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3쿠션 사상 최초로 세계선수권대회 동메달을 딴 이신영

ⓒ LEE WOO SUNG
12 대 20. 히다 오리에는 준결승까지 단 5점만을 남겨 놓았다. 애버리지 2.000대를 치며 이신영을 꼼짝달싹 못 하게 끝까지 묶어 놓고는 승리를 굳히는 듯했다. 여자 3쿠션에서 전무후무한 애버리지가 나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초반부터 히다의 페이스에 기가 눌린 이신영은 좀처럼 점수 차를 좁히지 못했다. 
 
이신영도 1.200대 애버리지를 치고 있었으니 컨디션은 나쁘지 않았는데 히다가 너무 앞서갔다.  그런데 잠시 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스포츠에서만 볼 수 있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졌다.
 
2014 세계여자3쿠션선수권대회 8강전은 여자 3쿠션 사상 최고의 승부였다. 
 
좋게 평가해주니 감사하다. 나도 초반에 7이닝에 7점을 치고 있었는데 히다는 15점을 쳤다. 2.000이 넘는 애버리지였다. 애버리지 1.000대를 치면서 선전하고 있는데 점수가 두배 이상 차이가 났다. 정말 미치겠더라. 7 대 10에서 히다가 5점을 치고 브레이크 타임이 걸렸다. 밖에 나와서 먼산을 쳐다보면서 하늘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막 눈물이 났다. 꼭 이기고 싶은데, 이겨야 하는데 마음대로 안 되니깐….  
 
꼭 이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었나.
 
구리시당구연맹 임장영 회장님과 같이 터키에 갔었다. 임 회장님이 시합마다 지켜봐 주면서 경기 운영에 관한 조언을 많이 해주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있었다. “우리에겐 메달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말이다.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기도 하고.
 
그 말이 시합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이번 시합에서 정말 힘든 순간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임 회장님이 해준 말이 떠올라서 상황이 어떠하든, 무조건 이기려고 했다. 이기기 위해서 테이블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 얼마나 다그쳤는지….  
 
무슨 일이 있었나.
 
예선 리그 대진이 최악이었다. 디펜딩 챔피언 히가시우치 나츠미와 개최국 터키 챔피언 굴센 데게너와 같은 조였다. 최소 2승 1패는 거둬야 본선에 갈 수 있는데, 난 시합 전날 저녁에 현지에 도착했다. 연습시간에 정말 딱 맞춰서 도착했다. 보통 다른 선수들은 미리 하루 전에는 와서 컨디션 조절을 하는데 난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연습장에 들어가야 했고, 시차 적응이 안 되어서 밤에는 잠도 못 잤다.
 
이신영 선수가 예선전에서 힘들어 보여서 컨디션이 안 좋은 거라고만 생각했다.
 
난 목표를 갖고 터키까지 갔는데 상황이 이러니 답답했다. 첫 경기 상대가 굴센 데게너였다. 이 선수가 내가 컨디션이 조금 난조를 보이니깐 아주 시원하게 내질렀다. 브레이크타임까지 3 대 16인가 그랬다. 그런데 그 경기를 지면 딱 떨어지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메달을 따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여기까지 와서 주저 앉을 순 없었다. 애버리지고 뭐고 간에 끈덕지게 플레이했고, 결국 25 대 21로 역전해서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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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경기 상대가 디펜딩 챔피언이었다.
 
1시간 뒤에 히가시우치 나츠미랑 경기를 해야 했다. 둘 다 1승씩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에 본선 진출의 분수령이 되는 경기였다. 첫 경기 애버리지가 좋지 않아서 히가시우치를 이겨야 조 1위로 본선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래야 메달권에 안정적으로 진입할 듯했다. 그런데 아쉽게 비겼고 애버리지 때문에 조 2위 시드를 받았다.  
 
본선 8강전에서 엄청난 저력이 터져나왔는데, 무엇이 원동력이 되었나.
 
임 회장님 말대로 나는 메달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더 간절했다. 상대방보다 더 간절하게 이기고 싶다는, 아니 꼭 이겨야 한다는 그 다짐이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후반까지 12 대 20으로 지고 있었다. 히다는 5점, 나는 13점을 더 쳐야 했다. 그런데 기적같이 나는 7이닝 동안 13점을 쳤다.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그 간절함이라는 단어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다.
 
이번 대회 초반부터 모든 경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더 간절했나.
 
사실 당구선수가 된 것도 내가 너무나 당구 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이겨야 한다는 부담도 없었고, 성적이 나지 않아도 메달을 따지 않아도 큐만 잡을 수 있으면 좋았다. 그런데 선수 생활을 하다보니 그 간절함이라는 게 생겼다. 선수는 스스로 이루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당구선수가 되었나.
 
당구선수가 되려고 했을 때 주위에서 참 많이 말렸다. 2009년이었나? 아, 선 수등록을 2011년에 했으니, 그때가 맞는 것 같다. 불과 몇 년 전이었는데, 적지도 않은 나이에 당구선수가 되려고 했더니 가능성이 없어 보였을 거다. 부모님조차도 설득하지 못했으니 남들이 보는 시각이 다르지 않았을 거고.  
 
그래도 이신영 선수는 몇 년 동안 많은 것을 이뤘다. 당장 한국 랭킹 1위이고.
 
내가 보기보다 승부욕이 강해서 꽂히면 끝까지 가는 성격이다. 그게 당구였다. 무작정 나는 당구선수가 되겠다고 선언하다시피 하고는 큐 한 자루 짊어지고 내 인생을 바꿨다. 그리고 3쿠션을 치기 시작했다.
 
ⓒ LEE WOO SUNG
무엇이 당신에게 당구를 치게 만든 것인가.
 
난 원래 그림을 그렸다. 서양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는데, 당구를 만나면서 그 목표가 달라졌다. 너무 재밌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평범하게 결혼해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여자의 인생보다는 내가 재밌는 거를 평생 하면서 살 수 있는 인생을 선택했다. 당구는 나에게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다. 내 인생을 온전히 맞길 만큼 말이다.  
 
무명의 당구선수가 되면 경제적으로 어려울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나.
 
아니다. 충분히 알고 있었다. 상금이 큰 여자 대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전국체전 정식종목도 아니어서 실업팀 선수가 될 가능성도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당구를 선택한 이유는, 먼 훗날에 내가 죽음 앞에서 ‘아, 신영이 한 평생 잘 살았구나’라고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어서였다. 나중에 꼭‘신영아, 너 정말 멋있게 잘 살았구나”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지금은 당신이 부동의 여자 3쿠션 한국 랭킹 1위다. 달라진 게 있나.
 
알다시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난 그냥 당구선수로 훈련과 시합에 출전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만 갖춰졌으면 좋겠다. 세계선수권대회 메달이 꼭 필요해서 동메달이라도 따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도 환경이 좋아질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독보적인 여자 3쿠션 선수가 되는 날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감사한 분들에게 한마디 해라.
 
처음 성남시당구연맹 이정희 회장님에게 당구를 배웠다. 지금의 내가 랭킹 1위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이정희 회장님 덕이다. 구리시당구연맹으로 이적하면서 임장영 회장님에게도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김정규당구스쿨 김정규 원장님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받고 있다. 도움을 주시고 응원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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