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뿐인 황제에 불과했던 순종은 왜 당구를 쳐야 했을까.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놓인 두대의 옥돌대 <사진 = 빌리어즈 자료사진>

덕수궁에 옥돌대(당구대) 두 대가 놓였다. 순종은 인정전 동행각에 매일 드나들며 옥돌(당구)을 즐겼다. 

제가 가진 모든 권리를 내놓아야 했던 황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황제에게 옥돌을 권했고, 황제는 마지막 취미로 받아들였다.

이렇듯 순종과 당구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 속 한편에 자리 잡고 있다.

황제는 말한다.

“그러므로 짐이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와 시의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라”

남산에 터 잡은 통감관저로 향한 어가의 마지막 행차에 신민의 통곡과 울분이 담긴 굵은 비가 쏟아졌다. 

순종 3년이던 1910년 8월 29일 경술년의 그 날, ‘너희들 백성을 잊어서가 아니라, 진실로 너희를 구제하려는 정성 가득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순종의 마지막 포고문과 함께 신민은 식민으로 전락했고 조선왕조의 사직은 끝이 났다.

순종 황제

창덕궁과 덕수궁에 놓인 황제의 옥돌대

순종은 병약했고, 심약했다. 태생이 그리하였는지 내외의 핍박이 그를 그리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처참하게 시해당한 어미 명성황후와 강제 폐위된 아비 고종을 힘없이 지켜봐야 했던 아들이 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그는 스스로 고독했을 수도, 극악한 일제의 탄압에 의해 혹은 친일매국 대신들의 농간으로 뜻하지 않게 고독해졌을 수도 있다.

누구 하나 믿을 수 없고 의지할 수 없었던 고독한 황제는 그저 위로가 필요했을 뿐이리라.

국정을 내각에 맡기고 하명조차 무의미할 만큼 허울 좋은 황제에 불과했던 순종은 고독해지지 않을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실내운동을 겸하시라는 이완용의 진언을 윤허하고,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 일본 ‘닛쇼테이’에서 주문한 옥돌대 2대를 설치했다.

<매일신보>에서는 1912년 3월 1일 자 기사에 ‘이왕가 개설의 옥돌실’이라는 제목으로 보도사진까지 수록했고, 6일 뒤인 3월 7일 자에는 다시 ‘이왕전하 옥돌’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실었다.

“매주 월목 양 요일은 옥돌운동일로 정한지라 근경에는 동기에 심히 흥미가 유하사 정일 이외에도 동장에 빈번 어림하신다더라”

나라를 빼앗긴 순종 황제가 ‘창덕궁 이왕’으로 전락한 지 1년 반 뒤에 당구를 접하고 매일 오후 두 시부터 네 시까지 옥돌장에 드나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순종뿐만 아니라 ‘덕수궁 이태왕’으로 전락한 고종과 내신들까지 당구를 즐겼다.

<매일신보> 1913년 8월 29일 자에는 ‘이태왕전하 어환력연과 근상’이라는 기사에 다음과 같이 실렸다.

“아침에는 열한 시까지 함녕전 침실에서 취침하시고, 밤 두세 시까지 침실에 들지 아니하시는 고로 소견하시는 것을 덕흥전에 설비하여 놓은 옥돌장에 출입하사 공채를 잡으시는 일도 있고 전하께오서는 공치는 데 극히 재미를 붙이사 내전에서 여관들을 데리시고 공을 치게 하시고”

고종은 덕수궁 덕흥전에 옥돌대를 설치하여 궁중 여인들까지도 당구에 심취하게 했다.

13만 의병이 봉기하여 수없이 희생당하는 중에도 황제는 힘없이 여생을 소비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국권이 피탈되고 갈가리 찢긴 왕가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까, 일제와 매국노에 의해 사지를 결박당한 채 망국의 한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두 황제의 쓸쓸한 처지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매일신보> 1925년 6월 28일 자에는 순종의 불행한 삶을 표현한 기사가 실렸다.

“아홉 시 경에는 기침을 하시어….이왕세자전하에게 이른 문안글월을 하람하신 후 신문을 살피시다가 두 시가 되면 반드시 동행각 옥돌장에 납시어 친히 치시기보다 군신들에게 싸움을 붙이시고 바라보시어 그동안에 세상 이야기와 어친척들과 구신들의 지내는 형편도 들으시는 것이니, 전하에게는 이 시간이 가장 인간적으로 값있는 시간이라 하겠으며”

백성의 피가 스러지는 중에 조선의 황제가 궁에서 내신들과 때로는 일본인 관리들과 당구나 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는지, 이완용의 순종에 대한 한낱 측은지심이었는지, 아니면 순종 스스로 고독을 극복하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험난한 세월을 버티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고 옥돌대 앞에 선 오후 두 시부터 네 시까지 순종은 비로소 인간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술국치, 일제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보이는 순종 황제의 포고문

황제들의 어용 스포츠에서 민간에 전파

태생인 유럽에서부터 황제들이 즐긴 어용 스포츠였던 당구는 병자년에 체결된 강화도조약 이후 개항을 하게 되면서 일본에 의해 들어온 것으로 본다.

이보다 20여 년 전인 1850년에 네덜란드로부터 당구가 전해진 일본은 왕실과 귀족사회의 사교 놀이로 시작하여 대중적인 스포츠로 서서히 자리 잡고 있었다.

당구대를 직접 생산하여 수출하기도 했고, 당구선수라 불리는 이들이 조선을 방문하여 순종과 당구를 쳤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순종국장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외국에 옥돌선수가 경성에 이르기만 하면, 반드시 한 번씩은 인견하시옵시었다. 옥돌의 적수가 되는 사람은 전 창덕궁 경찰서장 야노인데, 결코 이기시려는 욕심이 없으시고 항상 어찌하면 재미있게 마칠까 하시는 고아하옵신 생각으로 옥돌판을 대하옵시는 터이라, 실력은 60에서 70 내외까지 이시었다 한다”

어용 옥돌대의 시설을 관리하고 순종에게 개인적으로 당구를 가르쳤다던 전상운 씨에 따르면 순종은 지금의 4구 150점에서 200점 정도의 실력이었다고 한다.

순종은 외모로 보아선 흠 잡을 데 없이 훤칠한 장부였으나, 선천적으로 체질이 약했고 승부욕이 부족하여 간혹 일본인 고관들과 경기를 하면 신사도에 너무 철저한 그의 고지식함이 약자의 연민인 양 비쳐 측근들이 민망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근대 동서양 황제들의 어용 스포츠로 왕가와 귀족 사이에서 각광을 받던 당구가 민간에 전파되는 계기는 ‘구락부(클럽의 일본식 음역어)’를 통해서였다.

이역만리 타향 생활을 하던 외교관들은 사교활동과 원활한 정보교환을 목적으로 구락부를 설치했다.

한국에 설립된 최초의 구락부는 1800년대 후반에 서울 정동 17번지에 있던 서울외국인학교 자리에서 외교관구락부로 출발했다.

당시 법어학교 교장이었던 에밀 마르텔의 회고록에는 당시 외교관구락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구락부는 매우 편리한 사교 기관이었고, 역소에 근무하는 자도, 상매를 하고 있는 자도 하루에 일과를 마치면 매일 저녁 그곳에 모여들어 당구를 즐기거나 트럼프 놀이에 흥을 내거나 혹은 도서 신문의 열람에 시간을 보내곤 하는 것이다”

이후에 잠시 해체되었던 ‘외교관구락부’는 ‘서울구락부’라는 이름으로 1912년 서울 정동 1-11번지에 있던 옛 수옥헌(중명전) 건물을 사용하며 부활했고, 현재는 서울 중구 장충동2가 208번지에 소재한 ‘서울클럽’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직원용 휴게실로 지금의 남산 입구에 ‘경성구락부’를(대지 약 2천 평에 2층 건물)를 세우기도 했다. 경성구락부에는 1층에 일반직원용 3대, 2층에는 고등관용 2대가 설치되었다.

1921년에는 의주로 관사촌과 용산 관사촌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영업 당구장이 문을 열었다.

당구 원로 고 조동성 씨는 “1923년에는 왜인촌에 있던 진고개(지금의 충무로2가)에 ‘파주정’이라는 당구장이 문을 열었다.

충무로1가 제일은행 본점 뒤에는 아사이당구장에 2대가 설치되었고, 한 게임마다 1인당 5전을 받았다. 만약 4명이 게임을 한다면 1등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이 5전씩 내어 15전을 요금으로 지불했다.

그 당시에 백미 한 가마가 3엔이 못되었던 때이니, 꽤 비싼 요금이었다. 해방 직후 1인당 8전씩 하다가 시간제로 받기 시작하였는데 당시 백미 한 말 값에 해당하는 1엔 20전씩이었다”고 술회했다.

한국인 중에는 1924년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 임정호 씨가 지금의 종로 조흥은행 건너편 자리에 ‘무궁헌’이라는 간판을 걸고 2대의 당구대로 영업을 시작한 것이 시초다.

주로 귀족 같은 특수 계급층과 종로에서 포목상과 양복점을 하는 부호들, 망토를 펄럭이는 일본인 유학생들이 이용했으며, 이들은 당구를 치고서 으레 명월관이나 국일관 등의 요정으로 달려가곤 했다.

금전에 구애받지 않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상류층이 주로 당구를 즐겼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가슴 아픈 한국 근대사에서 식민의 통한을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진 당구는 외교관, 관료, 상인들을 통해 훗날 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전해지며 이렇듯 시대상을 반영하고 대변한다.

창덕궁에 있던 옥돌대 두 대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순종이 국권을 잃은 그 날부터 마지막 승하하는 순간까지 그를 위로했다.

아쉽게도 현재는 원형이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인정전 동행각에 남아 있는 고독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가슴 아린 온기가 후대에 깊이 전해진다.


<빌리어즈> 김주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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