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학 국회부의장이 회장 맡아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을 치른 후 피란생활에 수복을 한 당구인들은 1955년도에는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다. 당구장 숫자도 만이 늘고 당구계도 서서히 질서가 잡히면서 당구인들 간에는 당구를 발전시키기 위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당시 정치인들, 특히 집권당인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당구를 아주 좋아해서 틈 나는 대로 당구장을 출입하며 당구인들과 어울리기를 즐겨 하였다. 그때 그들의 당구 실력은 자유당 국회의원인 김익기 의원이 300점, 하태환 의원 150점, 김재황 의원 150점, 민관
■ 2007년과 2008년은 대한당구연맹 제6대 이유병 회장 집행부에서 진행대한당구연맹 제5대 민영길 회장이 당구용품생산업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선수 출신 대의원들과 갈등 끝에 사퇴한 후 3개월여 만인 2007년 2월에 이유병 회장을 6대 회장으로 선출함으로써 앞으로의 MBC ESPN 시리즈 대회는 그의 집행부에서 주최·주관하게 되었다. 첫 대회는 ‘MBC ESPN 큐스포츠 한국 당구 슈퍼 토너먼트’의 타이틀로 2월 26~27일 이천시 미란다호텔에서 개최되었다.이 대회는 보름 전인 2월 10~11일 강원도당구연맹이 춘천에서 주
6ㆍ25 직후의 당구계 상황을 안다는 것은 기록이나 또는 당시를 살았던 원로 당구인의 전언을 통해서만 가능하나, 불행히도 우리 당구계에는 그런 기록은 거의 없고 당시에 활동했던 당구인들의 입을 빌려 들으려해도 너무 때가 늦은 것 같다. 그런데 가 1987년 2월에 창간호를 발간한 후 그 다음 해에 6ㆍ25 직후 승리기업사의 대표로서 최초의 국산 당구대를 생산하는 한편 대한당구선수회를 조직하여 한국 당구 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한 방달성을 필자가 만나게 되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최초의 당구 잡지를 발행한 분으
1990년도의 스파 세계3쿠션선수권대회는 10월 11일부터 4일간 개최되었다. 이 해에는 한국에서 나용훈이 유일하게 자비로 참가하였으며, 미국에서 얼마 전 1990년 내셔널챔피언십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이상천이 다시 출전하여 나용훈의 든든한 동반자 역할을 해주었다. 이상천은 올해로 네 번째 스파 대회에 참가하고 있어 대회에 관한 정보와 그곳 지리며, 호텔을 잡는 일 등 숙식에 관한 제반 문제에 대해 이상천이 큰 의지가 되었다.이상천은 이즈음에 3년간의 미국 생활로 영어에 능숙하여 각종 세계 대회에 출전하여 각국 선수들과 소통하는 데
한국이 낳은 당구천재 이상천은 1979년 7월 전국당구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81년, 1982년, 1984년, 1985년 전국대회를 석권하였다.이제 그가 꿈꾸는 목표는 한국과 아시아가 아닌 세계 무대로 나가 세계 당구를 제패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의 한국 당구가 일본에 예속되어 있다시피 하여 일본을 통하지 않고는 세계무대에 진출한다는 것이 사실상 어려웠으므로, 이 길을 벗어나서 세계로 나가는 직행 코스는 세계 당구 기구가 주최하는 대회에 참가하여 두각을 나타내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1987년 10월, 이상천은 벨기에의
2016년 한 해는 국가적으로 측근의 국정농단으로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소추를 당하는 등 불행하고 혼돈스러운 해였습니다. 그 여파는 새해로 이어져 헌법재판 소의 탄핵심판 심리가 계속되고 있어 앞으로 어떤 결론이 내려진다 해도 사회 혼란은 잦아들지 않을 것 같아 국민들을 불안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 당구계는 어떤가. 작년의 당구계는 당구단체에 종사하는 자들이 선량한 수임자의 역할을 외면하고 단체에 기식(寄食)하면서 국가지원금과 후원금을 횡령 착복한 사실이 각종 미디어에 보도됨으로써 당구계를 얼룩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들은 지난해에 깨끗하게 마무리되지 못하고 엘리트 당구와 생활체육 당구가 통합된 지금 현재에도 사법기관과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한국 당구 132년 역사상 올해만큼 중요하고 복잡다단한 해도 드물었던 것 같다. 특히 정부의 체육정책의 일환으로 대한체육회 산하의 엘리트 체육과 국민생활체육회의 생활체육이 하나로 통합되어 새로운 단체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당구계도 대한당구연맹과 국민생활체육 전국당구연합회가 통합의 어려운 진통 끝에 어렵사리 사단법인을 이루고 대한당구연맹의 새 단체로 등록되었다. 이 통합의 길에는 너무나 난관이 많았고, 당국의 통합설립기획단조차 당구 단체의 통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이유 중의 가장 큰 것은 비리와 내분이다.
이상천의 사후에 BCA(미국당구협회)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함으로써미국이 그의 위대성을 인정하였다 ■ 이상천 타계 후 2년 5개월 만에 2007년 ‘명예의 전당’ 위대한 선수 부문 입회자로 선정 불세출의 당구천재 이상천(미국명 Sang Lee)이 그의 생애 전성기를 보냈던 미국에서 그 위대성을 인정받았다. BCA(미국당구협회)는 2007년 3월 3일(한국시간) “1990년부터 12년 연속 미국 당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한 한국 출신 이상천 씨가 2007년 ‘명예의 전당’ 위대한 선수 부문 입회자로 선정되었다.”며 “5월 15일(한국시간
가 창간되던 1987년에는 당구장은 숙박업과 함께 위생접객업으로서 「공중위생법」의 적용을 받는 유기장업의 한 종목이었다. 당구인들, 특히 당구경기인들은 국가의 당구에 대한 이런 푸대접에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다가 가 창간되어 ‘당구의 스포츠화’의 기치를 높이 들자 이를 계기로 국회에 청원을 하고 그런 결과 마침내 1989년 7월에 당구장이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게 됨으로써 스포츠 종목으로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후에도 당구장 경영자단체인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에 선수국으로 소속되어 있던 경기인들이 독자적인 경기인단체를 만드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렸으며, 대한스포츠당구협회가 대한체육회 산하의 인정종목 경기단체로 가맹된 것
2) 2000년 10월 시작한 SBS스포츠 채널 주최의 ‘SBS배 한국당구최강전’ 1차대회~11차대회와 왕중왕전(2001년 10월)한국 당구계의 입장으로는 TV 당구 방영이 절실했음에도 불구하고 1995년 7월 김문장이 대한당구선수협회 회장을 그만둔 이후에는 TV와 당구경기를 연계한 기획은 어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모처럼 1999년 7월에 대한스포츠당구협회 제2대 김영재 회장이 취임하면서 백상영을 전무이사로 기용하여 2000년 2월부터 아리랑TV 주최 ‘아리랑 2000 전국 3C 최강전’을 매월 개최해 12월까지
선거를 보통 '민주주의 꽃'이라 표현한다. 선거는 방향을 설정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한 사회의 중심축을 만드는 첫 번째 과정이다. 그만큼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흔히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다'라고 표현한다. 자유의사를 마음대로 개진할 수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책과 방향에 서로 다른 주장들이 충돌하면 투표라는 수단을 통해 다수의 의견을 채택하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라 그 사회의 바람을 가늠하고 채택하게 된다.지금까지 체육계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대의원들에게만 선거권을 주고 회장을 선출해왔다.그러다 보니 협회가 사유화되고 비리가 생기며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부작용이 심해졌다. 그래서 정부는 체육단체가 통합되면서 체육계도 체육인들 다수의
지난 2009년 당시에 독일계 한국 국적의 연기자로 알려진 이참(62) 씨의 한국관광공사 사장 취임은 큰 이슈가 되었다. 이참 씨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에 임명되기 전까지 한국관광공사 사장이 누군인지 국민들은 관심조차 없었다. 그런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 오른 사람들 중에 이참 전 사장만큼 국민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던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관광공사는 이참 전 사장의 임명 자체만으로도 전 국민을 상대로 한국관광공사를 알리는 톡톡한 홍보 효과를 거두었다. 언론이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이참 씨의 행보를 언론이 관심을 갖는 이유는 드라마, 영화 등 안방극장과 각종 오락 프로그램을 통해 전 국민에게 알려진 유명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 당구 기업인 방달성 한국의 당구사는 당구장 경영주와 당구 치는 사람이 먼저 이름을 올렸고, 당구용품을 만들고 유통하는 사람들이 그다음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한일 합병 직전에 시작된 한국 당구사의 출발은 초창기에는 일본인들만의 전유물로 특권층에서만 할 수 있었고, 1920년대 이후 한국인이 경영하는 당구장이 생겼으나 모든 당구용품이 일본을 주도로 한 외국에서 수입됨으로써 한국의 당구용품 산업은 해방 이후 그것도 6.25 전쟁 후에 태동, 발전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서도 당구용품 생산에 대하여 가장 먼저
■ 재일동포 당구 명인 윤춘식 1920년에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윤춘식(일본명 : 타카키 쇼지)은 13세 때에 큰 뜻을 품고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 종업원으로 일하며 독학으로 공부를 하면서 당구에 매료되어 당시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던 미츠헤에게 사사, 마침내 일본 당구계에서 4구 모아치기(세리)와 예술구 분야에서 일인자로 군림하였다. 전일본 4구 선수권을 차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4구 몰아치기의 만점왕으로서 ‘세리 타카키’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일본 당구계에서의 위치는 확고하여 일본 당구의 유일 단체인 사단법인 일본빌리아드협회
한국 당구의 기원이 1909년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의 덕수궁 동행각 옥돌대에서, 새로운 역사 고증으로 이보다 25년 전인 1884년으로 수정됨으로써 한국의 당구역사는 올해로 133년이 된다.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이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국의 당구도 엄청난 변화의 과정을 겪어 왔다. 그중에서도 올해 2016년 3월에 정부의 체육단체 통합 방침에 의해 대한당구연맹과 국민생활체육 전국당구연합회가 사단법인 대한당구연맹으로 하나가 되어 발족한 사실은 당구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당구가 이제는 국가의 스포츠 대열에 참여해 엘리트 체육과 동호인 체육을 잘 아울러 융합함으로써 국가의 체육정책에도 기여하고, 당구 자체의 종목을 무한히 발전시킬
정부의 정책으로 추진하던 대한체육회와 국민생활체육회의 체육단체통합의 타임 스케줄에 의해 산하 가맹단체들의 단체간 통합이 지난 3월 27일로 끝나 새로운 체육단체인 대한체육회가 새롭게 출범하였다. 당구 종목도 대한체육회 산하의 대한당구연맹(회장 장영철)과 국민생활체육회 산하 단체인 국민생활체육 전국당구연합회(회장 박종화)가 이 시한에 맞추어 통합해야 했으나, 전국당구연합회의 복잡한 내부 사정으로 통합에 필요한 대의원 총회가 성립되지 않아 단체 통합을 이루지 못해 당구 종목이 제도권 체육에서 종목 퇴출당할 아슬아슬한 단계에서 극적으로
제1회 대회를 성공적으로 끝낸 본사에서는 제2회 대회를 다음 해에 이어가려고 했으나 경기 불황으로 당구 용품업체의 지원을 계속 받기가 어려웠고, 본사의 입장에서도 매주 동시다발로 열리는 지역예선전에 기자들이 입상 트로피와 상장, 부상을 지참하고 참관하여 기사를 작성한다는 것이 인력상으로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음 해 개최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후 2년이 지나도록 제2회 대회를 개최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반면 당구 동호인들뿐만 아니라 당구 계에서도 월간당구배 당구대회 개최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심심찮게 들려 왔다.
우리나라에 체계적인 전국당구대회가 열린 것은 1962년 사단법인 대한환경위생협회 내에 중앙당구분과위원회(대한당구협회의 전신)가 조직되어 그해 11월 7일 서울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제1회 전국당구대회가 개최된 것이 그 효시이다. 그 이후 이 당구대회는 거의 매년 개최되다가 65년에는 장충체육관에서 한일친선 당구대회와 겸하여 열렸고, 66년에는 중앙유기분과위원회를 사단법인 대한빌리아드협회로, 83년에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로 개칭하면서도 꾸준히 그 명맥을 이어 88년 10월의 제18회까지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 대회는 이로써 애석하게
문화체육관광부 스포츠비리신고센터의 당구 단체에 대한 감사 결과, 대한당구연맹과 국민생활체육 전국당구연합회 임원 및 직원들의 비리 혐의가 끝내 사실로 드러났다. 지난 2월 23일 MBC TV 밤 8시 뉴스와 같은 날짜 연합뉴스는,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대한당구연맹 전, 현직 임직원들이 2009년부터 4억9천여만 원을 횡령하고, 변칙으로 처리한 돈은 2억 원에 이르러 연맹 측 관련자 6명에 대해 징계를 요구하고, 5명은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였다”고 보도했다. 문체부 조사결과 이들은 가족 이름 등으로 계좌이체를 하는 수
혼란의 당구계 수습을 위한 소방수98년 1월 23일 대한스포츠당구협회가 대한체육회에 인정종목 단체로 승인되어 가맹이 이루어짐으로써 명실공히 당구의 스포츠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스포츠당구협회가 여기에 이를 데까지도 당구계는 이합집산의 많은 진통을 겪었다.그리고 가맹 이후에도 임영렬 회장의 집행부는 당구계 발전을 위한 대의(大義)를 실천하기보다는 대의원들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내부 분열을 초래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회장 취임 후 1년 1개월 만인 99년 5월 19일에 회장직을 물러나게 되었다.지난 1년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