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2월 22일은 한국 당구의 가장 슬픈 날이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우리는 잃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사람을 잃었다. 그의 죽음을 아직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잘 모르겠다. 강화의 한 추모공원에 그를 안치하고 돌아온 지금 이 순간까지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김경률 선수를 보내는 그의 가족, 전 세계의 당구인, 당구팬들이 같은 마음일 것이다. 우리가 그를 어떻게 보낼 수 있을까.

정말 보내고 싶지 않아서 끝까지 눈물도 참아보려 했다. 액자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영정 앞에 놓인 당구공과 큐를 보고 있으니 당구공 세 개만 있으면 10시간이든, 20시간이든 한없이 즐겁다고 너무 재밌다고 순박하게 웃던 얼굴이 떠올라 도저히 머리를 숙일 수 없었다.

김경률 선수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당구공과 큐밖에 없다는 사실에 미안함이 밀려왔다. 우리가 그에게 받은 게 너무 많은데,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

2년 전 즈음 한참 성적이 좋지 못했던 그와 행신동 인근에서 만나 점심을 했던 적이 있다. 3쿠션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 최초의 우승을 이룬 그는 2012년 아지피 빌리어드 마스터스 준우승 이후 성적이 계속 좋지 못했다. 그에게 ‘선수로의 비전과 김경률의 브랜드 가치’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한참 이야기를 듣던 그가 말했다.

“행님요, 내가 왜 사업을 하려는지 아십니까? 우승 상금 1억원짜리 대회 만들어서 선수들 좋게 해줘야지예. 쉽지 않겠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닙니까? 행님, 우린 평생 당구계에 남아 있을 사람 아닙니까?”

그가 돈을 벌고 싶어하는 이유는 그게 다였다. 김경률 선수는 이미 억대의 연봉을 받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충분히 훈련하면서 성적도 꾸준히 올리고 명성도 쌓아 독보적인 플레이어로 세계에 이름을 떨칠 수 있는 충분한 재능과 기량을 갖춘 그였지만, 김경률 선수는 자신보다는 우리를 먼저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위한 한 가지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우리를 위한 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 힘들까 봐 피하는 일이지만 마다치 않고 끝까지 우리에게 해주려고 했다.

김경률 선수와 함께 해보고 싶었던 게 있었다. 그와 같이 사진 한 장 찍어서 휴대전화에 저장해 두고 싶었다. 남자끼리 사진 찍는 걸 어색해하는 성격 탓에 끝내 하지 못했다.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면서도 항상 깍듯하게 대하는 그가 좋았다. 게다가 그는 김경률이었다.

한국 당구를 살린 김경률. 당구계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김경률에 대해 묻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당구를 전혀 모르는 장인어른이 그러셨고, 4구 80점 치는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동창놈이 그랬다. 기업체와 미팅을 해도, 언론사 선후배를 만나도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김경률 선수는 알았다. 그래서 휴대폰에 저장해 놓고 싶었다. 아쉽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이제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고 그와 함께하지 못한다. 그가 이렇게 갑자기 떠날 줄은 몰랐다. 그래서 더 슬프고 가슴이 아프다. 원고마감 때문에 계속 그의 사진을 보고 있는 것도 너무 힘들다. 글을 쓰는 것도 어느 때보다도 힘들다.

숱하게 화보를 찍었으면서도 그와 찍어 놓은 화보가 몇 년 전 사진들이라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평생 당구를 위해, 당구계에 남아 있자던 그에게 소홀히 대했던 것 같아 미안하다. 이렇게 미안한 마음으로 그를 보낸다.

어깨에 올려졌던 많은 짐들, 이제 좀 내려놓고 편히 쉬면서 그렇게 좋아하는 당구 온종일 실컷 치시게. 우리 잘 살 터이니, 걱정은 하지 말고 우리 사는 모습 하늘에서 지켜봐 주기를.

부디 영면하소서. 친구여.
 

 

빌리어즈 김주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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