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률을 마지막으로 보내던 날

지난 4월 11일 토요일은 김경률 선수를 보내는 마지막 49재가 있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와 경기도 구리에 있는 보현사로 차를 몰았다. 날씨가 풀려 따듯했다. 모처럼 다가온 주말의 봄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도로를 가득 메워 외곽순환고속도로는 많이 막혔다.
극심한 정체 속에서 차창 너머로 보이는 가족들, 연인과 주말을 보내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웃음이 가득 담긴 즐거운 얼굴들. 덧없다, 참. 사람 사는 것이란. 지금 이 순간 사랑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저 사람들처럼 즐겁게. 
불교식 제사를 지낸 김경률 선수는 이날 49재를 마지막으로 이제 영원히 보내줘야 한다. 불교에서는 죽은 지 49일째 되는 날 염라대왕의 마지막 심판을 받는다고 믿는다. 여승이 말했다. 그날의 심판에 따라 망인의 다음 생이 결정되기 때문에 남은 후손들은 망인이 이승의 굴레에서 벗어나 좋은 곳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스럽게 마지막 제사를 올려야 한다고 했다.
모든 중생은 육도(천상, 인간, 축생, 아수라, 아귀, 지옥도)의 여섯 세계를 윤회하는데, 49재를 치러 망인이 삼악도(지옥도, 아귀, 축생)에 들어가지 않도록 기도하는 마지막 제사를 49재라고 한단다. 두 시간 넘게 김경률 선수의 가족과 친구, 동료 선수들이 그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입었던 선수복, 신발, 큐, 큐가방, 그리고 영정 사진까지 모두 태워 세상에 남은 미련을 모두 지워 주었다. 화구 앞에 놓인 그가 입었던 옷, 선수복, 신발 등을 바라보며 가족과 친지들은 목놓아 울었다. 여승은 그런 가족들을 만류했다. 가족들이 지금 울면 망인이 속세에 미련이 남는다고 말이다.
화부 한 사람을 남겨 놓고 모두 자리를 옮겼다. 잠시 후 그의 흔적은 한 줌의 재로 남았다. 지금도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이제는 그를 보내줘야 하는가 보다. 남아 있는 우리가 김경률 선수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그저 슬피 우는 것 말고 또 무엇이 있을까?
49재가 열리던 날 동료 선수들 몇 명이 그를 추모하는 작은 행사를 열기도 했다. 얼마 전에 누군가는 그를 위한 추모 대회를 개최하는 데 억대의 후원금을 내놓겠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들 김경률 선수를 이렇게 보내는 것이 못내 미안하고 아쉬운 듯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에게 해준 게 별로 없다. 몇 년 전에 촬영을 마치고 “행님, 이 옷 좋네예” 하던 그에게 셔츠를 선물한 적이 있다. 거절해도 한사코 셔츠값을 주겠다던 그에게 선물이라고 윽박지르듯이 얘기했더니 “고맙습니데이, 잘 입을께예”라고 말하고 눈웃음치며 김경률 선수 특유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월드컵에서 우승하기 몇 달 전에 그는 “내가 가진 당구 기술을 책으로 만드는 것도 생각해 보시죠, 행님. 일단 세계 대회 우승 먼저 하고예.”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초구부터 15점 하이런을 치는 방법'과 '김경률 원포인트 레슨' 같은 기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나중에 사업이 더 잘되고 서로 시간이 많이 나면 자주 만나서 책을 만들어 보자고 했다. 이런 일이 아니었더라면 내년, 내후년에는 그의 책을 만드는 작업을 했을 것이다.  
1년 전 즈음에 충북 오창에 있는 조오복 선수와 형수를 보러 김경률 선수와 같이 간 적이 있었다. 차 안에서 얘기를 나누다가 자기 사이트가 없다며 하나 만들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김경률 선수가 처음 선수생활을 하던 시기부터 그 많은 자료를 취합하는 것이 일이긴 하지만, 홈페이지 하나 만드는 것이 뭐 어렵겠나 싶어서 대뜸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1년이 다 되도록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자료를 취합하다가 멈추었던 그의 사이트 제작은 유족들의 동의를 구해 얼마 전 다시 작업하기 시작했다.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렇게나마 그를 세상에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빌리어즈 김주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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