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용하
최용
김창섭
김정환

‘낭화헌당구장’의 명성은 ‘어성당구장’이 이어 받고
다시 ‘대한당구장’으로

해방을 맞아 해외에서 귀국한 박수복, 최용, 김창섭, 김정환과 일본 강제징병에서 돌아온 조동성 그리고 국내파인 방용하, 장수복, 이한종, 최기창, 김명호 등 당구인들이 모여 서로 실력을 겨루며 시국담을 나누던 곳이 ‘낭화헌당구장’이었다.

그러나 일제 때부터의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당구장은 해방 당시의 30여 곳이 양풍의 새 풍조로 술집, 다방, 댄스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절반으로 줄면서 1년 뒤에 다방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그 명성을 다음으로 이어 받은 곳이 서울역 앞의 ‘어성당구장’이다. ‘어성’에서는 홍콩제 플라스틱 공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상아공보다 한결 가볍게 느껴진 대신 중후한 맛이 없어 고점자들은 상아공 쪽을, 플라스틱 공은 초보자들이 애용하였다.

1947년 이른 봄에는 ‘어성’에서 해방 후 최초로 친목당구대회가 열렸다.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고점자들 약 1백명이 참가하였는데 방용하가 우승, 조동성이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그 해에는 당구계도 점차 활기를 찾기 시작해 새로운 당구장이 많이 생겼다.

따라서 개업기념이나 당구장 홍보를 위한 친선당구대회가 속속 열려 당구 확산의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우승자에겐 현금 대신 5돈짜리 순금 반지나 마카오 양복 한 벌 또는 쌀 한 가마니가 상품으로 주어졌다. 그러나 대회 뒷풀이에서 우승자가 쓰는 돈은 그 이상이었다.

서울의 충무로2가의 ‘태양당구장’은 일제시대 이름을 떨치던 ‘지하지가구락부’인데 만주에서 귀국한 박성희가 인수하여 술집으로 개조하려던 것을 당구인 조동성이 설득하여 당구장으로 다시 신장개업을 하면서 기념당구대회를 열었다.

전국에서 1백여명의 참가자들이 모였는데, 그 중에 홍일점의 여성 참가자가 있었다.

아마도 한국 당구계에서는 처음의 일로 기록될 것이다. 상하이에서 귀국한 25세의 이정숙이라는 여성으로 직업은 미용사였다.

물론 전국에서 모여든 고점자들과 핸디 적용 없이 대결할 만한 실력은 되지 못해 초반 탈락하였겠지만, 한국 당구계에 여성의 이름이 오른 첫 출발이었다는 사실로서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주에서 귀국한 최용은 후배지도를 목적으로 ‘무교당구장’을 열었고, 소공동의 ‘대한당구장’이 개업하면서 3백점대의 이춘기를 지배인으로 영입함으로써 ‘어성당구장’의 고점자들이 대거 ‘대한’으로 이동하였다.

그 해 11월에는 오랜 전통의 ‘일승정’이 ‘일신정’으로 이름을 바꾸어 새롭게 개장하였다. 주인은 뒷날 자유당 시절 국회 부의장이 된 한희석 씨였다.

그는 50점대의 당구실력이었지만 당구장 운영을 사업으로 택해 비중 있는 단골손님들의 출입으로 크게 성공하였다. 한희석 씨는 이때의 인연으로 국회에 진출한 후 당구협회 조직에 기여하게 된다.

미 군정 종료 후 6·25전쟁까지 당구계 황금기 맞아

미 군정이 끝난 1948년 무렵부터 1950년 6·25전쟁 발발까지의 이 기간은 대한민국이 독립된 국가로서 초석을 다지는 해로서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국이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국민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은 물밀 듯이 들어온 서양문물의 홍수 속에서 당구장 또한 호경기를 맞았다.

이런 호경기는 지방 대도시까지 확산되어 당구 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당구 고점자들의 왕래도 빈번히 이루어져 당구는 전국화의 시절로 접어들었다.

서울의 고점자가 지방으로 순회 시연을 나가는가 하면, 고수끼리의 대결을 위해 원정을 가고 지방의 고수들도 서울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당구대회에 자주 출전하였다.

이 시절의 지방 당구의 사정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의 대표 당구장은 왜정 때에 생겨 전통을 이어온 ‘동지당구장’이었으며, 그곳의 최고점자는 5백점대의 조성철과 이의선이었다.

이의선은 세무공무원으로 24년간을 봉직하였는데, 그의 ‘당구사랑’이 군사정권 시절에 관기숙정의 칼날에 걸려 지방으로 전출되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 일화를 남겼다.

부산은 항구도시로서 국제적인 교류가 많았던 만큼 당구장도 발달하여 시설면에 있어서도 최고였다. 남포동 일대가 중심지역으로 ‘초향당구장’과 ‘백홍당구장’이 쌍벽을 이루었다.

부산에는 상하이에서 돌아온 김창섭과 김정환이 일찍 자리를 잡음으로써 6·25전쟁 피난 시절에 전국에서 모여든 당구인들의 교류처로서도 부족함이 없는 구실을 할 수 있었다.

그 밖에 대구는 ‘동지당구장’과 ‘상아당구장’이 이름을 떨쳤고, 대전은 ‘역전당구장’, 청주는 ‘시민당구장’이 유명하였다. 청주에는 3백점대의 고점자 하건홍이 있었다.

그리고 군산의 ‘군산당구장’에서는 이완근이 3백점의 실력을 자랑했고 경기지방에서는 평택의 ‘녹원당구장’이 유명해 서울 고점자들의 원정이 잦았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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