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발발까지 한국의 당구 안정적으로 발전
초창기 한국의 당구 고점자들로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와세다 대학 출신의 인텔리 임정호가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무궁헌당구장’을 개업했던 1924년 무렵에는, 궁중에 출입하며 순종의 당구대 관리와 개인지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전상운의 제자로 알려진 김효근이 300점(현재의 1,000점), 명월관 대표 이시우가 300점을 쳤다.
그보다 한참 이전인 1915년에는 ‘키노시타 초키치’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조선말 못하는 조선 사람’이 500점(지금의 1,500점 이상)을 친 것으로 기록에 나온다.
1930년대 초엽에는 서울시내에 한국인이 경영하는 당구장이 여러 군데 생겼는데 ‘반도구락부’, ‘홍등’, ‘자연장’, ‘대경’당구장이 그것이었고, 일본인 경영의 당구장을 합하면 20여 개소가 되었다.
이 무렵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 고점자로는 후쿠도쿠 무진회사 사원인 다카키로 5백점대의 최고점을 쳤으며, 하라 변호사가 300점을 쳐 쌍벽을 이루었다. 이들은 명동2가 유네스코 자리에 있던 ‘동지구락부’에 출입하였는데 그들이 큐를 잡으면 사람들이 게임을 중단한 채 관전하였다고 한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당구장 중 ‘일승정’과 ‘어성’은 한국 내에서 당구용품을 판매하기 위한 창구로서, 이곳 사원 출신으로 박수복이 있었다. 그는 초창기 한국 당구계에 이름을 남긴 분이다. 당시 한국사람이 경영하는 당구장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당구장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당구장은 거의가 목조건물로 마루바닥이었으나 한국 당구장은 구두를 신은 채 출입하였고, 일본 당구장은 실내화로 갈아신고 게임을 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당구장은 게임 카운터로 미동(美童)을 고용한 데 반해 한국 당구장은 16~18세의 여자 계산원을 둬 당구장 분위기를 한층 부드럽게 했다. 양가락 머리에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여기다 버선발 고무신 차림은 당구장 고객에게 호감을 주었다.
당시의 당구장 요금 지불 방식은 시계가 필요 없는 게임당 공동지불 방식이었다. 4인 이내일 경우 7큐 내에 자기 점수를 완전히 쳤을 때 승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나머지가 모두 똑같이 게임료를 냈다.
5명 이상일 경우는 역시 7큐 내에 자기 점수를 치되 80%만 치면 완전히 자기 점수를 소화한 것으로 간주했다. 이때도 승자 한 사람만 게임료를 물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등수에 관계없이 규정된 게임료를 물었다. 지금의 게임료 지불 방식인 꼴지 한 사람에게 부담시키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에는 일본의 가쓰라 가(家)의 마사코, 노리코 두 자매가 서울에 와서 당구 시범을 보인 것이 화제가 되고, 이후 일본 고점자들인 아마다, 후지다 등 당대의 고수들이 서울을 찾아옴으로써 태평양전쟁 초기까지 당구는 크게 확산되고 안정적으로 발전하였다.
그즈음의 당구인으로 거명되는 사람으로는 미스코시백화점의 간부 사원이었던 방용하가 첫 손가락에 꼽힌다. 그의 당구 실력은 3백점(지금의 1천점)으로 특히 세리 기법에 탁월하였다. 그는 특히 일본 최고점자인 무진회사 사원 다카키와 하라 변호사와 겨룰 수 있는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종로2가 YMCA 맞은편에 있던 중앙당구장이 그의 무대였으며 퇴근 후에는 늘 들러 당구를 치며 후배들에게 당구기술을 전수하였다.
이 밖에 박수복(일승정구락부 사원), 권재덕(한전 운전기사), 조정일(가방전문상), 배상아(배제고보 교사), 이택(양복점 경영), 이규황(화가), 박용준(서울연와사장), 홍사철, 지윤옥 등이 고점자들로 이름을 떨쳤고, 지방당구인으로는 대구의 최운영, 인천의 조성철 등이 300점대의 정상급이었다.
이 중 지윤옥은 17세의 나이에 서린동에서 홍등당구장을 운영하며 당구계에 첫 발을 내딛었고 다시 화신백화점 옆 동아당구장으로 이사하여 장안 고점자들의 단골무대가 되게 했다. 그는 당구장을 경영한 덕분에 고점자들에게서 당구를 배웠고 특히 일본인 최고봉인 아마다와 후지다에게서 체계적으로 당구기량을 전수받았다. 그는 마세 기술이 뛰어났으며, 전국 대도시에 순회 시범을 자주 나가 당구의 지방 확산에 공헌하였다.
이규황은 메이지대 출신의 미술 청년으로서 그의 직업보다는 당구에 더 매료되어 당구 기량이 출중하였다. 조동성은 그의 첫 번째 당구 스승이 이 분이라고 술회한 바 있다.
조동성도 이무렵에 당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37년 중학교 1년 때 무역상을 하는 부친을 따라 당구장에 갔다가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일평생 당구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후 5년이 지나 중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무렵에는 1백점대(현 3백점) 중상급의 실력이 되었고, 혜화전문 문학부에 입학하여서는 최기창을 만나 대학별 당구대항전에 콤비를 이루며 더욱 기량이 향상되어 2학년 때는 3백점(현 1천점)의 실력자가 된다.
그리고 혜화전문 2학년 겨울 방학 때는 일본 도쿄에 가서 일본 당구계를 접하고, 특히 그가 실력 향상에 한계를 느끼고 그것을 돌파하기 위해 고민하던 중 3쿠션 시스템 책자를 구입하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일본의 3쿠션 당구법의 최고봉인 마쓰야마 긴레이가 쓴 당구교본으로서 이 책자에 의해 조동성은 비로소 체계적인 당구 시스템을 익혀 당구 기량이 급격히 향상되었으며, 해방 후 이 책자를 번역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2차대전 종전과 광복을 맞은 한국당구계
제2차 세계대전은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습함으로써 시작되어 1945년 8월 15일까지 3년 9개월간에 걸쳐 치렀던 악몽의 전쟁이었으나 한국에게는 광복을 가져다준 뜻깊은 전쟁이었다.
전쟁 기간에는 국가동원령이 내려져 모든 경제생활이 긴축체제에 돌입하였다. 따라서 유락시설은 동면상태에 들어갔지만 그래도 당구장은 다행히 폐쇄를 면하고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자연히 당구장수가 줄어들게 해 서울시내에는 30여 곳이 명맥을 유지했다. 이런 중에 당구인들은 해외로 빠져 나가거나 징병되어 군대로 끌려갔다.
이 시기에는 당구장 요금체계도 종전의 1등을 제외한 공동부담의 방식에서 시간제 계산 방식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그대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이 시간제 요금 방식은 당구 본연의 신사도 내지는 스포츠맨십을 외면케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이후 당구장이 사교장이 아닌 유흥장으로, 당구가 스포츠가 아닌 유기(遊技)로 전락된 것도 바로 이 시간제 요금 방식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자 당구인들도 속속 귀국하였다. 만주 봉천에서 일하던 박수복, 일본 국가대표와 만주국 부의 황제의 개인 당구 선생을 지낸 최용, 상해에서는 김창섭, 김정환이 돌아왔다. 조동성도 강제징병에서 귀국했다.
해방을 맞은 서울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당구장이 적산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헐값에 나왔지만, 진정한 당구인은 이마저도 돈이 없어 인수할 수 없었고 오히려 장사 잇속에 밝은 장사꾼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미군의 진주로 양풍이 불어 당구장은 다방, 술집, 댄스교습소로 잠식되어 오히려 진고개(명동)와 종로통의 일류 당구장들이 속속 문을 닫아 그 숫자가 줄어들었다.
해방 직후 서울시내 당구장으로서 가장 각광받은 곳은 국민은행 뒤에 있던 ‘낭화헌’이다. 원래는 일본인이 경영하던 곳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고점자들의 단골처가 되었다.
여기에 모인 면면을 보면 국내 최고의 고점자(5백점)로 동화백화점 지배인 방용하를 비롯해 박수복, 혜화전문 출신의 조동성과 최기창, 그리고 김명호, 장수복, 휘문고 야구코치 이한종, 해외에서 귀국한 김창섭, 김정환, 최용 등 당대의 정상 당구인들이었다.
그런데 해방 후 당구인들에게 당장 닥친 현실적인 어려운 문제는 당구재료난이었다. 그때까지의 당구재료는 모두 일본제였다. 해방과 동시에 수입선이 끊기자 일체의 재료가 동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나온 것이 대용품이다.
라사는 미제 담요를 재봉틀로 박아서 대신했고, 팁은 군화의 바닥창을 오려 사용했으며, 초크는 백묵으로 대신했다. 그리고 큐는 군용 야전 들것의 침목을 깎아 사용하였다. 그러나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한 것이 당구공이었다. 곰보 투성이가 되어 구르는 소리가 달구지 소리처럼 들릴 때가지 계속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재료난은 한동안이 지나 미군 PX를 통한 새 수입 통로가 열리면서 완전히 해소되었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