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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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어즈=김민영 기자] 축구선수를 꿈꿨던 한 소년이 우여곡절 끝에 당구선수가 되었다. 비록 아주 늦은 결실을 맺었으나 결국 어쨌든 스포츠 스타로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황봉주는 세계 랭킹 1위의 딕 야스퍼스와 대등한 실력으로 겨루며 자신의 실력을 증명했고, ‘실핀’ 하나로 잊혀지지 않을 강력한 캐릭터를 만들며 당구 팬들에게 확실한 눈도장을 찍었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란 걸 너무 잘 안다. 서른아홉 살의 늦은 대회 입상과 많은 관심이 쑥스럽지만 조용히 당구만 치겠다고 오늘도 다짐하는 황봉주를 <빌리어즈>가 만났다. 

 

일단, ‘호텔 인터불고 원주 월드 3쿠션 그랑프리’의 준우승을 축하한다. 

감사하다. 지금 이런 뜨거운 관심이 너무 어색하고 실감이 안 나지만, 응원해주신 많은 분께 정말 감사드린다. 

 

세계 랭킹 1위의 딕 야스퍼스와의 결승전을 스스로 평가해 보자면?

너무 못 쳤다. 예선은 조별 리그라 서로 다른 조여서 만날 일이 없었는데, 8강에서 처음 만났고 첫 대결에서는 내가 이겼다. 그래서였는지 야스퍼스 선수가 처음부터 견제를 많이 했다. 뭐 이렇게까지 견제하나 싶을 정도로 1세트는 아예 대놓고 견제를 했다. 세계 랭커들끼리 칠 때도 이렇게 초반부터 잡아가면서 치지 않는데 그날은 야스퍼스가 정말 엄청 견제를 하면서 경기를 했다. 게다가 야스퍼스의 공도 잘 섰다. 

반면에 나는 잡을 수 있는 기회도 못 살렸다. 어려운 중에도 분명 풀 수 있는 공이 있었는데 그 기회를 못 살렸다. 1세트 초반에 쉬운 공 하나를 놓쳤는데, 그때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그걸 편하게 치면서 끌고 나갔으면 상황이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긴 한다. 

 

그래도 8강에서 야스퍼스를 이겼다. ‘월드 그랑프리’는 전부 리그전으로 치러져서 어쨌든 세계 랭킹 1위든, 4대천왕이든 어려운 선수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했다. 이길 생각도, 어려운 게임이 될 거라는 생각도 안 했다. 상대가 얼마나 잘 치는지는 나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위축되기 때문에 최대한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게임에 임했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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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퍼스를 이겼을 때 기분은 어땠나?

특별히 야스퍼스라서 기뻤다기보다 그냥 ‘야스퍼스를 이겼네’ 이런 정도였다. 8강전 때 나는 쉬운 배치도 서고 득점도 잘 나온 반면에 야스퍼스는 경기가 완전히 꼬였다. 그게 보였다. 경기가 꼬이면 심리적으로 어려워지고 평소에 치던 대로 안되고 공을 어렵게 친다. 그러면 또 포지션도 원하는 대로 안 서고. 야스퍼스가 딱 그런 상황이었다. 

 

‘월드 그랑프리’에 출전하면서 세운 목표는?

16강까지만 가자. 1차 예선 통과가 목표였다. 이렇게까지 성적이 날 줄 예상도 못 했다. 

 

‘월드 그랑프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누구와의 경기인가?

32강 예선전 마지막 경기에서 니코스 폴리크로노폴로스를 무조건 2-0으로 이겨야 16강에 올라갈 수 있었다. 1세트를 니코스 선수에게 2점 지고 있던 상황에서 내가 2점을 쳐서 동점을 만들고 어려운 공을 성공시켜서 역전으로 1세트를 따냈다. 2세트도 1점을 지고 있었는데 시간도 거의 다 지나가고 마지막에 2점을 치고 또 역전으로 2세트까지 잡았다. 그 시합이 준우승까지 할 수 있었던 발판을 만들어 준 것 같다. 

 

첫 대회 입상이 세계대회 준우승이다. 우승을 놓쳐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을 것 같은데. 

우승을 놓친 것보다 너무 못 쳐서 이것보다는 잘 칠 수 있는데 하는 마음이 컸다. 결승에서 이번 대회 중 처음으로 압박을 받았던 것 같다. 잘 쳐야 한다는 압박이 아니라 책임감 같은 거였다. 누가 주는 압박이 아니라 나 혼자 스스로한테 책임감을 부여했던 것 같다. 한국 선수를 대표하는 기분이었고, 그런 게 압박으로 느껴졌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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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상대가 세계 랭킹 1위 야스퍼스 아닌가, 져도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할 수 없었나?

그전에는 그런 마음이었다. 2-3위전을 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마음이었다. 결승전도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결승전에서는 그게 잘 안됐다. 평소에 스스로 멘탈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중요한 순간에 멘탈 관리를 못 했다. 결승전 1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아무 생각도 안 들었는데, ‘땡’ 시작하자마자 이상하게 그렇게 되더라. 그러니까 풀 수 있는 공도 못 치고, 기회도 놓치고. 

 

그런 순간에는 어떻게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하나?

최대한 잊는 방법 밖에 없다. 어떤 실수를 했는지, 어떻게 공을 쳤는지 다 잊고 기분 좋은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번 대회에서는 그다음부터 기회가 별로 없었다. 1세트는 거의 기회가 없었고, 2세트는 내가 못 쳤다. 1세트의 내 모습을 보고 야스퍼스도 풀렸는지 2세트는 같이 못 쳤다. 

 

당구선수가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특별한 계기라기보다 당구가 재밌어서 치다보니 처음에는 너무 빨리 늘어서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웃음) 원래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1 때까지. 갑자기 가세가 기울었는데, 모른 척하고 계속 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무작정 집에 보탬이 되려면 돈을 벌어야 된다는 생각에 미용 일을 시작했다. 공익으로 군대 가기 전까지 부산에서 미용 일을 했다. 아마 당구를 안 쳤더라면, 제대 후 미용 일을 계속 했을 거다. 

우연히 간 집 앞 당구장에서 잘 치는 형들을 만나서 시스템도 배우고, 대대도 알게 되고 그러다 보니 당구가 너무 재밌었다. 16점 놓고 대대를 시작해서 6개월 만에 27점이 됐고, 30점이 되자 25살에 선수 등록을 했다. 그때 마침 부산에 최성원, 황형범 선수가 있었기 때문에 보면서 꿈을 키웠다. 

 

늦게 당구선수가 된 편이다. 

많이 늦은 나이였다. 처음 선수 등록할 때 전국대회 8강이 목표였는데, 매번 16강에서 탈락했다. 그러면서 방황도 하고 당구를 한 5년 이상 쉬었던 거 같다. 그러다 4년 전에 다시 시작했다. 

 

월드 그랑프리 결승전 후에 울어서 우승자인 딕 야스퍼스보다 회자가 많이 됐다. 

3세트 시작하자마자 감정이 올라와서 시합하는 25분 동안 참은 거다. 시합인데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계획은 일단 끝나자마자 빨리 정리하고 화장실을 가려고 했다. 안 터질 상황이 아니었다. 그 정도로 감정이 복받쳐 있었다. 근데 앉아서 큐를 다 접고 나가려고 하는데 허정한 형이 쓱 지나가면서 “수고했어” 이러니까 갑자기 확 올라왔다. 정한이 형이 “괜찮다, 너 잘했다” 이러니까 더 미안했다. 내가 너무 못 쳐서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누구한테 왜 미안했나?

전부 다. 나를 응원하고 기대해준 사람들한테도 미안했고, 나 스스로 한국을 대표해서 그 자리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더 잘하지 못해서 다른 선수들에게도 미안했다. 2-3위전을 할 때 몸 상태가 너무 좋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결승전은 그 무게가 또 달랐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김준태와의 2-3위전도 무척 치열했다. 연장전까지 갔다. 

이번 경기는 확실히 초구를 잡는 사람이 유리했다. 준태가 워낙 초구 연습이 잘되어 있어서 준태한테 유리했는데, 2등 어드밴티지로 내가 초구를 가져갔다. 그 덕에 이길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장전에서는 초구를 친 사람이 5점 정도 치고 수비를 하면 시간이 너무 짧아서 어떻게 해볼 도리가 별로 없다. 

 

지금 당구선수들이 기존의 연맹과 프로당구협회(PBA)로 나뉘어 있다. 솔직히 PBA는 계속 우승 상금 1억짜리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적에 대해 생각을 해보진 않았나?

당구선수의 꿈을 갖기 시작하면서 목표가 세계 선수들과 경쟁하는 거였다. 만약 선수 중에 절반이라도 갔으면 나도 갔을 거다. 하지만 내가 경쟁하고 싶은 선수들이 여기에 다 있으니까 굳이 이적에 대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돈도 중요하다. PBA로 갔으면 기회가 더 많았을 테고, 상금도 더 많이 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우선순위는 아니니까. 지금도 많지는 않지만 먹고 살 만큼 버니까 그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당구를 치면서 고마운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이 마음을 표현할 기회다. 

지금 일하고 있는 BOB당구클럽 사장님. 당구장 업주가 플레이어를 이렇게 장기간 쓰기가 쉽지 않다. 그것도 일도 안 하고 게임만 치는 플레이어한테 3년 6개월 동안 많든 적든 꾸준히 월급 주고 쓴다는 거 자체가 쉽지 않을 건데, 너무 고맙다. 

그리고 유일한 후원사인 (주)한밭의 권오철 대표님과 권혁준 팀장님 이하 한밭 식구들께도 꼭 감사 인사 전하고 싶다. 이번에 대회를 개최하고 후원해준 파이브앤식스와 호텔인터불고 회장님과 직원분들, 빌리어즈TV 관계자분들께도 감사드린다. 그분들 덕에 선수들이 시합을 잘 할 수 있었다. 뒤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없다면 이렇게 좋은 경기를 할 수가 없다. 

 

당구선수로서 앞으로의 목표는?

할 수 있는 순간까지 경쟁하고 싶다. 몸 관리 잘해서 오래 선수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겠다. 1등이나 우승을 목표로 하지 않고 더 잘 치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가 되고 싶다. 아마 야스퍼스처럼 치는 날이 와도 더 잘 치고 싶어질 것 같다. 

 

황봉주 선수를 응원하는 팬들에게도 한마디 부탁한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데, 응원해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더 나은 모습 보여줄 수 있는 선수가 되겠다. 그리고 야스퍼스 선수에게도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우승 축하를 못 해줘서 내내 마음에 걸린다. 너무 미안하다고 꼭 말하고 싶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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