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 최초 유럽 당구리그서 활약한 '선수위원장' 강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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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 최초 유럽 당구리그서 활약한 '선수위원장' 강자인
  • 김민영 기자
  • 승인 2021.02.03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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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당구선수 최초로 독일과 네덜란드 리그 진출
2부 리그 팀을 1부 리그로 승격 시키는 등 유럽에서도 맹활약
한국 돌아와 강인원에서 강자인으로 개명 후 활발한 활동 이어가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빌리어즈=김민영 기자] 강자인이라는 이름이 생소할 수도 있겠다. 오히려 강인원이라는 이름으로 맹위를 떨치던 때가 있었으니. 한참 잘 나가던 시절 불현듯 유럽리그 진출을 선언하며 독일로 떠났던 그의 소식을 듣기에 한국과 독일의 거리는 무척 멀었다. 그저 한국 대표 선수로 그가 그곳에서 잘해주고 있길 멀리서나마 응원하는 게 전부였다.

한국 선수 중 처음으로 유럽 당구리그에서 뛰면서 2부 리그의 팀을 1부까지 끌어 올리며 커리어를 쌓아가던 그가 돌연 5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강인원’이 아닌 ‘강자인’으로 당구팬들 앞에 섰다. 당구선수와 선수위원장, 두 가지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당구선수 강자인을 빌리어즈가 만났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한국에 돌아온지는 꽤 된거 같은데, 대회장에서 얼굴을 볼수 있었던건 얼마 안된 것 같다.

2010년에 독일에 갔다가 한국에 다시 돌아온 건 2015년 5월이었다. 돌아와서 한 2년 선수로서 제대로 활동을 못하다가 2017년 청주월드컵 때부터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예전 ‘강인원’ 선수를 기억하는 팬들이 많은데, ‘강자인’이라는 새로운 이름때문에 더 낯설게 느껴졌던 건 아닐까? 왜 이름을 바꾸고 ‘강자인’으로 돌아왔는지 궁금해 하는 팬들이 많다.

새로운 출발을 하려고 이름을 바꾼 건 아니었다. 우연히 ‘강인원’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면 몸이 많이 아프다는 말을 들었다. 생각해 보니 ‘강인원’으로 이름이 좀 알려졌을 때 이유없이 아팠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아서 그동안 쌓아둔 커리어도 중요하지만 건강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바꾸게 됐다. 지금은 새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든다. 오히려 이름을 바꾸고 나니 새롭게 새출발하는 기분이라 각오도 남다르다.

 

최근에는 ‘당구선수 강자인’보다 ‘선수위원장 강자인’으로 언론에 더 많이 언론에 노출됐다. 이렇게 활발하게 선수들이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직접 전달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대한당구연맹에서 하는 대부분의 일이 선수의 자격과 권리, 의무 등 선수와 관련된 일인데 정작 주인공인 선수는 모든 의사결정에 배제되어 있고, 선수들의 의사와 무관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선수들이 하나가 되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중심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마침 선수위원장을 맡은 내가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선수위원장을 비롯해서 선수위원 전원이 해촉까지 당했다. 뜻하지 않게 어려운 시간을 지나왔는데, 선수위원장으로서 당구선수들이나 연맹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행히도 재판부에서 부당해촉이라는 판결을 받아 직위를 복권했다. 당구선수들 스스로 ‘나는 선수니까 뭐를 해주세요’라고 생각하기 보다 내가 당구선수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당구선수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당구연맹이나 협회 등이 당구선수들이 당구만으로도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역할을 잘 해주었으면 좋겠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당구선수의 꿈은 언제부터 꿨나?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학생들이 합법적으로 당구를 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어른들만 칠 수 있는 당구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호기심에 당구를 접하게 됐는데, 당구장에 걸려 있던 정복을 입고 당구를 치는 당구선수들의 사진을 보고 나도 저렇게 당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그러다 당구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서울에 있는 양귀문당구아카데미에서 고 양귀문 선생님께 당구를 배우게 됐다. 그러면서 실력이 빠르게 늘었고, 당구선수의 길을 따라 가게 되었다.  

 

당구선수를 꿈꾸면서 목표가 생겼을 것 같은데? 

그 당시 세계 당구선수들의 비디오 테이프를 보게 됐는데, 토브욘 블롬달, 레이몽드 클루망 같은 유명 선수들의 플레이하는 모습에 완전히 매료됐다. 나도 저들처럼 세계를 재패하는 당구선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됐다. 이 꿈은 아직도 못 이룬 꿈이기에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볼 생각이다.  

 

당구선수로 데뷔한 건 몇살때였나? 

1992년, 18살때였다. 그때는 지금처럼 당구연맹이 선수들을 위한 단체가 아니였다. 당시에는 재경당구선수회라는 단체가 선수 단체를 대신하고 있어서 거기에서 당구선수로 첫 발을 내디뎠다.  

 

1992년에 선수로 데뷔해 2010년 유럽 리그 진출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유럽 리그에서 뛴 최초의 한국 선수이기도 하다. 어떻게 유럽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부터 당구가 스포츠로 확실히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아시안게임에 종목으로 채택되면서 국가대표도 생겼고, 비록 국가대표는 못 됐지만 국가대표 선수들과 겨뤄서 전국대회 우승도 여러차례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방송 대회를 통해 사람들에게 당구선수로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몇몇 탑 랭커들을 제외하고는 후원을 받기도 힘든 현실에 당구에만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김경률 선수와 독일에서 당구선수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었던 박우진 박사의 도움으로 유럽 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럽에 당구 리그가 있는 줄도 몰랐고, 어떻게 갈 수 있는지도 잘 몰랐던 때다.  

우리한테는 유럽 당구리그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축구나 농구, 배구 같은 인기스포츠와 마찬가지로 생활체육 중 하나로 하위 리그부터 상위 리그까지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최근 대한당구연맹에서 시작한 디비전이 그런 시스템을 도입한 거다. 가장 하위 단위의 지역별 클럽끼리 대결해서 승격제로 점점 상위 리그로 올라오는 시스템이다.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는 꿈을 꾸는 동시에 유럽에 당구 리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 리그에서 나도 뛰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10년 동안 그 꿈을 실현할 방법을 찾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는데, 기회가 안됐다.

그러던 중 당시에 월드컵과 국제 대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김경률 선수가 내 꿈을 알고 있었기에 유럽 선수들과 관계자들에게 다리를 놔주고 무명의 한국 선수를 유럽 리그에서 뛸 수 있게 스카웃하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유럽 리그에서의 성적은 어땠나? 

나는 독일 리그와 네덜란드 리그, 두 나라의 리그에서 뛰었다. 양쪽다 2부 리그부터 뛰었는데, 두 팀 다 90%의 승률을 가지고 1부 리그로 승격됐다.  

 

유럽 리그에는 어떤 선수들이 속해 있었나? 

프레데릭 쿠드롱, 토브욘 블롬달, 딕 야스퍼스 등등 유럽의 유명한 선수들은 모두 리그에서 뛴다고 보면 된다. 내가 갔던 2010년만 해도 각 나라 리그마다 2명의 외국인 용병이 있었다. 4명의 선수가 함께 시합을 하는데, 그 중 독일만 유일하게 외국인 선수를 대회에 1명만 기용할 수 있었다.

내가 독일로 오고 얼마 되지 않아 김행직 선수도 유럽 리그에 도전했는데, 김행직 선수는 독일 1부 리그에서 블롬달과 같은 팀에 있었다. 한 팀에 블롬달과 김행직 두 명의 외국 선수가 있다보니 블롬달 선수가 뛰면 김행직 선수가 못 뛰고, 또 김행직을 뛰게 하려고 블롬달 선수가 양보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우리팀은 외국인 선수가 나 혼자라서 주전 경쟁 없이 1번 선수를 계속할 수 있었다. 

독일 리그 같은 경우 1부 리그에 10팀이 있기 때문에 외국인 선수가 10명 밖에 뛸 수가 없다. 유럽에 잘 치는 선수들이 많아서 그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유럽 리그에서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어느 정도 돈을 받고 시합을 하기로 약속을 받고 갔음에도 그 돈으로 충분한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절약에 절약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배워야 해서 꾸준히 독일어 학원을 다녔는데, 독일어 공부에 시간을 많이 투자해야 해서 연습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5년 동안 유럽 리그에서 얻은 것과 또 그로 인해 잃은 것은 무엇인가? 

독일에 있는 동안 최극단의 상태까지 갔다. 덕분에 이제 조금 어려운 일이 와도 면역이 생긴 것 같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충분히 극복하고 내가 좋아하는 당구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이 생겼다. 톱 랭커 선수들의 실력 뿐 아니라 유럽 리그에서의 특별한 상황 때문에 한국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초집중력을 키울 수 있었다.

지금은 블롬달이나 야스퍼스 선수를 이기는 일이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흔하지 않았다. 같이 시합을 할 기회조차 없었다. 유럽 리그에서 뛴 덕분에 블롬달과 야스퍼스를 이기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에디 멕스에게 6이닝에 50점을 맞으며 세계 신기록을 작성하게 만든 상대 선수로서의 악명도 오랜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사진=이우성 /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5년 만에 한국에 돌아올 결심을 하게된 이유는 뭔가? 

김경률 선수를 2014년 4월에 포르토 월드컵에서 만났는데, 그때 ‘형님 이제 그만 한국 오이소, 내가 후원할테니 같이 당구만 치면서 삽시다’ 그러더라. 그의 말에 결심이 섰다. 더이상 팀과 후원사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던 중 경률이 사고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됐다.

이미 한국에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획대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유럽 당구리그에서 겪은 유럽의 당구를 전파하기 위해 아카데미를 만들었는데, 그걸 운영하느라 오히려 선수로서는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됐다. 그러다 2017년 청주 월드컵 때부터 다시 당구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월드컵이라는 무대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나 쉽게 점령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실력이나 대회에 나가는 비용, 또 시간 등등 어렵게 월드컵을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랭킹 포인트를 모두 채워서 드디어 월드컵을 풀타임으로 뛸 수 있는 선수가 됐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해 월드컵이 모두 취소되서 월드컵을 못 나가 너무 안타깝다.  

 

월드컵 뿐 아니라 2020년에는 당구대회 자체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파이브앤식스와 MBC스포츠플러스가 ‘코리아 당구 그랑프리’라는 대회를 만들어줘서 당구선수들이 미디어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이 너무 감사하다. 대회에 출전하는 그 시간이 너무 행복하다.  

 

당구선수로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처음에 당구를 배울 때는 당구선수가 되는 게 목표였는데, 당구선수가 된 후에는 세계 챔피언이 되고 싶었다. 지금은 세계 챔피언이 못 된다 해도 이 즐겁고 행복한 당구를 건강하게 계속 할 수 있을 때까지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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