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2월 22일, 안타까운 사고로 우리 곁을 떠 난 고 김경률(1980-2015). 그가 서른다섯 살의 젊디젊은 나이에 뜻밖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지도 벌써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던 어려운 길에 선구자를 자처하며 걸어나가 보란 듯이 너무나도 훌륭하게 해냈던 그는 당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만들어 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당구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김경률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통역도 없이 홀로 전 세계를 누비며 한국 당구의 가능성을 일깨웠고, 불과 몇 년 뒤 한국 당구선수로는 최초로 세계를 제패했다.

그가 비유럽권 선수 중에서 유일하게 10년 넘게 세계랭킹 '톱12' 안에서 밀려나지 않는 등 꾸준하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남다른 성실함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당구대 위에서 12시간 넘는 훈련을 하루도 빼먹지 않을 정도로 열정과 인내가 대단해 많은 당구선수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미생의 스포츠 당구는 김경률로 인해 '스포츠'로 거듭났다. 이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승 상금 1억원'을 받는 3쿠션 당구대회를 만들려던 꿈을 꾸며 잠시 큐를 놓았을 때도 그는 항상 자신감이 넘쳤다.

실력 면에서나 환경 면에서나 김경률이 살아있다면 한국 당구는 3년 사이 더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감히 단언한다.

그만큼 김경률은 우리에게 큰 존재였다. 그에게는 변하지 않는 꿈이 하나 있었다. 꿈을 이루기 위 해 누구도 나서지 않자 김경률은 이번에도 선구자를 자처했다.

"제가 왜 사업을 하려는지 아십니까. 우승 상금 1억원짜리 대회 만들어서 선수들 좋게 해줘야지예. 쉽지 않겠지만,누군가는 해야할 일 아닙니까. 우린 평생 당구계에 남아 있을 사람들 아닙니까"

그와 나눈 수많은 이야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김경률이 사업을 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필자도 그랬다. 하루는 직접 만나 설득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완고했다.

"형님 같은 언론이나 연맹에 있는 사람들은 뭐하는데, 나 같은 선수가 이런 걸 하게 만듭니까"라는 그의 답변에는 반박도 못 했다.

어느덧 환경은 서서히 변화해 1억원 대회가 눈앞에 오게 되었고, 지금 순간에 김경률이 우리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큰힘이 되고 얼마큼 의지가 되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깊게 남는다.

영원히 당구의 전설로 남은 당구왕 고 김경률의 3주기를 추모한다.

 

빌리어즈 김주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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