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本色] '리멤버 KRK' 김경률, 그를 기억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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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本色] '리멤버 KRK' 김경률, 그를 기억하는 시간
  • 김주석 기자
  • 승인 2020.02.23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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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률 추모 5주기' 그의 과거를 돌아보고 기억하는 시간

세계 최강자 반열에서 오래도록 한국 당구의 명성 떨친 '선구자'

성실하고 근성있는 선수, 모든 이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우리의 친구로 영원히 남을 것
고 김경률(1980~2015).   빌리어즈 자료사진
고 김경률(1980~2015). 빌리어즈 자료사진

‘당구왕’ 김경률, 그가 우리 곁을 떠난지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당구공을 이리저리 옮겨가며 연습을 하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비록 우리가 김경률과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을지 몰라도 그가 남긴 흔적이 우리들의 공간에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에 아직도 고마움과 아련한 마음이 지워지지 않는다.

만약 그날의 사고가 없었더라면 우리 나이로 이제 41살의 중년이 되었을 그는 더 우직한 모습으로 한국 당구의 기둥 역할을 하고 있을 텐데.

안타깝게도 지난 2015년 2월 22일, 우리는 불의의 사고로 기둥을 잃었고 지난 5년 동안 그의 큰 빈 자리를 실감하며 하루하루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2020년 2월에 우리 당구인과 영원히 함께하는 그의 모습을 그려 본다. 김경률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지난 2010년 2월 21일, 터키 안탈리아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김경률은 한국 선수 최초로 당구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은 당시 시상식에서 두 팔을 들고 기뻐하는 김경률.  빌리어즈 자료사진
지난 2010년 2월 21일, 터키 안탈리아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김경률은 한국 선수 최초로 당구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사진은 당시 시상식에서 두 팔을 들고 기뻐하는 김경률. 빌리어즈 자료사진

영원한 우리의 챔피언

2010년 2월 터키 안탈리아에서 역사적인 일이 일어났다. 김경률이 3쿠션 당구월드컵 결승전에 올라가 세계 최강자인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와 세트스코어 2-2의 숨막히는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한국 사상 최초로 3쿠션 당구월드컵 정상을 눈 앞에 두고 벌어진 치열한 승부였다. 당시 김경률은 야스퍼스와 벌인 2번째 결승 대결이었다.

앞서 2008년 경기도 수원에서 열린 당구월드컵에서 최초로 결승에 올라간 김경률은 야스퍼스에게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그쳤다.

한국 선수 중에서 당구월드컵 결승 무대를 밟은 선수는 김경률이 유일했다.

그는 2008년 수원에서 처음 결승에 올라 한국 당구를 전 세계에 알렸고, 2010년 터키 이스탄불과 2011년 터키 트라브존에서 모두 3번 우승에 도전했다.

김경률은 3차례 결승에서 우승 1회와 준우승 2회라는 기록을 남겼다.

김경률은 현재 세계 1위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와 당구월드컵 결승에서 2차례 대결했다. 안탈리아에서 첫 우승을 할 당시에 김경률은 야스퍼스를 세트스코어 3-2로 꺾었다. 사진은 안탈리아 대회 결승 시작 전 자리에 앉아있는 김경률과 야스퍼스.  빌리어즈 자료사진
김경률은 현재 세계 1위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와 당구월드컵 결승에서 2차례 대결했다. 안탈리아에서 첫 우승을 할 당시에 김경률은 야스퍼스를 세트스코어 3-2로 꺾었다. 사진은 안탈리아 대회 결승 시작 전 자리에 앉아있는 김경률과 야스퍼스. 빌리어즈 자료사진

수원에서 벌인 야스퍼스와 첫 결승 대결에서 아쉽게 패했던 그는 터키 안탈리아에서 3-2로 야스퍼스를 꺾고 한국의 역사상 첫 당구월드컵 우승 쾌거를 달성했다. 

김경률이 처음 당구월드컵 정상에 오른 그날의 감동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당구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마지막 챔피언 포인트를 올린 그는 두 팔을 번쩍 들고 환호성을 내질렀고, 그 모습을 본 우리도 벅찬 감동을 느끼며 함성을 터트렸다.

당구대 위에 태극기를 올려두고 한국의 첫 세계 제패를 자축하는 모습과 그가 트로피를 가슴에 안고 대회장에 울려퍼지는 애국가를 따라부르며 눈물을 애써 참는 그의 모습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김경률은 31살의 나이로 3쿠션 당구월드컵 챔피언에 등극했다. 고령화가 문제로 여겨지던 3쿠션계에 김경률은 보석 같은 존재였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김경률은 31살의 나이로 3쿠션 당구월드컵 챔피언에 등극했다. 고령화가 문제로 여겨지던 3쿠션계에 김경률은 보석 같은 존재였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세계 최강자 반열에 올랐던 유일한 아시아권 선수

김경률은 31살의 나이에 3쿠션 당구월드컵 챔피언에 올랐다. 고령화된 3쿠션계에서 20대 중반부터 꾸준하게 4강 이상의 성적을 올리며 ‘3쿠션 사대천왕’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선수였다.

김경률과 비슷한 또래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던 선수는 3살 어린 83년생 필리포스 카시도코스타스(그리스)와 1살 터울의 80년생 제러미 뷰리(프랑스) 외에는 이렇다 할 만한 선수가 없었다. 특히,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한 실력자였다.

3쿠션 종목의 미래를 걱정하던 시기에 혜성처럼 나타난 김경률은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적으로 보석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2006년 그리스 볼로스 3쿠션 당구월드컵 4강에 올라간 김경률의 등장으로 고령화의 몸살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3쿠션계는 한줄기 빛을 볼 수 있었다.

좋은 성적을 한 번 올리면 잠깐 반짝거리다가 사라져 간 선수들은 많았지만, 김경률은 달랐다.

이듬해 멕시코시티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다시 4강에 진출한 그는 2008년 열린 네덜란드 슬루이스낄 당구월드컵과 포르토 당구월드컵에서 연달아 4강에 오르며 사대천왕을 비롯한 모든 유럽의 강호들에게 위협적인 선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김경률은 한 대회 걸러 그해 수원에서 열린 당구월드컵에서 마침내 첫 결승 무대를 밟고 준우승을 기록했다.

2009년 수원 당구월드컵에서 5번째 4강 진출을 달성한 김경률은 몇 달 후 2010년 첫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드디어 당구월드컵 챔피언에 오르게 되었다.

다음 해인 2011년 터키 트라브존 당구월드컵에서는 결승에서 에디 멕스(벨기에)에게 져 준우승에 그쳤고, 그해 마지막 대회였던 후르가다 당구월드컵 4강에 올라 전성기를 이어갔다.

당시에 김경률이 3쿠션 챔피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시기의 문제였을 뿐 대부분의 관계자들은 그가 세계 정상에 올라가는 것을 기정사실로 여겼다. 그만큼 김경률의 위치는 독보적이었다.
 

김경률은 10년 동안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톱랭커 12' 안에 들어간 유일한 아시아권 선수였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김경률은 10년 동안 세계적인 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톱랭커 12' 안에 들어간 유일한 아시아권 선수였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10년 동안 유일하게 '톱랭커 12' 안에 들어간 아시아권 선수

김경률은 무려 10년 동안 세계랭킹 12위 안에 있었다. 유럽의 몇몇 강호들을 제외하고는 아시아권에서는 유일한 선수다.

톱랭커 12명에게는 3쿠션 당구월드컵 본선에 직행할 수 있는 시드가 주어진다. 이 12명은 항공권과 호텔 등의 혜택을 받는다.

따라서 전 세계 당구선수들은 '톱랭커 12' 안에 들어가는 것을 첫 목표로 삼는다. 그러나 세계 최강자들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 때문에 랭킹 12위 안에 잔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한두 대회 반짝 성적을 올리더라도 꾸준함을 유지하지 못하면 곧바로 밀려난다.

그런데 김경률은 1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그가 세계대회에서 올린 성적은 3쿠션 당구월드컵 우승 1회와 준우승 2회, 4강 7회 등이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 선수 중에서 이런 성적을 올린 선수는 김경률밖에 없었다.

그 외에 세계랭킹에 포함되는 세계3쿠션선수권대회와 아시아3쿠션선수권대회, 한국챔피언십 등에서도 계속해서 성적을 올리며 랭킹포인트를 쌓은 김경률은 항상 세계랭킹 10위권 내에서 자리를 지켰다.

이것은 그가 왜 한국 당구를 대표하는 선수인지를 입증하는 객관적인 사실이다.

쟁쟁한 선수들과의 경쟁에서 한 순간이라도 방심을 하면 곧바로 성적과 직결되고, 곧 12위 밖으로 이탈하게 되는 것이 정석인데, 김경률은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항상 꾸준하게 성적을 올려 톱랭커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기 한 달 전인 2015년 1월 27일에 산정된 세계랭킹에서 처음으로 18위까지 떨어져 10년 만에 12위 밖으로 밀려나면서 김경률의 신화는 안타깝게 막을 내렸다.

김경률의 랭킹이 떨어진 이유는 그해 1월 20일에 개막한 '제7회 아시아3쿠션선수권대회' 32강에서 탈락하면서 랭킹포인트가 무려 77점이나 깎였기 때문이다.

대회 전까지 그는 랭킹포인트 206점으로 8위에 올라 있었지만, 대회 후에는 129점으로 낮아져 무려 10계단이나 세계랭킹이 하락했다. 
 

김경률은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무척 위협적인 선수였다. 그것은 단지 185cm의 큰 키때문만은 아니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김경률은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무척 위협적인 선수였다. 그것은 단지 185cm의 큰 키때문만은 아니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성실함과 근성'으로 단련된 카리스마가 원천

생전 김경률의 경기를 보면 다른 선수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무척 돋보였다. 보는 사람조차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경기 중에 직접 마주한 상대 선수에게는 엄청난 압박이었다고 한다.

그와 대결한 많은 선수들은 "김경률과 치면 기가 죽는다"라는 표현을 자주 썼다. 멘탈이 무너진다는 얘기다.

스포츠 경기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면 승리는 어렵다. 심지어 당구는 멘탈 스포츠이기 때문에 경기 중에 기가 밀리면 회복이 불가능해진다.

물론,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써보지도 못하고 패배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 김경률의 카리스마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한때 김경률이 어떤 방법으로 상대를 주눅들게 만드는지 궁금했다. 단순하게 185cm의 큰 체구를 비롯해 압도적인 명성에 준한 이름값만으로 상대방을 위축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한 질문에 김경률의 대답은 단순했다. 패턴이었다. 당구는 흐름을 잡는 경기이기 때문에 내가 상승세를 탈 때와 상대방이 상승세에 있을 때, 둘 다 공격으로 치고 나갈 때 등 여러 가지 상황에서 자신만의 흐름이 깨지지 않도록 집중력과 멘탈을 유지하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었다.

상황에 따라 각자의 집중력을 최대한 이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경률은 신체 바이오리듬을 경기 시간대에 맞추기 위해 매일 훈련시간을 오전 9시부터 밤 10시까지 정해놓고 그 시간에는 가급적 당구대 앞에서 큐를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한다고 덧붙였다.

그의 이런 훈련 방법은 당구선수들에게 많은 자극제가 되었다. 훗날 이러한 김경률의 훈련 방법이 알려지면서 당구선수도 다른 종목의 운동선수와 비슷한 형태의 개인훈련과 멘탈트레이닝이 시작되었다.

주로 상대방과 하던 당구선수들의 훈련 패턴은 김경률처럼 당구대 앞에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루 10시간씩 매일 이어가는 개인훈련 방식으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2010년 안탈리아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우승한 김경률이 당구대에 태극기를 세우며 기뻐하는 모습.   빌리어즈 자료사진
2010년 안탈리아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우승한 김경률이 당구대에 태극기를 세우며 기뻐하는 모습. 빌리어즈 자료사진

꿈을 이루기 위한 김경률의 마지막 도전

이러한 방법을 김경률에게 누구도 가르쳐 준 사람이 없었다. 수년 동안 스스로를 통제하고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개인훈련을 하면서 실력을 쌓아나간 김경률은 훈련 방법도 직접 터득했다.

그는 글자 그대로 ‘당구 천재’였다. 이것이 2003년에 선수로 데뷔해 3년 만에 국가대표로 아시안게임에 나가 동메달을 따내고, 이후 10년 동안 세계 정상에 우뚝 설 수 있었던 이유다. 그 과정이 당연히 쉽지 않았다.

김경률은 철저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며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했고, 10년 동안 세계 정상급 선수로 활약하며 미생의 스포츠였던 당구를 완벽한 스포츠로 전환하게 만든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선구자’라고 부른다.

김경률은 수많은 업적을 남긴 선구자로 대접을 받았지만, 자만하지 않고 항상 겸손한 모습으로 경기장 밖에서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친구였다.

2010년에 3쿠션 당구월드컵에서 우승한 이후 한국에 돌아온 그와 인천의 캐롬클럽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한 적이 있었다.

당시에 몇몇 선수들이 그 클럽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황득희가 있었다.

김경률은 지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황득희의 영향을 받아 3쿠션 당구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대한당구연맹 회장이 된 '당구 전설' 고 이상천(1954~2004)의 도움을 받아 당구월드컵 등 외국시합에 나가게 되었다. 사진은 2004년 11월 30일 열린 이상천 전 회장 추모대회에서 만난 김경률과 황득희.  빌리어즈 자료사진
김경률은 지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황득희의 영향을 받아 3쿠션 당구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대한당구연맹 회장이 된 '당구 전설' 고 이상천(1954~2004)의 도움을 받아 당구월드컵 등 외국시합에 나가게 되었다. 사진은 2004년 11월 30일 열린 이상천 전 회장 추모대회에서 만난 김경률과 황득희. 빌리어즈 자료사진

인터뷰를 시작할 때 쯤 그가 조용히 필자의 귀에 손을 대더니 "다른 데 나가서 하시죠"라고 속삭였다. 대부분의 인터뷰는 당구클럽 한쪽 구석에서 하던 시절이었는데, 김경률은 여기서는 인터뷰를 못 한다며 나가자고 재촉했다.

밖으로 나간 그는 "내가 처음 당구선수를 하게 된 게 황득희 선배님 때문이고, 아직도 내 우상이다. 그런데 내가 세계대회 나가서 성적 좀 냈다고 황득희 선배님 앞에서 인터뷰를 할 수는 없다"라고 말을 했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무척 순박해 보이면서도 착한 사람이라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오랫동안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한국 선수 최초로 당구월드컵에서 우승까지 했으면,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다들 인정하는 분위기였지만, 김경률은 그만큼 겸손했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는 뚝심이 있었다.

김경률이 착하고 겸손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는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선수였다.

김경률은 사상 처음으로 세계 당구계에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했다. 눈을 꼭 감고   빌리어즈 자료사진
김경률은 사상 처음으로 세계 당구계에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했다. 한손에 우승트로피를 들고 다른 한손은 가슴에 얹은 김경률이 시상식에서 애국가를 따라부르는 모습. 빌리어즈 자료사진

현실이 된 '김경률의 꿈'

2014년 초 열린 이스탄불 당구월드컵에서 조재호, 최성원과 함께 4강 3자리를 휩쓸고 돌아온 얼마 후에 장시간 운전을 해서 지방을 같이 내려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마지막 도전에 대한 로드맵을 어느 정도 그리고 있었다.

실제로 김경률은 작은 건물 하나를 매입했다. 그 건물 1층에 식당, 2층에 당구 훈련장, 3층과 4층에는 잠을 잘 수 있는 방을 만들어서 당구선수들이 배고프지 않고, 걱정 없이 훈련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김경률 다운 생각이었다.

당구클럽과 용품 등에 대한 투자도 병행하면서 자본금을 만들려고 했다. 연맹에서 만들지 못하니 직접 벌어서라도 '우승상금 1억원' 대회를 만들 자본금을 마련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실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김경률의 마지막 도전이었다. 2014년에 그는 후원자를 직접 섭외하고, 여러 투자를 통해 수익을 만들었다. 그의 꿈에 계단 하나를 올라가고 있었다.

2014년 말에 서울에서 열린 '세계3쿠션선수권대회'를 최성원이 우승한 것과 2015년 1월 열린 아시아3쿠션선수권을 32강에서 탈락해 난생 처음 18위까지 세계랭킹이 떨어진 상황에 자극을 받아 2월 구정 인사를 하며 여러 명의 지인들에게 다시 선수로도 훈련을 열심히하겠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행님, 전 한 달이면 됩니다"라고 말했던 김경률은 그날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2020년, 지금 당구계는 한 해 상금이 60억원이 달할 만큼 발전했다. 김경률의 꿈은 현실이 되었고, 당구는 어엿한 프로 스포츠로 성장했다.

5년 전 만해도 국내에서 연봉으로 치면 1억원 이상을 올리는 선수는 김경률이 유일했지만, 지금은 상금만으로도 1억원을 훌쩍 넘겼고 상위 클래스 선수들은 수억원을 벌어들일 만큼 환경이 좋아졌다.

지금쯤 그는, 하늘에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지 않을까. 

한국 당구를 완생으로 만든 선구자 김경률은 스스로를 희생해도 전혀 아까워하지 않았고, 어려운 일에는 가장 앞에 나서서 이끄는 리더의 모습으로, 그리고 시합 중에는 카리스마 넘치는 두려운 상대이면서 당구 팬들에게는 가장 사랑받는 선수였고, 또한 세계 최고 당구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함과 웃음을 잃지 않는 우리의 친구로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김경률 5주기에 그를 기억한다.

 

<빌리어즈> 김주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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