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세출의 당구선수 고 김경률이 남긴 기록을 조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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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세출의 당구선수 고 김경률이 남긴 기록을 조망한다
  • 김탁 기자
  • 승인 2018.02.22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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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률은 지난 2010년 2월 21일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 당구월드컵 결승전에서 딕 야스퍼스(네덜란드)를 세트스코어 3-2로 꺾고 한국 선수로는 최초로 우승을 차지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빌리어즈=김탁 기자] 한국 당구의 기둥이었던 최고의 당구선수 김경률(1980~2015)의 추모 3주기를 맞아 누구보다도 위대한 업적을 남긴 그의 생애를 조망한다. 

경남 양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구선수가 되기 위해 용기를 내어 서울로 올라온 이후 김경률이 어떻게 세계적인 당구선수로 성장했는지, 그가 남긴 기록은 무엇인지를 되짚어 본다.

 

2003년 9월 열린 SBS 한국당구최강전 3차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처음 이름을 알린 김경률. 그는 이후 전국대회에서 계속 활약을 이어가며 유망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 코치없이 스스로 훈련 프로그램 만든 스포츠 당구의 선구자

김경률은 1980년 2월 23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났다. 경남 양산중학교와 언양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까지 양산에서 살았던 김경률은 16살인 중학교 3학년 때 처음 큐를 잡았다.

당구를 좋아하게 되면서 학창시절 친구들과 함께 취미로 당구를 즐겼다. 그런 김경률에게 당구선수의 꿈을 키우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2001년 11월 군에서 전역한 김경률은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구 종목 경기가 열린 동주대학체육관을 찾았는데, 황득희가 세계적인 스타인 이상천을 꺾는 모습에 매료되어 본격적으로 당구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후 1년 동안 하루 12시간 이상의 맹훈련을 거듭하고 2003년 2월에 서울로 올라와 서울당구연맹에 선수 등록을 하며 당구선수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당시 김경률의 훈련 스케줄은 결과적으로 당구를 스포츠로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아침 6시에 기상해 밤10시까지 훈련 프로그램을 짜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코치나 조력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그는 스스로 '게임'이 아닌 훈련을 시작했다.

그 성과는 불과 7개월 만에 나타났다. 그때를 회상하는 한 당구선수는 "김경률은 경남, 부산 지역에서 당구를 좀 치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올라와서 당구선수가 되었고, 몇 달 만에 전국대회에서 입상했다며 TV에 나왔다. 경률이를 보니까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바로 최성원이다. 당시 최성원은 경남과 부산 지역에서 꽤 유명한 당구 실력자였고, 그때까지만 해도 김경률은 최성원보다 한참 아래였다.

그런 그가 당구에 대한 열정과 인내를 불태우며 훈련 프로그램에 따라 나홀로 훈련을 거듭한 끝에 '부산 당구통' 최성원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먼저 이루기 시작했다.

김경률은 2003년 9월 열린 SBS 한국당구최강전 3차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이후 전국대회만큼 어렵다던 서울당구연맹 정기평가전을 여러 차례 우승하며 자리를 잡았고, 전국대회에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김경률은 이상천 전 대한당구연맹 회장의 도움을 받아 세계 무대에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김경률의 당구월드컵 진출은 한국 당구가 세계로 나가는 물꼬를 트이게 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 '당구 전설' 이상천이 키워 낸 재목, 김경률

김경률의 재목을 알아보고 그에게 많은 경험을 쌓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준 사람은 바로 '당구 전설' 이상천 전 대한당구연맹 회장이다.

이 전 회장은 위암으로 타계하기 직전인 2004년 오랜 미국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심각한 재정난과 부채에 시달리던 대한당구연맹의 회장을 맡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회를 열고 후원을 받아 당구연맹을 제자리로 이끌었던 이 전 회장은 김경률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스타 플레이어' 육성 정책을 펼쳤다.

이 전 회장은 김경률을 전국으로 직접 데리고 다니면서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당구투어'를 개최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전 회장의 추천으로 김경률은 몇몇 당구업체의 후원을 받을 수 있었고, 그는 난생 처음 가슴에 패치를 달고 세계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국내 톱클래스 선수 중에는 김경률과 같은 케이스로 이 전 회장의 추천을 받아 업체의 지원을 받은 선수들이 여러 명 있었다.

그러나 김경률은 전국구 선배들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세계 제패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홀로 월드컵에 출전했고, 그 결과로 한국 당구가 세계로 나가는 물꼬가 트이게 되었다.

이렇게 3년의 세월이 흘러 김경률은 한국 당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에 선발된 그는 첫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준결승에 올랐다.

당시 준결승에서 전성기에 있던 베트남의 즈엉안부에게 38:40으로 아깝게 패해 동메달에 머물렀지만, 아시아권 캐롬 강국 일본과 베트남 등의 세계적인 선수들을 압도하는 경기력으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태극마크를 단 한국 당구선수 최초로 2008년 10월 4일 수원 당구월드컵에서 월드컵 결승 무대를 밟았던 김경률은 2010년 2월 21일 터키 안탈리아 월드컵에서 결승에 다시 올라 딕 야스퍼스와의 리턴 매치에서 승리하고 역사적인 우승을 기록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 태극마크 가슴에 단 최초의 월드컵 챔피언

김경률은 같은 해 그리스 볼로스에서 열린 3쿠션 당구월드컵에 서 처음 4강에 입상했다.

다음 해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도 4강에 오른 그는 2008년 첫 번째 월드컵인 네덜란드슬루이스낄 대회(1월)와 포르투갈 포르토 대회(7월)에서 연속해서 4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어서 8월 열린 멕시코 이라푸아토 대회에서도 8강에 올랐다. 8강에서는 세계 최강 프레데릭 쿠드롱(벨기에)에게 세트스코어 2-0으로 앞서 있다가 2-3의 아쉬운 역전패를 당했지만, 이미 김경률은 지난 2007년 세계 랭킹 7위에 올라 명실상부한 세계 톱랭커로 인정받고 있었다.

2008년 10월 4일 경기도 수원에서 열린 당구월드컵에서 김경률은 사상 첫 결승에 진출했다.

준결승에서는 직전 대회에서 쿠드롱에게 당한 패배를 3-2로 설욕하기도 했다.

당시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와의 결승전은 최고의 빅매치였다. 1, 2세트 를 6:15로 모두 내줘 0-2 패색이 짙었던 김경률은 3세트에서 15:13으로 승리하더니 다시 4세트도 15:13으로 승리해 2-2 동점을 만들었다.

마지막 5세트를 다시 6:15로 야스퍼스에게 내주면서 패하기는 했지만, 이날 김경률이 월드컵 결승 무대를 밟았던 것은 한국 당구선수로는 '최초의 월드컵 결승행' 기록이었다.

2009년 다시 열린 수원 월드컵에서도 4강에 오른 김경률은 몇 달 후 꿈에 그리던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2010년 2월 21일 터키에서 열린 '안탈리아 당구월드컵' 결승전에서 김경률은 야스퍼스와 리턴매치를 벌였다.

이번에는 결과가 달랐다. 1세트를 야스퍼스가 15:13으로 승리했지만, 2세트부터 김경률이 15:7, 15:11로 승리해 2-1로 달아났다.

4세트를 야스퍼스가 15:2로 승리하며 승부는 2-2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지막 5세트에서 김경률은 후반으로 갈수록 야스퍼스를 압도했다.

14-8 까지 달아나 첫 월드컵 우승이 눈앞에 놓인 상황에서는 좋지 않은 포지셔닝 때문에 과감한 앞돌려치기를 선택했다.

결국, 김경률의 샷은 득점에 성공했고 한국 당구선수로는 최초로 태극마크를 가슴에 달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김경률은 한국 당구선수로는 최초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고, 10년 동안 세계 랭킹 '톱12'에서 한 번도 밀려나지 않는 유일한 비유럽권 선수, 아시아 선수 중에서 현재까지 최다 입상 기록(10회)을 보유 중이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 당구를 '완생'으로 거듭나게 만든 선구자

월드컵 챔피언에 오른 1년 만인 2011년 2월 터키 트라브존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김경률은 다시 한번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 에디 멕스(벨기에)에게 아깝게 0-3 패배를 당했지만, 김경률의 세계 랭킹은 2위까지 치솟았다.

당시 한국 당구선수로는 가장 높게 올라간 세계 랭킹이었다. 그 해 말에 이집트 후르가다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했고, 이후 2년 동안은 순위권에 입상하지는 못했지만 꾸준하게 세계 랭킹 10위 안에서 활약했다.

그의 생애 마지막 월드컵 입상 기록은 2014년 2월 터키에서 열린 트라브존 월드컵 공동 3위다.

김경률은 2014년 12월 열린 이집트 후르가다 당구월드컵에 마지막으로 출전했다. 당시 세계 랭킹은 9위였고 32강전에서 홍진표(대전당구연맹)를 30이닝 만에 40:31로 꺾고 16강에 올랐다.

그가 생전에 뛴 월드컵 마지막 상대는 한국의 황형범( 울산당구연맹). 김경률은 16강전에서 황형범에게 15이닝 만에 19:40으로 패했다.

2015년 2월에는 매년 초에 터키에서 열리던 당구월드컵이 열리지 않았고, 김경률은 2015년 2월 22일 설 명절 마지막 날에 본인의 생일을 하루 앞두고 뜻밖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김경률은 2003년 당구선수가 된 이후 수많은 국내외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3쿠션 세계 최강자들이 실력을 겨루는 무대 '3쿠션 당구월드컵'에 출전하기 시작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무려 10여 년 동안 세계 랭킹 '톱12' 밖으로 밀려나지 않는 기록도 세웠다.

이 기록은 비유럽권 선수로는 당구 역사상 김경률이 유일하다. 김경률은 당구월드컵에서 우승 1회, 준우승 2회, 공동 3위 7회 등 10회 입상했다.

미국 국적으로 선수 생활을 했던 이상천(15회 입상)을 제외하고는 아시아 선수로는 최다 입상 기록이기도 하다.

80년대와 90년대 초반까지 활동하며 세계 당구 최강자들과 어깨를 나란히했던 일본의 고모리 준이치(9회), 고바야시 노부아키(8회)보다도 앞선 기록이다.

지금 한국 당구는 김경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김경률은 생애 남긴 업적은 물론, 훌륭한 인성과 성실한 훈련, 끈기있는 도전정신으로 모든 선수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김경률 이전의 당구가 미생의 스포츠였다면, 김경률 이후 당구는 완생으로 가는 스포츠로서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많은 당구인들은 '한국 당구의 기둥' 김경률이 있었기에 지금 대한민국 당구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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