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부의‘비정상을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는 대대적인 정화작업 바람이 스포츠계에도 강하게 불고 있습니다.이 정책 시행 방침에 따라 지난해 8월부터 5개월간 전국 2,099개 단체에 대한 대규모 특별감사가 이뤄졌고, 그 감사 결과를 지난 1월 15일 문화체육관광부 김종 제2차관이 발표했습니다.“총 337건의 비리 사실을 적발, 이 중 10개 단체를 수사 의뢰(고발 19명)하고 15억 5,100만 원을 환수 조치하기로 했다”고 밝혔습니다. 수사 의뢰 조치된 단체는 대한야구협회, 대한배드민턴협회, 대한배구협회, 대한공수도연맹, 대한씨름협회
대한스포츠당구협회, 대한체육회 준가맹 단체로 승격2000년 11월 12일 부산에서 개최된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총회에서 스쿼시와 함께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의 종목으로 채택된 당구 종목 경기를 잘 치르기 위해서는 대한스포츠당구협회를 대한체육회 인정 종목에서 정가맹 종목 경기단체로 격상시키는 것이 급선무였다.대한스포츠당구협회 김영재 회장은 새해 2월에 있을 대한체육회 정기 대의원총회에 98년 인정 종목 가맹 후 3년 차 되는 2001년에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무국 직원들을 독려하여 체육회가 요구하는 준가맹에 필요한 요건
부산 아시안게임의 성공 개최와 최고 성적을 목표로부산 아시안게임의 종목 탈락 위기에서 천신만고 끝에 37개 개최 종목 중 막차를 탄 당구는 1년 10개월 앞으로 다가온 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해야 할 준비와 개최국의 홈어드벤티지를 살려 최고의 성적을 거둘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이에 대한당구연맹은 부산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와 긴밀히 연계하며 타임 스케줄에 따라 당구 종목이 이행해야 할 사항에 대해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대처해 나가는 한편, 최고의 선수 선발과 훈련 계획을 짰다.그런데 당구 경기는 앞 대회인 방콕 아시안게임 때와 같이
37억 아시아인의 대축제, 제14회 부산아시아경기대회의 37개 종목 중 한 종목으로 참가하는 당구 경기는 10월 1일부터 8일까지 동주대학교 특설경기장에서 열렸다. 전체 44개 참가국 중 22개국 총 137명의 선수가 캐롬, 포켓볼, 스누커, 잉글리시빌리어드 종목에서 각 10개의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걸고 국가대표로서 열띤 경합을 벌였다. 캐롬 3쿠션에서 황득희 금메달, 이상천 은메달 획득캐롬 3쿠션에서는 한국의 이상천, 황득희와 일본의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시마다 아키오, 히다 아키라의 4파전이 예상되었다.황득
수구 진로 B-A(-D)수구와 제1적구 거리 69cm배점 7점이번 문제는 역회전 끌어치기다. 정해진 배점은 7점짜리 문제지만, 사실 5점 정도의 문제에 불과하다. 4구 점수 2~300점 정도만 돼도 쉽게 끌어칠 수 있는 문제다. 단, 수구와 제1적구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에 큐가 곧게 뻗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당점을 약 7시 반 방향에 두고, 1적구의 두께는 97% 정도로 보면 된다. 물론 정확히 97%의 두께로 칠 수는 없지만 그런 느낌을 가지고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큐의 각도는 뒤가 들리지 않도록 일직선을 유지하고,
■ 한국계 30대 여성 신디 리, 드래곤프로모션 새 대표로 한국 포켓볼 지원에 더욱 박차 가해 드래곤프로모션이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찰리 윌리엄스(한국명 김현호)의 모국 사랑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는 선수 출신으로서 비즈니스 면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후원자로서 같은 한국 동포인 신디 리(Cindy Lee)를 소개받아 드래곤프로모션을 이끌어줄 것을 부탁했다. 신디 리는 6살 때 미국으로 이민 가 시카고에 거주하는 30대 초반의 여성으로서, 포켓볼에 관해 잘 알지는 못했으나 찰리 윌리엄스의 열정에 끌려 이 사업에
[주] 이 항목의 글은, 조동성 씨의 (1980년 발행)에서“우리나라의 당구사는 1909년 황실에서 시작”이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한국 당구의 기원을 확정한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다시 변개(變改)하는 것이므로 참으로 조심스럽다.그러나 조동성 씨가 를 집필할 당시 이후로 당구에 관한 역사적 고증자료들이 속속 발굴되어 당구의 기원과 역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따라서 필자로서는 한국 당구의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여 현 당구계와 후대에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입장과 책임감에서 이 글을 역사
[주] 이 항목의 글은, 조동성 씨의 (1980년 발행)에서 “우리나라의 당구사는 1909년 황실에서 시작”이라는 내용에 근거하여 한국 당구의 기원을 확정한 기존의 역사적 사실을 다시 변개(變改)하는 것이므로 참으로 조심스럽다.그러나 조동성 씨가 를 집필할 당시 이후로 당구에 관한 역사적 고증자료들이 속속 발굴되어 당구의 기원과 역사를 다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따라서 필자로서는 한국 당구의 올바른 역사를 정립하여 현 당구계와 후대에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는 입장과 책임감에서 이 글을 역사
기록상 처음으로 당구를 친 사람은 순종과 고종한국의 당구 기원이 1884년 9월 20일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처음 조선에 들어오면서 인천(당시 제물포)의 한 오두막 호텔에 설치된 당구대 위에서 새우잠을 잤던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새로 밝혀졌다.그 이후 당구는 개화기 외국 세력들의 각축장이 된 서울 중심의 외교구락부에 설치되어 각국 외교관들의 교류와 여가 이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다가 마침내 퇴위한 임금들의 여가 선용과 건강 유지를 위해 궁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아들 순종이 1912년 3월에 일본에서 당구대 2대를 구
나는 지난해 본지 6월호를 통해“한국 당구의 기원은 1909년이 아닌, 그보다 25년 전으로 앞당겨 써져야 한다”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은 한국 당구계의 거목인 조동성 씨가 1980년 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 당구사의 시작을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이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서 어용 옥돌대 2대를 구비해 여가 선용과 건강 유지를 위해 애용하였다는 (1920년 발행)에 근거하여 1909년을 기원으로 해왔던 종전 당구사를 완전히 변개하는 내용이다.그러나 조동성 씨의 저서 발간 이래 지난 30
태평양전쟁 발발까지 한국의 당구 안정적으로 발전초창기 한국의 당구 고점자들로는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와세다 대학 출신의 인텔리 임정호가 한국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무궁헌당구장’을 개업했던 1924년 무렵에는, 궁중에 출입하며 순종의 당구대 관리와 개인지도를 했다고 전해지는 전상운의 제자로 알려진 김효근이 300점(현재의 1,000점), 명월관 대표 이시우가 300점을 쳤다.그보다 한참 이전인 1915년에는 ‘키노시타 초키치’라는 일본 이름을 가진 ‘조선말 못하는 조선 사람’이 500점(지금의 1,500점 이상)을 친 것으로 기록에
‘낭화헌당구장’의 명성은 ‘어성당구장’이 이어 받고다시 ‘대한당구장’으로해방을 맞아 해외에서 귀국한 박수복, 최용, 김창섭, 김정환과 일본 강제징병에서 돌아온 조동성 그리고 국내파인 방용하, 장수복, 이한종, 최기창, 김명호 등 당구인들이 모여 서로 실력을 겨루며 시국담을 나누던 곳이 ‘낭화헌당구장’이었다.그러나 일제 때부터의 오랜 역사를 가진 이 당구장은 해방 당시의 30여 곳이 양풍의 새 풍조로 술집, 다방, 댄스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절반으로 줄면서 1년 뒤에 다방으로 바뀌었다.그리하여 그 명성을 다음으로 이어 받은 곳이 서울
우리 한국 당구계의 세계적 스타 김경률 선수는 35세라는 젊디젊은 나이로, 모든 당구인들의 기대를 뒤로 하고 비통하게도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지난 2004년, 한국 당구를 이끈 세계적인 스타 선수 출신인 이상천 대한당구연맹 전 회장이 51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위암으로 타계한 후, 이상천 전 회장의 후계자인 ‘한국 당구의 선구자’ 김경률 선수를 잃는 안타까운 일을 당했으니, 우리 당구인들은 너무 가슴이 아프다.지난 2003년 SBS 당구대제전이 시작된 2월, 서울시당구연맹에 선수등록을 한 김경률 선수가 8월 열린 3차대회와 10
이슈별 당구사 바로 알기세계 챔피언이 모국 당구 사랑을 몸으로 실천이상천 선수는 1987년 그의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피나는 노력 끝에 미국 내셔널리그 챔피언에 올라 여러 해 동안 그의 아성을 지켰으며, 마침내 1993년에는 그가 목표했던 3쿠션 세계 챔피언에 등극한 한국이 자랑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그는 미국 뉴욕에서 대형 당구클럽을 개업하여 매년 세계 상위 선수들을 초청하는 ‘상리 캐롬 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제적인 당구 비즈니스에도 성공함으로써 세계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있었다.그런 그가 2003년 1
이완용의 사저에 당구대를 설치하여 아들과 조카가 당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벼락이 때려 정원의 고목을 분질렀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이 저택은 후에 명월관 분점으로 바뀌어 기미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사건으로 영업정지를 당했다.개인 사저에 당구대가 설치된 최초의 기록, 역사로 조명한다명월관 인사동 분점은 원래 중종반정 때 공신 구수영의 집이었는데 후일 안동 김씨 김흥근의 소유가 되었다가 헌종의 후궁 경빈 이씨의 순화궁이 되었다. 그러다가 순화궁이 이전하게 되자 이완용이 소유하게 된 것이다.이 집에는 태화정과 부용당이라는 아
국민생활체육 전국당구연합회가 부정・비리 의혹과 관련하여 사무처장을 파면한 이후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보노라면 참으로 우려되는 마음을 금치 못한다. 지난 10월 16일 진상조사위원회 조사를 심의한 이사회가 사무처장을 파면 처분을 했는데,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엉뚱하게 박종화 회장에게 돌린 이사들과 일부 대의원들이 박 회장에 대한 불신임을 염두에 둔 집단 행동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그 진행 과정을 보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박 회장이 회장 취임시 사무처에 제출하여 보관 중인 개인 신상정보가 유출되어 대
2006년에는 국제대회 3회, 국내대회 1회 개최브런스윅과 제휴하여 한국 포켓볼 중흥에 불을 지핀 드래곤프로모션은 2006년에도 연초부터 일본 포켓볼 선수들을 초청해 한국 선수들과 대결을 펼치는 이벤트를 만들었다. 2월 11일과 12일에 인천시 중구 항동의 파라다이스호텔에서 ‘한국 vs 일본 포켓볼 팀 대항전’이라는 타이틀의 대회를 열었다. 일본팀 멤버는 지난해 이 대회 시리즈의 서울 오픈에서 우승한 바 있는 일본 랭킹 1위 히로시 다케나카, 일본 랭킹 3위인 쇼지 나카타, 일본 랭킹 2위의 고 다카미와 여자 선수로 미국 WPBA에
지난 한 해는 당구계로서는 발전과 혼란이 혼재하는 복잡한 해였다. 그간 당구계가 외연(外緣)을 넓히기 위해 많은 수고를 하기는 했지만, 당구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의 고착으로 기업의 지원을 받아 실업팀을 구성하는 일이나 큰 대회 개최를 위한 스폰서십의 유치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세월 당구인들의 노력으로 당구에 대한 인식 변화와 국민들의 호감이 살아나 대기업들도 서서히 관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었다. 지난해에는 대한당구연맹이 유치한 스폰서십도 큰 액수로 증가했는가 하면, 빌리어즈TV를 비롯한 방송권 계약도 금액이 크게 상승
2014년 ‘청마의 해’가 밝았습니다. 60년 만에 오는 청마의 해가 어느 때보다도 반갑습니다. 1954년이었던 60년 전 청마의 해에는 60년 뒤의 이런 세상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그해 대한민국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서민들은 끼니를 걱정할 만큼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살기 위해 살아가는 삶이 고단하여 지키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럼 60년 만에 다시 맞는 청마의 해는 어떻습니까? 불황의 여파로 세계 경제가 어렵고 여느 때처럼 사회가 시끄럽긴 하지만, 식민화의 전초가 된
미국에서 1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온 이상천 선수는 대한당구연맹 회장으로 추대되어 한국 당구의 새로운 변화를 과감하게 추진하던 중 안타깝게도 그의 꿈을 다 펼치지 못하고 위암으로 타계하고 말았다. 이상천이 당구와 맺었던 마지막 인연은 한국 당구 스포츠화의 튼튼한 토대가 될 수 있었다. 대한당구연맹 제4대 회장으로 추대 이상천 선수가 2003년 11월에 미국에서 귀국해 한국 당구의 발전과 활성화를 위해 발 벗고 나서 추진한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국당구대회’는 2004년 한국 당구계를 후끈 달궜다.전국 각 지역에서 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