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당구 130년사 '이슈별 당구사 바로 알기'>는 한국에 당구가 전파된 이후 130년 동안 어떻게 당구 문화가 자리 잡았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스포츠가 되었는지를 되짚어 보는 칼럼입니다. <빌리어즈>가 30년간 취재한 기사와 수집된 자료, 당사자의 인터뷰에 근거하여 김기제 발행인이 집필하며 매주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제17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 포켓9볼 부문 우승자 배동홍이 신중하게 경기에 임하고 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 최초의 포켓볼 당구대 설치는 1926년 충무로3가의 '닛쇼데이'

한국의 당구는 일본으로부터 전래되었다. 일본에 당구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이 에도 시대인 1850년경 네덜란드 사람에 의해서였고,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조선시대 말기 고종 때인 1884년에 인천 제물포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에 당구대가 수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일본에는 1900년대 초기에 미국으로부터 포켓볼 당구대가 수입되어 와 로테이션 게임으로 교토 지역을 중심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하므로 초창기 한국으로 들여온 당구대는 포켓볼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1912년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의 건강을 위해 창덕궁 동행각에 설치된 옥돌대(당구) 2대는 4구식 당구대였고 1920년 남대문에 일본인 관리용으로 '경성구락부'에 5대의 당구대가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나 그다음 해 최초의 영업당구장으로 개업한 '파주정(일본인 경영)'의 1대의 당구대도 모두 4구식이었다.

포켓볼 당구대가 설치된 것은 1926년 일본 당구대 제작회사가 직영 전시용으로 서울 충무로3가의 '닛쇼데이'에 1대를 설치한 것이 처음이다.

그 후로 낭화헌(명동 소재)과 쌍큐(충무로5가)에 각각 1대씩의 포켓볼 당구대가 설치되어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개시했다.

1930년에 접어들자 기존 당구장에도 포켓볼 1대씩을 설치하고 영업을 하는 곳이 여러 군데 생겼다.

기록을 보면 반도당구장(광화문 적선동 입구), 중앙당구장(종로2가 보신각 옆), 낙랑당구장(종로4가 현 세운상가 옆), 흑룡당구장(인사동 파고다공원 뒤), 자연장당구장(신문로2가 고려병원 자리) 등이다.

1945년 광복이 되자 혼란한 사회상으로 당구장이 감쇠되어 서울의 경우 16개소로 줄었고 대개 다방과 술집으로 업종이 변경되었다.

그 후 점차적으로 당구장이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여 이런 과정에서 청조당구장(종로1가 청진동 입구), 천일당구장(청계천4가 예관동, 장수복 경영), 일신당구장(종로3가 현 서울극장 앞) 등에 각 1대씩의 포켓볼 당구대가 설치되었다.

한편 지방에서는 대구의 태양당구장(최 모 씨 경영)과 부산의 백홍당구장(부평동 소재, 허근 경영), 초향당구장(남포동 소재, 전병학 경영) 등에 포켓볼 당구대가 1대씩 설치되었다.

 

포켓볼(9볼)이 국내 공식대회에서 첫선을 보인 제2회 일간스포츠배 당구대회(부산 구덕체육관). 빌리어즈 기사 갈무리

 

6·25전쟁이 발발하여 대구, 부산으로 피란을 내려간 당구인들이 이들 당구장의 포켓 당구대에 몰려 내기당구를 쳤다.

이때의 게임 종목은 21점치기, 번호잡기, 9볼 등으로 당구장에서 숙식을 하며 당구에 지나칠 정도로 몰입하며 서울 환도를 기다렸다.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무직자와 실직자가 많아서 당구장에는 자연히 이들과 내기당구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포켓볼 당구대를 설치한 당구장에 몰려들었다.

이런 좋지 않은 현상은 자유당 시절 마침내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어 단속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1961년 군사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이 사회정화 차원에서 당구장을 단속하고 특히 포켓볼을 미풍양속을 해치는 업종으로 규정하여 제재했다.

이로 인해 내기당구를 위주로 하여 성행하던 포켓볼은 마침내 철퇴를 맞고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조동성의 회고로는 1968년 무렵 신설동 시외버스 터미널 앞의 녹원당구장에 있던 1대의 포켓볼 당구대가 사라진 것이 그 마지막이 되었다고 전한다.

이 무렵 조동성은 일본의 당구대 제작사인 '니혼다마다이(日本玉台)'로부터 '가리온' 포켓볼 당구대 5대를 기증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이미 맥이 끊어진 포켓볼 보급은 한국에서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여 이를 사절했다.

그러나 미군이 주둔하고 있던 평택에 군용 포켓볼 당구대와 의정부, 동두천에 영업용 8대(3개소)가 '풀 바' 형태로 남아 있었다.

 

세계3쿠션선수권대회 아시아 대표결정전과 함께 열린 아시아포켓9볼오픈대회 개회식. 한국, 일본, 대만이 참가하여 서울문화체육관에서 성대히 개최되었다. 빌리어즈 기사 갈무리


■ 대한당구협회 제10대 박성오 회장 시절에 보건사회부 승인으로 포켓볼 다시 시작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 박성오 회장은 제10대(76년 9월~ ), 제11대, 제12대를 거쳐 한동안의 공백 기간을 두었다가 제17대(88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가장 오래 회장직을 수행했다.

그의 몇 가지 업적 중에서도 당구의 활성화를 위해 포켓볼의 사행성 여부와 당구장에서의 허용 여부를 보건사회부에 질의하여 당국으로부터 "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아낸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당국의 이런 승인에도 불구하고 한번 꺼진 불씨는 다시 잘 타오르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협회 차원에서 경기방법을 지도하고 룰을 가르쳐야 했으나, 업주나 동호인들이 모두 냉담할 뿐이었으므로 인위적으로는 도저히 재점화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약 25년의 세월 동안 포켓볼은 당구동호인들의 뇌리에서 점차 잊혀가고 있었다. 다만, 당구선수들이 국제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각자도생으로 포켓볼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허슬러>와 <컬러 오브 머니>의 내기당구 영화가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여파로 일본에서도 1980년대에 대단한 포켓볼 붐이 일어나 그 덕택으로 한국에서 80년대 말에 포켓볼 당구대가 일본에 대량 수출되는 호황을 맞게 되었지만, 생산업자들이 재미를 보았을망정 한국에서의 포켓볼에 대한 관심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즈음에 대만을 비롯한 동남아의 포켓볼의 열풍 또한 일본에 못지않았다. 

한국에서 포켓볼이 최초로 공식 대회에 등장한 것은 1987년 11월 5일~7일 부산 구덕체육관에서 개최된 제2회 일간스포츠배 전국당구대회에서다.

3쿠션과 예술구, 포켓볼 부문으로 열린 이 대회의 포켓볼 종목은 9볼이었고, 우승은 배동홍(46세)으로 3쿠션과 함께 2관왕을 차지했다.

대학 시절까지 국가대표급 수영선수였던 그는 남다른 스포츠 재능으로 당구에서도 3쿠션과 포켓볼을 섭렵하여 이후의 대회에서도 그의 실력을 입증했다.

1988년 1월 23~24일 대한당구협회 주최의 제17회 전국당구선수권대회가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개최되었는데 이 대회는 제44회 세계3쿠션선수권대회 아시아결정전과 제1회 아시아포켓9볼오픈선수권대회의 한국 대표선발전을 겸하여 열렸다.

대전방식은 16강전과 8강전이 5세트, 4강전과 3, 4위전이 8세트, 결승전이 10세트 선승제로 치러졌다.

8강에는 김상윤, 고철수, 김원오, 배동홍, 박대용, 민평기(이상 서울), 정동희(경기), 안용수(부산)가 올랐고 4강에는 김상윤, 배동홍, 민평기, 정동희가 진출했다.

4강전에서는 배동홍이 김상윤을 8-7, 민평기가 정동희를 8-6으로 이기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전에서는 팽팽한 접전 끝에 배동홍이 민평기를 10-9로 물리치고 2개월여 전에 열렸던 제2회 일간스포츠배에 이어 포켓9볼 부문 2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3, 4위전에서는 김상윤이 정동희를 이기고 3위에 올랐다. 
 

아시아포켓9볼오픈대회에 입상한 선수들. 1위 고수기 준이치(일본), 2위 오철인(대만), 3위 나미에 타카시(일본). 빌리어즈 자료사진


이 대회가 열린 지 25일 뒤인 1월 30~31일에 세계3쿠션선수권대회 아시아 대표결정전과 아시아포켓9볼오픈대회가 한국, 일본, 대만(자유중국) 3개국 선수들이 출전한 가운데 서울 문화체육관에서 막을 올렸다.

특히 포켓볼은 일반인들에게 생소한 종목이라 아시아 지역의 다른 나라 선수들이 출전한다는 소식에 기대감을 갖고 많은 관중들이 운집했다.

한국 대표로는 제17회 전국대회의 포켓9볼 부문 1, 2, 3위를 차지한 배동홍, 민평기, 김상윤 등이 출전했고, 일본 대표로는 고수기 준이치, 나미에 타카시, 히노키야마 하루시가 참가했으며, 대만(자유중국) 대표로는 오철인, 진준웅, 임금령이 출전했다.

대회 결과 우승은 일본의 고수기 준이치, 준우승은 대만의 오철인, 3위는 일본의 나미에 타카시에게 돌아갔다.

대회를 지켜본 많은 당구인이나 관중들은 한국 포켓볼의 앞길은 아직 요원하며 포켓볼의 규제가 너무 늦게 풀렸음을 이구동성으로 아쉬워했다.

이 대회를 취재한 <월간 당구(빌리어즈)>에서는 크게 느낀 바가 있어서 앞으로의 포켓볼의 관심과 확산을 위해서는 포켓볼 경기 방법을 대중에게 널리 보급하는 것이라 판단, 88년 3월호부터 ‘포켓 빌리어드’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권위 있는 저서의 번역을 승인받아 필자가 번역하고 <월간 당구(빌리어즈)>의 편집위원인 조동성이 감수해 25회에 걸쳐 실었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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