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에 나타난 몇 가지 오류에 대해 당시의 기록을 근거로 바로잡고자 한다

역사의 기록은 정확하고 신중해야 한다. 고증과 검증 없이 사실(史實)에 기초하지 않고 기록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기록자는 그 기록을 읽는 현재의 사람에게도 책임을 져야 하지만, 후대까지도 무한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역사를 검증이 부족하여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각색하거나 윤색하고 사실을 왜곡해서 기록하는 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것이 일본과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해 국가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이유다.

당구 역사 역시 마찬가지다. <빌리어즈(월간 당구)>는 30년 동안 당구 역사를 사실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나는 지난 2009년 2월부터 본지에 ‘이슈별 당구사 바로 알기’라는 타이틀로 한국 당구사를 9년째 연재하고 있다. 

지난 1984년에 조동성 씨가 최초이자 최후의 당구사를 간행한 후에,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 검증된 부분도 있고 다시금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를 연재 후 한 권의 역사서로 발간하려는 의도로서 지금까지 집필을 계속하고 있다. 

연재를 하면서 내가 기록하는 사실에 혹시 착오나 오류가 발생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자료를 몇 번씩 재검토하면서 신중하게 임하고 있다. 연도나 인물의 이름 하나라도 잘못 기록한다면 후대의 당구인들에게 거짓을 전한 과오를 저지른 책임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우연히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를 보았다. 이 기사에서 당구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인 사실 검증조차 되지 않은 채 집필되어 유력 일간지를 통해 그대로 기사화되고 있었다.

당구 역사를 일반인들에게 알린다는 취지는 좋지만,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전달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한국 당구의 역사는 1987년 창간되어 지금까지 30년 동안 당구 역사를 기록으로 남겨온 <빌리어즈>에 대부분 기사화되어 있다.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에 나타난 몇 가지 오류에 대해 당시의 기록을 근거로 바로잡고자 한다.
 

- 「당구장 영업시간 제한 해제로 최대 전성기 누려」라는 소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71년에 시작해 어느덧 11회를 맞는 한일당구대회는 대한당구협회 최대 공적 사업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개최된 한일당구대회는 1981년에는 일본에서 열리는 해였다. 한국 대표팀 감독에 변기선 씨가 선임되었고 10여 명의 한국 대표 선수들이 출전했다. 

홈어웨이 방식으로 개최된 한일당구대회를 통해 한국 당구는 경기력 향상은 물론 대중 스포츠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었다.”

① 한일친선당구대회는 71년이 아닌 72년 5월에 제1회가 시작되었으며 모두 11회가 아닌 10회를 치렀다. 매년 1회씩 개최하기로 했으나, 77년과 81년에는 한・일 양국 당구협회의 사정으로 치르지 못해 마지막 10회 대회는 83년 3월에 개최되었다. 

②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홈어웨이 방식으로 개최되었다”라고 했는데, 이 부분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의 국내 사정이 외국 여행을 하기가 까다로웠기 때문에 개최지는 한국에서 하기로 했고, 대회 때마다 일본빌리어드협회 다카키(한국명 윤춘식) 사무국장이 일본 선수단을 인솔하고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한국 측에서 마중을 나갔다. 

마지막 10회 때에만 한국 선수단이 일본에 가서 원정경기를 했다. 그리고 경기종목도 홀수 회에는 4구, 짝수 회에는 3쿠션으로 번갈아 채택했으나, 9회에는 4구가 아닌 3쿠션으로 진행하여 8회, 9회, 10회 세 번은 연속 3쿠션 경기로 진행했다. 

③ 또한, “한국대표팀 감독에 변기선 씨가 선임되었고 10여 명의 한국대표 선수들이 출전했다”라고 기록했으나, 당시 한국 선수단은 감독이라는 공식 직책은 없었고 단장이 인솔했는데, 고 양귀문이 7회부터 마지막 10회까지 한국 선수단의 단장직을 수행했다. 변기선은 선수 중 1명으로 박병문, 신일우, 김석구, 정석호, 송동철, 이정현 등 총 7명이 출전했다.

 

- 「경기인들이 구성한 대한당구협회, 당구장 주인들이 장악」이라는 소제목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80년대까지 한국 당구는 대한당구협회가 주도했다. 대한당구협회는 많은 업적을 쌓으며 당구 발전에 절대적 기여를 한 조직이었다. 협회가 출범할 때 구성원들은 말 그대로 그냥 당구가 좋아서, 또는 경기인의 자부심으로 협회를 운영했다. 

그러나 53개 지부를 거느린 거대 조직으로 발전하면서 이해관계가 얽히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조직 내부 사정이 복잡하게 변하게 된다. 협회 구성원들이 당구 전문인에서 당구장 주인들로 바뀌면서 각종 사업과 대회보다는 오직 이익을 내는 데만 급급해 경기인들과 불협화음이 계속됐다. 당시 협회의 1개 지부에서 거둬들이는 회비 및 가입비만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지부의 재정 형편이 중앙회를 능가하는 이상한 구조로 변해버린 것이다. 전국 3만 5천여 당구장들이 회원으로 있는 대한당구협회 중앙회를 자연스럽게 이들이 장악하면서 경기인들과는 물과 기름처럼 겉돌게 된다.”

① 이 내용은 제목부터 잘못되었다.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는 경기인들이 조직한 단체가 아니며 처음부터 당구장 주인들의 친목 도모와 권익 옹호를 위해 설립된 단체다.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가 출발부터 당구장 경영주들을 위한 단체였다는 사실은 정관에도 나와 있다.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 정관에는 설립 당시 부터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당구장 경영주’만 회원으로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당구협회 구성원들이 당구 전문인에서 당구장 주인들로 바뀌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는 애초 1954년에 만들어진 ‘당구업조합’이 모체다. 당구업조합은 당구장 업주들이 세금 대책 등 스스로의 권익을 신장하고 보호할 목적으로 설립된 자생적인 조직이었다.

당구업조합 인사들은 세금 문제와 당구장 시설 규격 등에 대해 정부에 진정하고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구업조합을 시작으로 두 당구 단체가 탄생했다. 1955년 11월에 국회의원들이 만든 ‘대한당구협회’와 1957년 1월 당구용품 생산업체인 승리기업사 대표 방달성 씨의 주도로 탄생한 ‘대한당구선수회’가 그것이다. 

국회의원들의 ’대한당구협회’는 협회로 구성된 우리나라 최초의 범당구계 조직이었다. 6・25전쟁이 1953년에 휴전되자 피란 갔던 당구인들이 서울에 복귀했다. 이 무렵의 국회의원들 중에는 당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럿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자유당 국회의원인 김익기(300점), 하태환(150점), 김재황(150점), 민관식(150점), 정태천(120점) 의원 외에 이재학 국회부의장(80점)이 당구인들과 자주 어울렸다. 

이들과 교류를 하게 된 당구인들은 당구 발전을 위한 조직의 필요성을 설명하며 그들의 참여를 요청했고, 1955년 11월에 그들이 자주 교류하던 미도파백화점 뒤 삼화당구장에서 ‘대한당구협회’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하여 협회를 설립했다.

회장에는 이재학 국회부의장, 부회장에 당구인 방용하와 홍사철 중소기업연합회 전무, 이사장은 당구인 이한종이 맡았다. 

다음해 1월에는 대한당구협회 창립 기념 제1회 전국선수권대회를 국회의장상, 국회부의장상, 문교부장관상, 보사부장관상 등을 걸고 성대히 개최하였으며, 57년 5월에도 서울 신문회관에서 제2회 전국당구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그런데 이때에 결성된 ‘대한당구협회’는 순수한 의미에 있어서 당구인 또는 당구 경기인들만의 단체가 아니라 당구 애호가를 망라한 범당구계적인 조직이었다. 

당구 경기인이 주도한 최초의 경기인단체는 ‘대한당구선수회’다. 최초의 당구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던 방달성 대표는 1957년 1월 31일 전국에 산재한 38명의 당구 경기인들을 규합하고 발기인으로 참가시켜서 처음으로 당구 경기인들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방달성 대표가 회장을 맡았고 부회장에 박수복, 조동성, 고문으로 방용하, 장수복 등을 선출 및 추대했다. 

그러나 이 단체는 최초의 경기인단체라는 선언적인 의미는 있었지만, 단체의 이름으로 시행한 이렇다할 업적은 없었다. 국회의원들의 ‘대한당구협회’와 방달성의 ‘대한당구선수회’는 설립 얼마 후 모두 없어졌고, 유일하게 ‘당구업조합’만 1961년 5・16 군사혁명 때까지 활동을 계속했다. 

혁명정부가 들어선 이후 사회 각 분야의 정화를 위해 과감한 쇄신정책을 시행했는데, 당구계도 그 대상이었다. 그로 인해 임의단체였던 ‘당구업조합’을 강제로 해체시키고, 보건사회부가 소관하는 대한환경위생협회 내에 당구분과위원회를 두어 감독했다. 

당구업조합은 그대로 당구분과위원회(위원장 이부산)로 편입되었다. 당구분과위원회는 총무의 일을 맡았던 전화영이 전국 세무서 세금대장에 나온 당구업조합 회원을 명부로 작성하고 이들을 회원으로 규합하여 1962년 2월 20일에 법정단체의 산하 위원회 형식으로 출범했다. 

이 단체는 1964년 4월에 해체하면서 보사부장관의 정관 승인을 받아 ‘사단법인 대한빌리아드협회’로 다시 등록하게 된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와서 지금의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로 명칭을 변경했고, 마침내 당구계 최초의 독립 법정단체가 되었다.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의 역사는 ‘당구업조합’ → ‘대한환경위생협회 당구분과위원회’ → ‘사단법인 대한빌리아드협회’ →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로 밟아온 것이며, 위 단체를 결성하고 창립을 주도한 인물들은 당구 경기인이 아닌 당구장 업주들이었다.

따라서 “대한당구협회 출범 당시 경기인의 자부심으로 운영되었다”는 주장과 “협회의 구성원들이 전문인에서 당구장 업주로 바뀌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②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대한빌리아드협회)’는 정부의 보조가 전혀 없는 단체이고 회비조차 거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초창기에는 회장을 위주로 한 임원들이 자비를 털어 단체를 운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운영자금의 조달 방편으로 초대 회장 유정선과 당구장 업주 등 관계자 32명의 공동출자로 대한빌리아드클럽도장(당구장)을 설치하여 이후 상당기간 그 수익금으로 협회를 운영했다. 

대한당구협회 설립 초창기에는 회장과 임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회비 징수도 없이 협회를 운영해 왔으나, 당구계가 호황을 맞이하자 정관에 회비 징수를 명문화하고 각 지회의 회원 업소의 당구대 숫자를 기준으로 대당 얼마씩의 회비를 걷어 지회 운영자금으로 사용하면서 일부를 중앙회에 분담금으로 올려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분담금조차도 미납금이 많아서 매년 정기대의원총회 때는 몇백만원씩의 미수금 문제가 대두되었고, 심지어는 감독기관의 지적을 받기도 했다. 호황기에 당구장 업주들의 수익이 좀 좋아졌을지언정 “당시 협회의 1개 지부에서 거둬들이는 회비 및 가입비만도 상상을 초월”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③ 이상에서 보았듯이 당구 경기인들은 애초에 대한당구협회라는 조직을 결성하고 운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한 적도 없거니와 오히려 협회 내에 선수국을 맡거나 경기담당이사로 임명되어 활동했을 뿐 협회의 결성과 운영은 원래부터 당구장 업주들이 해왔다. 

‘당구분과위원회’ 위원장인 이부산은 언론인 출신의 당구장 업주이고, 협회 일에 한평생을 바친 전화영 역시 경기인이 아닌 당구장 업주였다. ‘당구분과위원회’에서 ‘대한빌리아드협회’로 넘어가던 중간 과정에서 활동했던 박용옥, 이준구 등도 모두 당구장 업주였다.

또한, ’대한빌리아드협회’의 창립 핵심 멤버인 유정선 초대 회장이나 부회장 유정훈, 총무 양창종 모두 경기인이 아닌 당구장 업주였다. 


- 「은광교역 당구공 수입 독점하며 엄청난 이익 챙겨」의 소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당시 주 벨기에 대사관 참사관이 장식용으로 당구공 한 벌을 들여오면서 한국 시장에 당구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이후 그는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당구공 수입을 시작한다. 결국 장식용으로 구입한 당구공이 인연이 되어 ‘은광교역’이란 오퍼상을 차렸고 당구공을 전문적으로 수입해 엄청난 이익을 챙겼다. 

이 시기에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대한당구선수협회 OOO 이사가 은광교역을 찾아가 후원 제안을 했으나 거절당한 일이 있었다. 은광교역은 경기단체와 공조하지 않아도 당구공의 매출이 지속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에 후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OOO 이사는 당구공 수입을 다각적으로 알아보게 되고 결국 국제상사와 글로리상사가 수입에 나서며 당구공 수입원이 3개사로 늘어난다. 이로써 은광교역의 독과점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① 한국에 벨기에 당구공을 최초로 독점 수입한 은광교역은 일개 오퍼상이 아니라 아그파 필름의 한국 총판을 하는 무역회사였다. 당구공 수입은 그 회사의 일부 품목으로 정영진 전무이사가 전담했다.

손영선 사장이나 정 전무는 벨기에 대사관 참사관 신분과는 아무 관련도 없으며, 벨기에 대사관과 관계되는 사람은 그 후 은광교역의 단독 수입이 풀린 후 벨기에 당구공 수입에 참여한 글로리레포츠(글로리상사)의 김영태 대표다.

따라서 벨기에 대사관 참사관이 직장까지 그만두면서 당구공을 처음 수입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② 이 글의 필자는 당시 ‘대한당구선수협회’의 이사로 은광교역에 후원을 제안했다가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직접 글로리상사와 국제상사를 끌어들여 3자 구도를 자신이 직접 만든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부분도 사실과 다르다. 

벨기에 공 생산 회사인 ‘살룩’ 사는 90년대 말에 아시아 담당 프로덕트 매니저인 델튼을 통해 한국 시장을 점검하고 은광교역의 독점 공급이 시대에 뒤떨어져 공급자 다변화를 모색하고 있었으며, 당시 살룩 사에서 나에게도 조언을 요청해 대담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은광교역의 독점 공급을 폐지하고 3개 회사에 공급을 발표할 때 다시 델튼 매니저와 인터뷰하여 이 사실을 <빌리어즈>에 보도하기까지 했다. 

③ 또한, 이 기사의 필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은광교역 + 국제상사, 글로리상사’가 아니라, 은광교역을 제외한 국제상사, 글로리상사와 한밭양행 등 3개 사였다. 한국에서의 벨기에 공 독점시대는 생산회사인 살룩 사의 영업 방침으로 끝났을 뿐 어느 개인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니다.

게다가 협회에 후원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입원을 3개로 늘려버렸다는 주장은 요즘 같은 시대에 논란이 될 수 있는 위험한 얘기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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