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년 GAISF 총회에서 '1년 유예 후 가맹 재논의' 결론 난 당구... 뜻밖의 절체절명 위기에 놓여

<한국 당구 130년사 '이슈별 당구사 바로 알기'>는 한국에 당구가 전파된 이후 130년 동안 어떻게 당구 문화가 자리 잡았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스포츠가 되었는지를 되짚어 보는 칼럼입니다. <빌리어즈>가 30년간 취재한 기사와 수집된 자료, 당사자의 인터뷰에 근거하여 김기제 발행인이 집필하며 매주 토요일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lobal Association of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s : GAISF)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함께 국제 경기단체를 총괄하는 기구다.

GAISF 가맹은 당구가 올림픽 종목 채택을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필수적인 관문이었다.

세계 스포츠계는 크게 1894년 프랑스 파리에서 고대올림픽의 전통과 이념을 따라 올림픽 경기대회 개최를 4년마다 주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IOC와 1967년 스위스 로잔에서 국제경기연맹간의 긴밀한 협조와 공동이익 추구, 모든 스포츠 경기의 기술적인 운영을 담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GAISF 두 단체가 이끌고 있다.

당구는 92년에 세계스포츠당구연맹(WCBS)을 창설하고 IOC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정가맹을 이루기까지 6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IOC는 당구의 회원 자격 부여 조건 중에 WCBS가 GAISF 정가맹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권고하는 사항을 포함했다.

말은 권고 사항이었지만, 사실상 필수 조건이나 다름없었다. WCBS가 GAISF의 승인 단체가 되지 못하면 IOC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당시 관계자들의 견해였다.

GAISF에 가맹되어 있는지 여부는 스포츠로 인정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GAISF에는 92개 스포츠 종목의 국제경기연맹이 가맹되어 있는데, IOC는 세계 최고 권위의 스포츠 국제종합경기대회 올림픽에 이들 92개 종목 중 28개 종목을 선별하여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따라서 당구가 올림픽 정식종목에 채택되기 위해서는, 바로 당구를 총괄하는 WCBS가 GAISF 정가맹 승인을 받는 것이 첫 번째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당구 종목을 총괄하는 세계스포츠당구연맹(WCBS)에 회원 자격 부여 조건으로 국제경기연맹총연합회(GAISF) 정가맹 조건을 충족시키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94년 몬테카를로 총회에서 뜻하지 않게 WCBS의 GAISF 정가맹 안건이 1년간 재논의를 거치기로 결론이 나면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사진은 이듬해인 95년 10월에 서울에서 열린 'GAISF 서울 총회' 전경. 빌리어즈 자료사진

낙관했던 94년 GAISF 총회에서 뜻하지 않은 1년 유예 떨어져
당구가 스포츠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실상의 최후 도전

세계 당구 관계자들은 80년대 초반부터 노력하여 당구 종목을 올림픽에 채택시킬 목적으로 WCBS 창립을 준비했지만, 캐롬과 포켓볼, 스누커 등의 단체가 하나로 규합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92년 1월 25일 스위스에서 창립총회를 성사시키면서 마침내 당구의 세부 종목을 아우르는 국제경기연맹 WCBS가 결성되었고, WCBS는 창설과 동시에 IOC와 GAISF, 올림픽 등의 목표를 향해 본격적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WCBS는 창설 이듬해 93년 핀란드 라티에서 열린 GAISF 총회에 옵서버(참관인)로 처음 초청되는 성과를 내었다. 물론, 라티 총회에서는 '당구의 GAISF 가맹 안건'이 상정되지는 않았다. 

다만, WCBS 대표로 참석했던 앙드레 가뇨 회장과 요르겐 샌드맨(세계포켓볼협회 회장) 등이 세계 스포츠계의 흐름을 읽고 GAISF 가맹을 이뤄낼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뇨 회장 및 관계자들의 끈질긴 노력 끝에 94년 10월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열린 GAISF 총회에서 당구의 GAISF 가맹 안건이 처음 상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WCBS의 올림픽추진위원장을 맡았던 미국의 당구대 제조사 브런스윅(Brunswick) 짐 바클러 회장을 위시한 임원들이 여러 루트로 로비를 전개하며 정가맹 안건 통과를 추진했지만, 당구의 GAISF 가맹은 아쉽게도 부결되었다.

세계유도협회를 비롯한 몇몇 종목 단체장들이 당구가 스포츠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나타나면서, 94년 총회에서는 향후 1년 동안 토론을 통해 당구 종목의 가맹 여부를 결정하자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뜻하지 않은 유예 기간이 생기게 된 것.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1년이라는 시한부 조건까지 발등에 떨어진 당구는 남은 시간 동안 WCBS를 중심으로 총력전을 펼쳐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95년 GAISF 총회에서 안건이 부결된다면 당구 종목은 IOC 권고 사항이었던 GAISF 정가맹 기준을 충족하는 것이 사실상 어려워지게 되고, 세계 당구인들이 당구를 스포츠로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한 IOC 정가맹 역시 동시에 물거품이 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94년 뜻하지 않은 안건 부결과 1년간의 최후 통첩을 받았던 당구는 95년 서울에서 열린 GAISF 총회에서 극적으로 정가맹 안건이 통과하면서 3년 뒤인 98년 2월 5일 IOC로부터 가입 승인을 받게 되었다. 한국 당구인들은 서울 총회에서 WCBS의 정가맹 안건이 통과할 수 있도록 세계 당구인들과 의기투합해 세계 스포츠계 설득에 나섰다. 사진은 <빌리어즈(월간 당구)>에서 보도했던 95년 11월호 특집 기사. 빌리어즈 자료사진

95년 서울에서 총회 개최된 것은 '호재'
韓 민영길∙홍영선∙권오철 등 세계 당구인들과 의기투합

95년 제29차 GAISF 총회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개최되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GAISF 회장직은 세계태권도연맹(WTF) 총재인 김운용 IOC 수석부회장이 맡고 있었다.

김운용 총재는 86년에 GAISF 회장이 되었는데, 10주년이 되는 해인 95년에 아시아 지역에서 최초로 개최되는 'GAISF 서울 총회'를 성사시켰다.

당구는 95년 서울에서 총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 호재로 작용했다.

WCBS는 92년 창립 당시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 양태주 회장을 스위스로 초청해 한국과 처음 친분을 쌓았던 것을 계기로, 당구가 세계 무대에서 스포츠로 인정받는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95년 서울 총회에서 한국 당구계가 내밀히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국 당구계는 WCBS의 요청에 발빠르게 대응하여 민영길 전 대한당구연맹 회장과 거산산업(허리우드의 전신) 홍영선 대표, 한밭큐 권오철 대표 등이 전방위적인 세계 스포츠계 설득 작업에 큰 힘을 보탰다.

서울 총회가 개최되기 3개월 전인 95년 7월 BCA 당구박람회가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렸다. 한국에서는 홍영선 대표가 미국으로 건너가 세계 당구인들과 힘을 모아서 마지막 박차를 가했다.

미국에서 세계태권도연맹 조지아 핸슨 부총재와 만난 한국의 홍영선 대표와 세계포켓볼협회 요르겐 샌드맨 회장은 이 자리에서 "WCBS가 이번 서울 총회에서 가맹될 확률은 80%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당시 71세였던 핸슨 부총재는 김운용 GAISF 회장과 절친한 친분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상당한 신빙성이 있었다.

그러나 낙관적이었던 지난 94년 몬테카를로 총회에서 뜻밖에도 몇몇 회원이 반대 의견을 내면서 당구의 GAISF 가맹이 1년이나 딜레이된 것은 물론, 마지막 시험대에 오르는 최악의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장담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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