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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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어즈=김민영 기자] 1999년생 올해로 24살이 된 이우진(인천시체육회)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자 포켓볼 당구선수다. 고등학생 때부터 국제대회에 나가 두각을 나타낸 이우진은 아시아주니어포켓볼세계선수권대회에서 2관왕에 올랐으며, 한국 최초로 세계주니어포켓볼선수권대회 결승에 진출해 준우승의 쾌거를 달성한 장본인이다. 선수층이 얇은 국내 포켓볼 사정으로 볼 때 이우진의 이러한 성적은 한국 포켓볼 미래의 한 줄기 빛처럼 보였다.

특히 이우진은 대학 진학 대신 대만으로 포켓볼 유학을 떠나 4년간 실력을 연마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2020년에는 미국 프로 무대에도 데뷔할 예정이었다. 비록 시기가 늦춰지기는 했으나 그녀의 도전은 아직 현재진행 중이다.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오픈대회에 한국 여자 선수 중 유일하게 출전해 본선 진출까지 이뤄낸 '국내랭킹 1위'의 이우진을 <빌리어즈>에서 만났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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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출전한 국제대회는 어땠나? 

확실히 국내시합과는 또 다른 긴장감이 있었다. 요즘 세계대회의 경기방식이 바뀌었다. 국내대회는 8선승제나 9선승제로 경기를 하는데, 국제대회에서는 4선승제 두 판 세트제로 경기를 한다. 세트스코어 1-1이 되면 승부치기를 하는데, 이번 대회 동안 전부 승부치기를 해야 했다. 승부치기에 대한 훈련이 안 돼 있어서 너무 힘들었다.  

 

포켓볼은 승부치기를 어떻게 하나? 

똑같은 위치에 공을 놓고 그것만 계속 친다. 먼저 실수하는 사람이 지는 거다. 

 

엄청난 압박감이 들겠다.   

정말 그런 압박감과 부담을 처음 느껴봤다. 진짜 신선한 경험이었다.  

 

당구를 처음 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0살 때 부모님이 포켓볼을 치러 다니실 때 따라다녔다. 그러다 나도 한번 쳐보겠다고 도전을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당구장 사장님이 언제든 놀러 와서 포켓볼을 쳐도 된다고 하셔서 그때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꼭 포켓볼을 치러 다녔던 게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어 준 것 같다.  

 

부모님은 원래 포켓볼을 자주 치셨나? 

두 분이 주말마다 포켓볼을 치러 다니실 정도로 포켓볼을 좋아하셨다. 부모님의 영향이 컸다.  

 

본격적으로 포켓볼 선수가 돼야겠다고 진로를 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사실 좀 크고 나서는 포켓볼이 예전같이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포켓볼을 그만 칠 생각이었는데, 공부를 안 해도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에 혹해서 대학을 목표로 학생 선수를 시작했다.  

 

그랬는데 정작 대학을 안 가고 대만으로 당구유학을 갔다.  

고3 때, 대학 진학을 할지 아니면 대학을 포기하고 당구선수를 할지 고민이 많았다. 왜냐하면, 공부와 훈련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포켓볼을 더 배우기 위해 대만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부모님의 권유도 있었나? 

아니, 전적으로 내 결정이었다. 부모님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고등학교 3년 동안 학생부 시합 준비를 했는데 수시모집 넣기 일주일 전에 대학을 안 가겠다고 하니까 많이 속상해 하셨다. 더군다나 대만 유학 자체가 너무 무모한 도전처럼 느껴졌으니까.  

 

대학 입시를 목표로 포켓볼을 시작했는데, 학생 선수를 하면서 오히려 진짜 당구선수가 되고 싶어진 상황이 됐다.  

그렇다. 포켓볼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점점 더 포켓볼의 매력에 빠졌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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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대회 입상은 언제였나? 

13살 때 학생 선수로 등록하기 전에 엄마가 무작정 전국학생당구대회에 참가 신청을 하셨다. 나는 솔직히 너무 나가기 싫었다. 전문적으로 포켓볼을 배운 친구들이 나올 거고, 그러면 내가 경쟁이 되겠나. 그런데 그 대회에서 3등을 했다. 그게 나의 첫 입상이었다. 나는 그날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안 배워도 3등이나 했으니까.  

 

지금은 어떤가? 여전히 천재라고 생각하나, 아니면 무수한 노력으로 이룬 실력이라고 생각하나? 

재능은 좀 있는 것 같다. 내가 당구 치는 걸 지켜본 사람들은 내가 당구 칠 때 센스가 좀 있다고 한다. 물론 노력도 많이 했다. 하지만 재능이 뒷받침돼줬기에 노력한 만큼, 혹은 그 이상 실력이 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우진 선수는 국내대회보다 국제대회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특히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 결승 진출은 한국 최초의 기록이기도 하다.  

아시아주니어포켓볼세계선수권대회에서 2관왕을 달성했고, 세계주니어포켓볼선수권대회에서도 준우승을 했다. 세계포켓볼남녀복식대회에서는 3위와 6위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국내대회에서도 20살 때부터 일반부에 나오면서 입상을 놓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다.  

 

선수 데뷔 후 첫 우승은 언제였나? 

학생 때는 학생부 시합을 준비하느라 일반부 대회에 거의 못 나갔다. 2018년 전국체전이 성인부 첫 대회였는데, 그때 첫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고 우승은 1년 반 후에 22살 때 ‘2020 고성군수배 전국당구대회'에서 첫 우승을 했다.  

 

지금까지 대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가 있나? 

20살 때 대만 유학 중에 처음으로 나간 일반부 대회가 전국체전이었다. 첫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결승까지 올랐고, 김가영 선수에게 패해 준우승을 했다. 그 이후 좀 건방져졌다. 그다음 달 바로 열린 '2018 대한체육회장배 전국당구대회'에서 또 결승에 올라가서 진혜주 선수와 마지막 대결을 했는데, 7-3으로 이기고 있었다.

한 세트만 더 이기면 끝이라 당연히 그대로 경기가 끝날 줄 알고 혜주 언니 모르게 관중석에서 응원하는 사람들한테 'V(브이)'를 하면서 장난까지 쳤다. 그런데 그 경기를 7-8로 역전패 당했다. 그런 건방진 태도가 결국 그날 경기에 영향을 미친 거다. 그 뒤로는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대만에서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대학을 포기하고 대만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  

2017년부터 2020년까지, 19살 때부터 22살 때까지 대만에 있었다. 처음 계획은 더 오래 있을 계획이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강제 귀국 당한 셈이다.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기 위해서 언어도 배우고 싶었고, 또 그 당시 대학에 가는 것보다 선수 성적에 더 자신이 있었다. 대만은 우리나라보다 포켓볼이 더 활성화되어 있고, 포켓볼을 더 사랑하는 나라여서 아무래도 포켓볼을 치거나 배우려면 대만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대만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대만에서는 당구 연습, 시합, 잠 빼고 한 게 없다. 관광지도 부모님이 대만에 오셨을 때 딱 하루 가봤다. 항상 연습과 시합, 그리고 잠자는 것, 이 세 개 말고는 기억이 별로 없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대만 유학 중 특별히 도움이 된 사람이 있나? 

대만에 커핀이, 커핀중, 커핀완이라는 삼형제가 있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모든 이유가 그 대만 친구들이다. 내 인생에서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만큼 가치 있고 큰 의미가 있는 친구들이다.  

학생 때 대만에 가서 아직 자아도, 실력도,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았을 때 선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 첫째인 커핀이가 내 당구 코치였는데, 나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고 옆에서 그들을 보고 배우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평생을 감사하면서 살 것 같다. 

 

커핀이 삼형제는 포켓볼 잘 치기로 소문이 파다하다. 커핀이와 커핀중은 이미 톱클래스 선수들인데, 특히 그 선수들에게서 꼭 배우고 싶은 건 무엇이었나? 

냉정함이다. 평상시에는 인성도 바르고 정말 좋은 사람들이다. 절대 사람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 않는 친구들인데 시합 때는 싹 바뀐다. 시합 때는 그 누구도 배려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우선으로 챙기는 것을 보면서 저런 프로페셔널한 마인드는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만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21살 생일날 이종민 선수랑 고태영 선수도 대만에 있었다. 그때 생일이라고 그 친구들이 한식으로 생일상을 차려줬다. 평소에 편식이 심해서 대만에서 먹는 거로 스트레스를 진짜 많이 받았는데,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 기억을 잊지 못할 것 같다. 

 

코로나19에 대한 방역 지침이 조금씩 완화되면서 당구대회도 올해부터 정상화될 것 같은데, 본격적인 해외 진출 계획을 갖고 있나? 

아시아권에서 열리는 대회는 항상 출전해 왔다. 원래 2년 전에 미국 프로대회를 나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딱 그때 코로나가 터져서 다 망쳤다. 어쨌든 이제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으니 앞으로 프로 투어든, 남녀 세계 오픈대회든 계속 나갈 예정이다. 그 첫 번째 대회가 얼마 전 다녀온 라스베이거스 오픈대회다.  

 

올해 첫 대회인 국토정중앙배 전국당구대회에서 개인전 금메달과 복식 동메달을 땄다. 올해 출발이 좋은데? 

그 대회는 제가 우승을 해서 기뻤다기보다 인천시체육회 소속의 우리 팀원들이 다 금메달을 따서 더 의미가 컸다. 인천시체육회로 소속을 옮긴 후 이완수 감독님을 주축으로 권호준 선수와 이대규 선수, 그리고 나까지 모두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해서 더 기뻤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현재 본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 

안 그래도 요즘 이것 때문에 생각이 많다. 20대라는 지금 이 시간이 가장 소중한 것 같다. 지금 20대의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30대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또 달라질 거다. 지금의 선택들이 미래의 나를 좌우한다고 생각하면 소중하기도 하고, 반대로 좀 두렵기도 하다. 

 

포켓볼 선수로서 이우진의 장점은 무엇인가? 

포켓볼에 ‘점프샷'이라는 기술이 있는데, 이 기술은 남자 선수보다 잘할 수 있다. 공격할 때  포지션 수준도 좋다고 생각한다. 

 

포켓볼을 치면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무관심과 은근한 무시들. 포켓볼이 비인기 종목이다 보니 포켓볼에 대한 은근한 무시가 있다. 당구선수라고 소개하면 당연히 3쿠션 선수냐고 물어보고, 포켓볼을 친다고 하면 포켓볼 쳐서 먹고는 사냐, 여자들만 포켓볼 선수를 하냐 이런 소리를 듣는다. 우리나라에서는 3쿠션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특히 내가 아무리 잘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 포켓볼 팬도 별로 없다 보니 그게 좀 맥이 빠진다. 

 

앞으로의 목표는? 

나이대별로 어느 정도 정해 놓은 목표가 있다. 하지만 성격이 좀 변덕스러워서 계속 바뀐다. 일단 당장의 목표는 국내랭킹 1위를 변함없이 최소 1년은 유지하는 게 지금의 목표다. 

 

그렇다면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하고 세계 랭킹 5위를 벗어나지 않는 게 목표다. 

 

마지막으로 이우진을 아끼는 혹은 이제 막 이우진을 알게 된 팬들에게 한 마디 부탁한다.  

나를 좋아해 주시고, 관심 가져 줘서 너무 감사드린다. 포켓볼이 우리나라에서는 비인기 종목이지만, 포켓볼도 알고 보면 정말 매력적인 종목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원한 내 팬인 우리 엄마와 아빠, 항상 믿어주고 지지해 주셔서 감사하고 사랑한다. 

 

사진=이우성(675스튜디오)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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