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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구本色] 1991년 '17살 산체스 쇼크' 그 후 26년... 과연 무엇이 달라졌나
김주석 편집장 | 승인 2017.10.05 12:21
91년 12월 13일에 서울 삼풍백화점 4층 특설경기장에서 열린 '91 서울 3쿠션 월드컵 개회식'. 빌리어즈 자료사진

1991년 12월 11일 서울 삼풍백화점 4층에 마련된 특설경기장에서 3쿠션 월드컵이 열렸다. 

한국에서 최초로 열린 3쿠션 월드컵이었다.

87년 미국으로 건너간 고 이상천 전 대한당구연맹 회장이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90년경부터 기획된 프로젝트였다. 

당시 대한당구경기인협회 김영재 회장은 일본에 질 수 없다며 3쿠션 월드컵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1년여 만에 월드컵을 유치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먼저 도쿄(88년, 90년)와 요코하마(89년) 등에서 세 번 3쿠션 월드컵을 개최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일본보다 당구 인프라가 더 컸지만, 세계로 시야를 돌리는 데는 '이상천'이라는 기폭제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어렵게 개최된 '91 서울 3쿠션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 당구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대회 개최 1년 전에 창립한 SBS 서울방송의 전파를 타고 당구 경기가 전국에 중계되면서 한국 사회에 당구라는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당구를 놀이나 오락으로만 인식하던 대중들이 보타이와 베스트를 차려입은 세계적인 톱플레이어들의 '진짜 당구 경기'를 처음 보면서 당구를 처음 스포츠로 인식하게 되었다.  

서울 월드컵에서는 한국 당구계와 당구인들에게도 큰 충격을 준 사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17살 산체스 쇼크'였다. 
 

91년에 한국 최초로 개최한 '91 서울 3쿠션 월드컵'. 사진은 레이몽 클루망-요시히코 마노의 결승전 장면. 빌리어즈 자료사진

한국에선 큐도 못 잡아볼 나이에 프로 당구선수
17살 산체스, 세계 톱플레이어 수준 기량으로 8강 行

'산체스 쇼크'의 산체스는 지금 사대천왕으로 불리는 다니엘 산체스(74년생∙스페인)다.

산체스는 91년 서울 월드컵 때 처음 한국에 왔다. 그리고 세계 정상급 기량으로 세계 톱랭커를 줄줄이 꺾고 8강까지 올라갔다. 

생소한 환경, 스포트라이트, 낯선 한국의 당구대 등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많았지만, 산체스는 경기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당구인들은 한국의 최강자들이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대부분 16강에서 탈락했는데, 불과 17살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클루망, 야스퍼스, 이상천 등과 함께 월드컵 8강에 올라가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산체스는 16강전에서 세계 랭킹 10위였던 토니 칼센(덴마크)을 3-1로 꺾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8강전에서 레이몽 클루망에게 1-3으로 아깝게 패했지만 '당구의 전설'로 불리는 클루망 상대로 유감없이 경기력을 발휘하는 모습은 한국 당구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당시 국내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17살이면 큐 한 번 제대로 만져보지 못할 나이였다. 

당구장은 엄연히 청소년 출입금지 구역이었고, 청소년이 당구를 치는 것은 불법이나 다름없는 일로 여겨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17살짜리 소년이 세계 3쿠션 최강자들이 겨루는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톱클래스 성인 선수들을 상대하는 모습은 한국 당구계에는 글자 그대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산체스는 당시 <빌리어즈(월간당구)>와의 인터뷰에서 "8살부터 당구를 쳤다. 12살이던 86년부터 올해(91년)까지 U21 주니어 챔피언십에서 5년 연속 우승했고, 유럽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했다"며 앳된 미소로 자신을 소개했다. 

'황제' 레이몽 클루망과 '3쿠션 원톱'이었던 토브욘 블롬달, 그리고 서울 월드컵 전에 스페인 팔마에서 열렸던 월드컵에서 자신을 3-2로 이긴 이상천 등을 존경하는 선수로 꼽았다.

하루에 보통 5시간 정도 연습을 하는데 당구 때문에 학업을 그만두었지만, 얼마 후 다시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91년 서울 3쿠션 월드컵에 출전해 8강에 오른 17살 다니엘 산체스. 빌리어즈 자료사진

17살 프로 당구선수가 있다는 사실 처음 알려져
93년 청소년 당구장출입금지 해제... 한국 당구 유소년 육성 발판
 

17살에 불과한 앳된 얼굴의 미소년 산체스가 학업도 그만두고 프로 당구선수나 다름없는 활동을 하는 모습은 한국 사회에서 당구를 바라보는 인식에 큰 변화를 주었다.

실제로 93년 5월 13일에 헌법재판소가 "당구장에 청소년의 출입을 막는 것은 위헌이다"라는 위헌 판결에 이러한 '산체스 쇼크'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당시 헌법재판관은 평균 연령 60세 이상의 보수 성향이 강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따라서 재판관들의 당구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는 것이 가장 핵심이었다. 

판결 후에 진보 성향의 언론에서까지 "청소년 탈선을 고려하지 않은 법해석", "납득 못할 결정"이라는 기사를 쏟아낼 정도로 당구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보수 성향이 강한 헌법재판관 13명이 단 한 명의 반대도 없이 전원일치로 '위헌' 판결을 내렸다는 것은 그들에게 어떠한 '쇼크'가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산체스 쇼크가 직접 판결문에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91 서울 3쿠션 월드컵' 관련 자료도 <빌리어즈> 기사를 기반으로 헌법재판소에 모두 제출되었고 이 또한 충분한 설득력을 가진 자료로 활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포르토 월드컵과 청주 월드컵에서 연속 우승 대기록을 세운 한국의 김행직. 빌리어즈 자료사진

유소년 육성에 대한 인식 심어진 계기
92년생 김행직, 98년생 조명우 등장
 

'17살 산체스 쇼크'는 유소년 육성에 대한 인식이 한국 당구계에 처음 심어진 계기다.

91 서울 월드컵이 열리기 전까지 당구는 경험이 중요한 스포츠로 선수들의 연령대가 높고 선수 수명 또한 긴 종목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 클루망이나 블롬달, 이상천 등 세계적인 선수들의 두각을 나타낸 시기도 대체로 20대 중반 이후였다. 

빨라야 20대 초반에 어느 정도 성숙한 기량을 나타내는 정도였지 산체스처럼 17살에 세계 톱클래스가 되는 경우는 없었다. 

야스퍼스는 10대 후반에 유럽 주니어 무대에 나타났고, 쿠드롱도 20대 초반이던 90년대 초부터 활약했다.

그러나 그들도 산체스처럼 유소년 시절부터 주목받아 프로 당구선수로 육성된 케이스는 아니다. 

한국은 사회적 환경 때문에 유럽보다도 한참 늦었다. 한국 당구선수로는 이상천 전 회장이 가장 빠른 케이스라고 알고 있었다.

이 전 회장은 19살부터 당구를 시작해서 27살 정도에 톱클래스의 기량을 갖추었고 30대 중반이던 80년대 후반부터 세계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한국에서는 17살에 큐를 잡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17살에 세계 톱랭커가 되는 것은 아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산체스 쇼크' 이후 한국 당구계는 유소년 육성에 대한 목소리가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재목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장래성이 없는 종목을 앞날 창창한 어린아이의 부모를 설득시켜 권유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다. 

김행직과 조명우처럼 당구를 좋아하는 부모와 '산체스 쇼크' 이후 만들어진 유기적인 환경 요소들이 어린 두 선수가 손에 큐를 들 수 있을 만큼 맞아 떨어지면서 다행스럽게도 한국 당구는 지금, 세계적인 20대와 10대 선수 2명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콜로라도 덴버에 본부를 둔 미국의 당구교육재단(BEF)은 1993년 설립되어 포켓볼 유망주 발굴 사업을 하는 비영리 단체다. 빌리어즈 자료사진(JP Parmentier)

포켓볼∙스누커 등 지속적인 세대교체
'황제' 에이프런 레이즈, 스티븐 헨드리 등도 은퇴

얼마 전 필자와 만난 김행직은 "지금 명우 이후에 또 유망주가 없다. 나와야 할 텐데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김행직의 말처럼 조명우 뒤로 아직 눈에 띄는 유망주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캐롬 종목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 중국은 주 종목인 스누커와 포켓볼에 세계적인 10대 유망주들을 즐비하게 키워냈다. 

중국은 20년 정도 전략적인 투자의 결과로 지금 세계 최대 프로 스누커 투어에서 '유럽 대 중국'의 양강 구도를 만들어냈다.

포켓볼도 미국, 러시아, 대만, 중국 등의 강국들은 국제무대에 실력 있는 어린 유망주들을 내보내 계속해서 육성하고 있다. 

8∙90년대, 길게는 2000년대 중반까지 국제무대를 주름잡았던 '포켓볼 황제' 에이프런 레이즈나 조니 아처, 얼 스트릭랜드, 그리고 '스누커 황제' 스티븐 헨드리 등은 모두 오래전에 은퇴했다.

그들을 능가하는 유망주들을 계속 발굴하고 지속적인 세대교체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랭커들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추세다.

세계 캐롬무대가 '17살 산체스 쇼크'를 받은 것은 무려 26년 전의 일이다.  

당구는 캐롬 종목만 장기간 사대천왕의 플레이에 젖어 정작 필요한 유소년 육성을 오래도록 잊고 있다.

한국 당구와 세계 캐롬의 중심인 유럽은 지금 유망주 발굴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되짚어 봐야 한다. 

무너지지 않고 있는 사대천왕의 아성이 과연 3쿠션의 전 세계적인 보급과 활성화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볼 문제다. 

그래서 이번 김행직의 월드컵 2연승은 더 의미가 깊다.

26년 전 '산체스 쇼크'는 지나쳤지만, 이번 '김행직의 2연승'은 세계 캐롬무대가 세대교체를 준비하는 기회로 삼기를 기대한다. 

 

빌리어즈 김주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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