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이 3쿠션 세계선수권 본선에서 사라졌다. 무려 19년 만의 일이다.

프로당구(PBA) 투어로 간판선수인 '3쿠션 사대천왕' 다니엘 산체스(에스와이)가 이적하면서 생긴 공백이 가장 큰 이유다.

산체스 외에도 하비에르 팔라존(휴온스), 다비드 사파타(블루원리조트), 다비드 마르티네스(크라운해태) 등 정상급 선수들이 모두 PBA 투어로 옮겼고, 안토니오 몬테스(NH농협카드)와 이반 마요르 등 전도유망한 선수들까지 PBA 투어에서 활약하면서 세계 최강의 전력으로 평가받던 스페인은 세계선수권 본선에 오르기도 힘든 처지가 됐다.

스페인에 남은 정상급 선수는 루벤 레가즈피가 사실상 유일하다. PBA에서 돌아간 카를로스 앙기타나 콜롬비아에서 국적을 옮긴 로빈슨 모랄레스도 있지만, '제2의 산체스' 역할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지난해에는 레가즈피가 결승까지 올라가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체면을 살렸던 스페인은 이번 세계선수권에서 레가즈피와 모랄레스를 대표로 내보냈다.

과거 십수 년 세계선수권에 나왔던 산체스와 레가즈피, 팔라존 등과 비교하면 전력의 공백이 크게 느껴진다.

결과는 이번 세계선수권 조별리그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스페인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레가즈피는 콜롬비아의 복병 루이스 마르티네스에게 패하면서 1승 1패가 됐지만, 애버리지 1.211을 기록해 O조 3위에 머물렀다.

PBA 데뷔 전 2018년까지 콜롬비아 대표로 세계선수권에 출전했던 모랄레스는 이번에는 스페인 유니폼을 입고 나왔으나, 조별리그 탈락의 쓴잔을 들이켰다.

모랄레스는 A조에서 '디펜딩 챔피언' 타이푼 타스데미르(튀르키예), 남미 강호 하비에르 베라(멕시코)와 대결해 베라에게 참패하고 타스데미르를 이겨 1승 1패가 됐지만, 애버리지 1.000의 초라한 성적으로 3위에 그쳐 탈락했다.

2019년 한국에서 출범한 프로당구(PBA) 투어.
2019년 한국에서 출범한 프로당구(PBA) 투어.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UMB 주최 '세계3쿠션선수권대회'.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UMB 주최 '세계3쿠션선수권대회'.

스페인은 산체스가 22살의 나이로 세계무대에 뛰어든 1995년 이후 2002년까지 매년 세계선수권 본선에 올라갔다.

2003년에는 현재 PBA 팀리그 같은 팀에서 뛰고 있는 황득희(에스와이)에게 산체스가 패하면서 처음 본선에 올라가지 못한 적이 있고, 2004년에도 조별리그에서 2위에 머물러 본선 16강 진출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는 산체스와 팔라존, 레가즈피가 세계선수권에 나가면서 매년 본선에서 한두 자리를 차지했다.

그동안 세계선수권에서 산체스는 우승 4회와 준우승 2회 등을 기록하며 스페인을 세계 정상으로 이끌었다.

스페인은 이런 산체스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앞으로 이런 흐름이 지속되면 스페인의 유망주 발굴이 지금보다 더 어렵게 된다.

5년, 10년이 흐른 뒤에 과연 스페인에서 3쿠션 종목이 생존할 수 있을지조차도 의문이다.

19년 만에 처음 세계선수권 본선에서 사라진 스페인의 문제는 전 세계 당구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고, 단지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더 우려스러운 일이다.

항간에는 "세계선수권이라도 PBA와 날짜를 조정해서 각 나라의 정상급 선수들이 경쟁하자"는 이야기도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은 여러 문제가 있다.

PBA와 UMB(세계캐롬연맹)가 상생을 위한 협상을 한다면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여전히 양측은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그사이 생긴 선수들 사이의 간극도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과 같이 선수 풀이 좋은 국가는 두 길로 가도 양측에 선수가 남을지 모르겠지만, 장차 10년 후를 생각해 보면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스페인처럼 전력 약화와 선수난을 겪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야스퍼스가 없는 네덜란드나 블롬달이 없는 스웨덴, 혼이 없는 독일, 뷰리가 없는 프랑스, 시덤이 없는 이집트. 이 모든 현상이 산체스 없는 스페인과 결코 다르지 않다.

만약 3쿠션 종목의 국가가 줄어들거나 선수들 실력이 하향 평준화된다면, 종목 자체 지위의 하락 문제와 직결된다. 또한, 현역 세계 최강자들이 10년 뒤 6, 70대가 돼서도 지금처럼 우승트로피를 들고 있다면 이 또한 문제다.

지금 세계 당구계는 시간이 많지 않은 그들에게 최대한 보상과 은퇴의 기회를 주어야 하고, 그 안에 '레거시'를 남기는 일에 재원을 투자해야 한다.

이를 활용해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국가에서도 실력 있는 유소년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드는 일이 지금 전 세계 당구계가 짊어진 우선한 과제다.

산체스가 빠진 스페인에서 먼저 시작됐고, 이제 곧 10년 안에 차례로 유럽의 각 나라에서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나는 미래 세대를 위해, 나의 '레거시'를 남기기 위해 이곳(PBA)에 왔다" 

세미 사이그너(휴온스)가 개막전을 우승하며 남긴 소감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일깨워 준다. 

 

김도하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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