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종황제 2. 가쓰라 자매

기록상 처음으로 당구를 친 사람은 순종과 고종

한국의 당구 기원이 1884년 9월 20일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처음 조선에 들어오면서 인천(당시 제물포)의 한 오두막 호텔에 설치된 당구대 위에서 새우잠을 잤던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

그 이후 당구는 개화기 외국 세력들의 각축장이 된 서울 중심의 외교구락부에 설치되어 각국 외교관들의 교류와 여가 이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다가 마침내 퇴위한 임금들의 여가 선용과 건강 유지를 위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들 순종이 1912년 3월에 일본에서 당구대 2대를 구입하여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설치하였고, 부친 고종은 이보다 1년 5개월 뒤인 1913년 8월에 덕수궁 덕홍전에 설치하였다.

이렇게 볼 때,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로 당구를 접한 사람은 순종과 고종이다. 고종의 당구 기량이 얼마쯤 되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순종의 당구 실력은 <순종국장록>의 기록에 따르면 60에서 70 내외라고 하였으므로 현재의 점수로 환산하면 150~200점대의 결코 낮은 점수가 아니었던 듯하다. 특히 순종은 전 창덕궁경찰서장 야노와 자주 겨루었고, 국내외 선수들을 불러 대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다음으로 기록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매일신보> 1915년 2월 17일 자에 보도된 십여 년의 표박생활, 당구명인, 조선말 못하는 조선사람 일본 이름 키노시타 초키치다. 그는 일본과 중국을 떠돌아다니면서 생활하는 중에 당구를 500점(지금의 1,000점 이상)이나 치게 되었고 귀국 후 순종을 알현하여 한판을 겨루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일본 이름 키노시타 초키치 외에 한국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무렵 궁중에 출입하면서 어용 당구대의 시설관리자 겸 순종의 당구교수를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전상운이 있다. 이 분을 직접 만난 현존 당구인은 없고 그에게서 당구를 배운 김효근을 통해서 그의 존재가 알려졌다. 김효근은 300점의 실력자로서 와세다대학 출신의 임정호가 1924년에 현 조흥은행 맞은편 광교통에 한국인 최초로 무궁헌 당구장을 세웠을 때 자주 출입하면서 이 당구장을 이따금 출입하던 윤치호, 유진오 두 분에게 애국지사들의 연락책을 맡아 했다가 종로경찰서에 잡혀가 2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보다 좀 앞선 사실로서는, 기미년(1919년) 독립선언서 낭독 사건으로 영업정지를 당한 명월관 인사동 분점으로 사용되기 전 이완용의 사저로 쓰이던 저택에 당구대가 놓였다는 기록이 있고, 이완용의 아들 이항구와 조카 한상용이 당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벼락이 정원의 고목을 때려 분질러 버렸다고 하였다. 이들은 고관대작의 아들과 조카로서 사저에 당구대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당구를 즐긴 당구 마니아로 기록되는 행운을 얻었다.

1925년경에는 서울 장안에 당구장이 속속 생기기 시작하였다. 주로 종로1, 2가를 중심으로 인사동, 낙원동 일대가 중심이었으며, 동아(2대), 중앙(4대), 테이라(1대) 당구장이 그것이다. 점차 상업당구장이 성행하게 됨에 따라 사각모의 대학생들과 포목상, 양복점, 요식업에 종사하는 호상들 그리고 일제하 작위 집안의 귀족 자제들이 출입하였다.

초기 보급단계에서 알려진 인물로는 음악가 홍난파로서 종로3가에서 바이올린 강습소를 하고 있던 홍난파 외에도 친조카인 안과의사 홍재유와 이비인후과 의사인 홍사유가 종로당구장에 자주 출입하던 당구가족으로 알려져 있다. 홍난파의 당구실력은 120점(현재의 300점대)으로 적수가 흔치 않았다고 하며, 큰조카 홍재유는 당구장에 살다시피 할 정도로 당구를 좋아해서 급한 환자가 있을 때는 당구장에서 간호원에 떠밀려 나갈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영화감독 안종화와 당대의 유명 영화배우 나운규도 당구를 즐겨 쳤다. 이들의 실력은 60점(현 200점대) 정도였다.

그리고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과 명월관 대표 이시우는 당구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당구 실력도 300점대(현 1,000점)로 뛰어났으며, 내기당구에 즐겨 참여하여 경기 후의 여흥까지 자주 책임졌다.
이상이 1930년대까지의 한국의 초창기 당구사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

 

3. 순종황제 4. 가쓰라 자매 5 . 가쓰라 자매

1930년대 일본 가쓰라 자매 묘기시범 계기로 한국 당구계 개화기 맞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일본의 유명 당구대 제작회사 스가누마는 한국의 판매망인 일승당구장을 통해 당구대 판매를 촉진시키기 위해 일본의 유명한 여자 선수인 가쓰라 자매를 한국에 보내 묘기시범을 실시하였다. 언니 가쓰라 마사코(1914년생, 당시 21세)와 노리코(18세)를 일본빌리어드협회 이사인 형부 고오바시가 데리고 현해탄을 건너 조선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가쓰라 집안은 일본에서는 당구명가로 알려져 있었고, 당시 두 자매는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일본 당구계를 주름잡고 있었다. 참고로 두 자매의 당구선수로써의 면모를 소개한다면, 언니 마사코는 훗날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관식에 초청했을 정도로 유명인이 됐으며, 그때 모인 각국 선수들과의 친선경기에서 당당히 우승함으로써 그 진가를 보여주었다. 1940년에는 1만점을 한 큐에 끝낸 최초의 기록 보유자가 되었고, 게임 소요시간도 2시간 40분으로 새로운 기록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일본 대표로서 세계 3쿠션 선수권대회를 3회나 쟁취한 바 있다.

동생 노리코도 실력면에서 언니와 전혀 우열을 논할 수 없는 맞수인데다 어린 귀여움에서 인기를 더 많이 받았다. 전일본 선수권대회를 여러 해 동안 차지했으며, 한국이 자랑하는 재일동포 당구왕 타카키(한국명 윤춘식)와도 1만점 게임 선수권을 번갈아가며 차지했을 정도다.
가쓰라 자매가 경성에 와서 가진 첫 번째 시범경기는 숙소였던 조선호텔로서 지금은 없어졌으나, 귀빈용으로 당구대 2대가 비치되어 있었다. 처음 마사코가 단큐에 1천 5백점을 친 다음 3쿠션 15점을 13큐에 쳤고, 이어 등장한 노리코가 역시 단 한 큐로 1천 5백점을 치고 3쿠션은 10큐에 15점을 끝내 장내를 잠탄시켰다.

이튿날은 종로2가 중앙당구장에서 장안의 고점자들이 배석한 가운데 묘기 중심으로 시범을 보였는데, 여기서도 두 자매는 1천 5백점과 3구식 3백점을 단번에 끝내 참관자들의 넋을 빼놓았다.
세 번째 시범은 일반 관중을 위해 을지로2가의 황금구락부에서 열렸는데, 이들의 재기를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로 전차길이 완전히 막혀 기마경찰들이 동원되어 정리하는 대소동을 벌였다.


가쓰라 자매가 서울을 다녀간 뒤로 일본의 고점자들이 속속 한국을 방문하였다. 일본의 당대 명수들인 아마다, 후지다 등이 이들로서 이를 계기로 한국의 당구계가 활기를 띠기 시작, 마침내 개화기를 맞게 되었다. 이후 태평양전쟁 발발 시까지 한국 당구가 안정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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