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당구 130년사 '이슈별 당구사 바로 알기'>는 한국에 당구가 전파된 이후 130년 동안 어떻게 당구 문화가 자리 잡았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스포츠가 되었는지를 되짚어 보는 칼럼입니다. <빌리어즈>가 30년간 취재한 기사와 수집된 자료, 당사자의 인터뷰에 근거하여 김기제 발행인이 집필하며 매주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 아시아 5개국 32명의 각국 대표가 올림픽 제3경기장에서 3일간의 열전... 박신영 준우승 차지 

아시아포켓볼연맹(APBU)이 주최하고 대한당구경기인협회(회장 김영재)가 주관한 제3회 아시아포켓9볼챔피언십이 제2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와 동시에 92년 11월 3~5일 3일간에 걸쳐 서울의 올림픽 제3경기장(역도경기장)에서 성대하게 치러졌다.

한국, 일본, 대만, 인도네시아 등 5개국에서 32명의 각국 대표가 출전했으며, 전국당구선수권대회에는 국내식 3쿠션과 국제식 3쿠션 그리고 포켓볼 부문에 전국 각 지역에서 200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우승자 차오퐁팡(왼쪽)과 아시아포켓당구연맹 투영휘 회장. 빌리어즈 자료사진

대회 이틀째인 11월 4일에 개회식이 거행되었다. 개회식에 참석한 아시아포켓볼연맹 투영휘 회장은 대회사를 통해 "정정당당하고 품위있는 정신을 가진 자만의 명예로운 귀족스포츠가 당구다"라며 역설하고, 이번 대회를 개최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대한당구경기인협회 김영재 회장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먼저 국내 선수권대회의 포켓볼 부문 경기는 아시아포켓볼챔피언십에 대표로 출전한 11명의 선수와 국내 13명의 선수가 예선전을 거쳐 순위를 가렸다.

경기 결과 1위는 김원석(광주지회), 2위는 이장수(광주지회), 3위는 박신영(대전지회)이 차지했다. 
 

아시아포켓9볼챔피언십과 동시에 진행된 전국당구선수권대회 포켓볼 부문의 입상자들. 왼쪽부터 2위 이장수, 우승 김원석, 3위 박신영. 빌리어즈 자료사진


아시아포켓9볼챔피언십은 '신의 손'이라 불리는 차오퐁팡(조풍방)을 주축으로 신흥 포켓볼 강국으로 떠오른 대만과 노장을 중심으로 신예 선수들과 뭉친 일본, 박신영과 김원식이라는 신예들을 앞세워 대만과 일본의 도전에 온 힘을 쏟는 한국의 3파전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예선을 치른 결과 8강에는 일본이 무려 5명이 진출한 반면 대만은 1명, 한국은 2명에 불과했다. 4강에는 일본의 모리노 요시히로, 나가타 슈지 등 2명과 대만의 차오퐁팡, 한국의 박신영이 올랐다.

준결승전에서 차오퐁팡과 박신영이 각각 일본 선수를 꺾고 결승전을 치르게 되었다. 결승전은 노련한 차오퐁팡이 초반부터 박신영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6-1의 스코어로 앞서 승부를 일찌감치 예상하게 했다.

하지만 박신영은 최선을 다해 10-8까지 추격하는 데 성공했지만, 아쉽게도 11-8로 분패했다. 그러나 박신영은 한국 선수 최초로 포켓볼 국제대회 준우승이라는 값진 성과를 거두었다. 
 

제3회 아시아포켓9볼챔피언십 입상자들. 왼쪽부터 준우승 박신영(한국), 우승 차오퐁팡(대만), 3위 모리노 요시히로(일본)와 나카타 슈지(일본). 빌리어즈 자료사진


당시 29세였던 박신영은 88년에 처음으로 포켓볼에 입문한 유망주였다. 연습벌레라 불릴 만큼 꾸준한 노력을 통해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었고, 대만으로 당구 유학을 갔다 와서 한층 기량이 향상된 한국 포켓당구의 기둥이라 할 수 있었다. 

제3회 아시아포켓9볼챔피언십의 성공적인 한국 개최와 박신영의 준우승 쾌거는 한국 포켓볼 발전에 큰 기폭제가 되었고, 그동안 취약종목으로 여겨 온 포켓볼 종목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면서 국내에 유례없던 포켓볼 붐의 전조가 되었다.
 

당시 아시아 최강자 대만의 차오퐁팡이 신중하게 경기를 펼치고 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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