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캐롬연맹(UMB) 바르키 회장(사진 왼쪽)과 사단법인 대한당구연맹 남삼현 회장이 대회개최권을 두고 충돌하면서 세계 당구계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빌리어즈 자료사진


대한당구연맹(KBF)과 세계캐롬연맹(UMB)의 갈등이 좀처럼 풀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이 불편한 상황은 계속 이어질 듯하다.

게다가 더욱 비관적인 사실은, 설령 이 다툼이 단기간에 해결된다 해도 그걸로 깨끗하게 끝나는 게 아니라 마치 악성 무좀균처럼 구석구석에 질기게 잠복하고 있다가 언제라도 여건만 조성되면 재발하며 당구인들을 괴롭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갈등이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서 하는 말이고, 언젠가 구조 자체가 바뀌어야만 진짜로 해결되는 문제라서 하는 말이다.
 

통치와 관리의 차이

UMB와 대한당구연맹 두 단체는 모두 스스로를 각자의 영역에서 통치자 또는 지배자라고 생각해 왔다.

그걸 '자부심'으로 봐주기에는 조금 지나친 면이 있기도 하지만, 두 단체가 공히 당구의 '개척자'로서 맡은 바 사명을 다 하던 시기에는 이걸 굳이 허물로 삼을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당구단체의 '우리가 통치자'라는 자세는 벌써 큰 허물이 되었고 당구의 발전에 해까지 끼치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왜냐하면 당구가 지금도 여전히 개척기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며 그 시기는 이미 오래 전에 지나 이제는 지속적인 성장기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는 물론, 특히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필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구와 골프의 유사성을 말하곤 했다.

당구와 골프는 개척기에 유난스레 사회적 평가를 받지 못하며 함께 고생했던 점에서 같고, 정지해서 멈춰있는 공을 치는 특이한 종목이라는 점에서 같다.

또 상급자로 갈수록 정신을 제어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다는 심오함과 개인경기가 주를 이룬다는 점, 그리고 1950년까지는 둘 다 공격과 수비를 함께 겨루는 2인1조의 1대1 경기였고 심지어 우승상금의 액수조차 비슷했다는 점이 같다.

그렇게 비슷했던 골프와 당구가 왜 스포츠산업으로서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을까. 사행성 잡기에 불과하다며 손가락질까지 받던 골프가 최고 품격의 상류사회 스포츠로 화려하게 발돋움하는 동안 당구는 왜 그러지 못했을까.

우승상금 500만원 수준이던 골프가 우승상금만 무려 100억 수준의 대회로까지 성장하는 동안 도대체 당구는 왜 같이 발전하지 못했던 것일까.

 

이것에는 매우 중요한 구조적 원인이 있다

골프계는 오래 전에 운영구조를 '권한의 분산을 통한 협치 (governance ; 거버넌스)'로 구축함으로써 분업의 효율성을 한껏 살리며 산업성장의 탄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당구는 개척기 단계의 주먹구구식 통치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고 심지어 이 봉건시대적인 지배구조는 아직도 당구계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는 실정이다.

상급단체가 하급단체나 선수들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전체의 발전을 위해 서로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관리하는 기능적 분화로 진화하며 나아갔던 것. 바로 이것이 골프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 알앤에이: Royal and Ancient)는 골프에서 자타공인으로 최고의 권위를 가진 단체다.

골프의 탄생지이자 성지로 대접받는 스코틀랜드 세인트앤드루스클럽에 설치되어 있으며 대영제국 왕실로부터 근원적 권한을 인증 받은 유일한 단체로서 골프의 규칙도 바로 이 단체에서 만들거나 수정하여 세계 각국으로 전파해 왔다.

그래서 R&A는 말 그대로 골프의 '절대권력자'라고 할 수 있다. 

통치구조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권한은 곧 돈벌이다"라는 사고방식에 젖어서, 당구계 정비와 발전에는 마음 쓸 틈도 없이 누구나 더 많은 권한을 가지려는 경쟁에만 몰입해 있는 당구계 단체들은 어쩌면 R&A의 총수입이 제일 궁금할지도 모른다.

어마어마한 뭉칫돈이 오간다는 골프 판에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다니 수입이 얼마나 클까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R&A는 돈 되는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니다. 투어대회들을 직접 열지도 않고 선수들을 직접 선발하거나 관리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무려 1조원에 달하는 중계권 사업에조차 관여하지 않는다.

R&A는 오직 골프라는 스포츠가 그것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유지하며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각급 단체들을 통솔하는 역할만 한다.

돈을 좇는 게 아니라 본질적 정당성을 추구한다는 말이다. 이게 그냥 말로만 포장하며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한다.

그래서 R&A의 권위는 누구라도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A는 골프계를 통치(Rule)하지 않는다. 위에 언급한 방식으로 골프계에서 군림(Reign)할 뿐이다.

마치 엘리자베스여왕과 같다. 통치하는 권력을 의회에 완전히 넘기고 오히려 대영제국 전체를 통솔하는 권위의 총합체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이 지난 60여년 사이에 골프와 당구로 하여금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걸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차이점이다.

이제 드디어 현재의 당구 발전 단계에서 우리 당구인들을 괴롭히며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 그것의 숨겨져 있던 정체가 마침내 선명하고 확실하게 드러난다.

 

당구의 성장기인 오늘날에도 당구단체가 통치자로 지배하려는 것

바로 이것이 구조적 장해물이다. 당구단체들이 스스로를 당구계의 통치자,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한, 당구산업은 결코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도 없고 혹시 발전하게 되더라도 길게 이어가기도 어렵다.

통치구조에서는 당구산업이 커지고 시장이 확대될 기미가 보일 때마다 각급 단체들이 자기가 권한을 더 가져야 한다며 서로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당구가 발전하면 UMB와 한국단체가 싸우게 되고 일본에서 시장이 커지면 UMB와 일본단체가 싸우게 될 것이다. 지금 UMB와 대한당구연맹처럼 말이다.

그리고 지금 UMB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행태로 보건데, 앞으로 생기는 싸움마다 아마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백전백승하며 강력한 당구권력을 유지하고 싶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세계적인 당구 발전의 꿈은 그야말로 그걸로 끝이다.

그렇게 해서는 기존의 성장하던 시장도 그 기세가 둔화될 뿐 아니라, 미국 같은 거대 시장의 경우에는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을 테니까.

시장을 키우는 족족 UMB가 빨대 박아서 다 가져가게 되어 있다는데, 누가 이삭이나 주워 먹겠다고 거대한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UMB가 이번에 취하고 있는 대응방식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단체인지 본분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행태로서 지극히 퇴행적인 동시에 앞으로 당구의 발전에도 크게 해를 끼칠 수 있는 것이었다.

비록 프로를 추진하는 움직임이 두려워서였을지라도 코줌시리즈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것이야 응당 그럴 만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응원까지도 할 수 있지만, 그걸 이루겠다며 보인 행태들은 몹시 초라한 것이었다.

UMB가 세계당구의 통치자라는 구시대적인 발상과 함께, 당구의 발전이고 뭐고 속내로는 혹시나 통치자의 지위를 잃을까봐 걱정만 가득하다는 비루함만 드러냈을 뿐이다.

대한당구연맹이 사용한 '탐욕, 강탈'이라는 표현이 공식단체의 성명서에 쓰기에는 부적절한 면이 있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며 점잖지 못하다고 탓하기도 어렵다.

 

근본적이면서 유일한 해결책, 선수들이 움직여야 한다

이제 우리 당구인들의 과제가 무엇인지도 분명하게 드러났다. 당구단체가 '상명하달로 통치'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분권을 바탕으로 협치로 관리'하는 구조로 발전하도록 힘을 모으는 것이다.

그래야만 당구산업을 탄탄하고 안정적으로, 그러면서도 가장 크고 빠르게 성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에서 수도 없이 많은 사례들이 증거를 보여주듯이 그 변화는 결코 내부의 노력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구단체 밖의 누군가가 나서야 한다. 나서서 방향을 제시해야 하고, 당구단체로 하여금 체질을 조정할 수밖에 없도록 설득하기도 하고 강제하기도 하면서 이끌어야 한다.

이걸 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가 선수이고, 또한 반드시 이걸 해야만 하는 주체도 역시 선수들이다.

당구단체들은 자신이 당구와 당구대회의 심장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건 아전인수의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지금까지는 그걸 전파하며 이데올로기화할 수 있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허위의식이 과연 앞으로 언제까지나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을까. 그 종착역은 이미 시야에 들어와 있다.

당구단체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당구와 당구대회의 심장은 선수다.

설령 당구대회를 구성하는 다른 모든 요소들에서 문제가 생길지라도, 맨 마지막 오직 하나의 요소, 선수들만 건재하고 참여한다면 당구대회는 이루어질 수 있다. 그것의 역도 성립한다.

다른 모든 요소들이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더라도 오직 하나의 요소 '선수'가 참여하지 않으면 당구대회는 성립할 수 없다. 다른 복잡한 말이 더 필요하지 않다.

과연 누가 당구의 마스터키를 쥐고 있는지를 이보다 더 극명하게 드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UMB와 대한당구연맹이 갈등하는 상황을 놓고 선수들이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양 단체에게 선수의 권리를 분명하게 표현해야 한다. 그저 선수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또 한편으로는 당구단체들이 이 기회를 시발점으로 삼아서 통치자의 자세로부터 '관리자의 자세'로 발전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도 그래야 한다.

이게 무척 어려운 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의 과정도 내용도 별로 복잡하지 않다.

선수들이 모여서 의논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아 입장을 발표하면 된다. 물론 이것은 필자가 제시하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1. 당구단체는 선수 본인이 저지른 과실과 규정상 그 과실에 따르는 징계일 경우에만 해당 선수에게 특정 대회에 대한 출전의 제한 또는 금지의 조치를 내려야 한다. 그 이외의 어떤 사유로도 선수의 대회출전권을 훼손하는 행위는 명백한 권한남용임을 확인한다.

2. 따라서 만일 양 단체의 갈등 때문에 UMB가 한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외국선수들의 출전을 제한하려 하거나 또는 외국에서 열리는 대회에 대한당구연맹이 한국선수들의 출전을 제한하려 한다면 그것은 부당한 월권행위로서 선수들은 그 조치를 따를 의무가 없음을 확인한다.   

위 2개 항에 담긴 내용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당구계의 진로를 놓고 당구단체들끼리 언제라도 의견이 충돌할 수 있으나, 그 다툼에서 선수들의 권리를 외면하고 악용하는 것은 단체의 존립근거 자체를 훼손하는 매우 위험한 행위라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사표현을 공식적으로 하게 된다면 당장 정면충돌로 치닫고 있는 UMB와 대한당구연맹의 분쟁에 선수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관여하고 중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럼으로써 갈등을 서둘러 봉합만 하는 게 아니라 갈등을 발전의 동력이 되도록 생산적으로 해소할 수 있게 된다.

긍정적인 효과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 선언을 통해 선수는 당구계 의사결정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선례를 남기게 된다.

그리고 당구단체들 또한 기존의 비효율적이고 부적합했던 구태로부터 벗어나서 당구산업에 기여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역할과 이해에 대하여 조정하며 관리하는 단체로 발전할 수 있는 첫 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러한 희망차고 멋진 미래로 가는 열쇠를 선수들이 가지고 있다.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저 선수들이 아직까지 그걸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국 선수들의 열정이 세계최고임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제는 기량으로도 세계최고 수준임을 자랑하고 있다.

부디 우리 선수들이 여기서 멈추지 말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서, 마침내 세계 당구계를 미래지향적으로 재편하고 운영하는 역량에서도 역시 최고인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선수들에게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힘차게 나아가시라.

 

※ 외부 필진 칼럼은 <빌리어즈>의 편집방향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필자 김태석(레이아웃3쿠션 L3C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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