의 길을 따라가게 된 올리비아 리의 선택이 여자 당구와 3쿠션 붐의 촉매제가 되기를 기대한다.

 

<월간 빌리어즈> 김도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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