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화전문 2학년 겨울방학에 일본 당구계를 돌아보다

조동성은 당시로써는 당구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 당구계를 직접 알고 싶었다.

혜화전문 2학년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관부(關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도착하여 도쿄에서 1주일여간을 머물며 일본의 당구에 관한 여러 가지를 몸소 체험했다.

당시 도쿄에는 약 2천여 개의 당구구락부들이 그야말로 문전성시의 붐을 이루고 있었다. 조동성은 이 중 20여 개의 당구구락부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전성기 시절의 조동성 <사진 = 빌리어즈 자료사진>

조동성이 느낀 인상은 아주 깨끗하고 청결하며 사교장의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일반적인 실력은 아마추어들의 그냥 즐기는 정도의 높지 않은 수준이었고, 간혹 고점자들을 만나 대결도 벌여 보았으나 조동성과 같은 300점대 실력자는 흔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동성이 실전에서 느낀 점은 당시의 한국 당구가 순전히 연습에 의한 경험 당구인데 반해 일본은 계산법에 의한 정석 당구로 기본기가 충실해 보였다.  

조동성의 이 학창시절의 일본 당구계 견학을 겸한 나름대로의 시찰은 두 가지 멋진 성과가 있었다.

그 하나는 1930년대에 한국을 방문해 한국에 당구 묘미를 전했던 일본의 당구 명가 가쓰라 집안의 마사코와 노리코 자매를 만난 것이고, 다른 하나는 3쿠션의 이론 지침서인 시스템 계산 책자의 입수였다.

가쓰라 집안이 운영하는 가쓰라구락부는 도쿄의 긴자 3정목에 위치해 있었는데 당시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이었다.

조동성은 가쓰라구락부를 찾아 두 자매를 만났고, 특히 동생인 노리코와는 그 후에 오래도록 교분이 이어졌다.

노리코는 1930년대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17세였으나 이때는 20대 후반의 나이었다. 조동성은 노리코의 당구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당구공을 다루는 섬세한 손길과 겨냥할 때의 그 집중하는 자태는 젊은 가슴을 울렁이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말한다. 

조동성이 300점대의 당구 실력을 쌓게 되자 보통 크기의 중대에 점점 싫증을 느끼기 시작하여 충무로 쪽 일본인촌 구락부의 대대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970년대 당구계의 중심역을 담당했던 조동성(왼쪽에서 세 번째)과 오른쪽에 혜화전문 동창 최기창, 앞줄 왼쪽 첫 번째가 강두석, 이의선. 뒷줄에 후배 선수들이 섰다. (왼쪽부터) 홍순면, 이상천, 정정우, 김명석, 박병문, 김동수, 김용석. <사진 = 빌리어즈 자료사진>

조동성이 대대에 익숙지 못해 쩔쩔매는 데 반해 일본인들은 정확한 각도로 수준 이상의 실력을 보였다.

연유를 알고 본즉 일본인들은 느낌(경험)으로 치는 당구가 아니라 정확한 각도 계산에 의해 당구를 치는데 그 계산법을 학술적으로 풀이한 시스템 교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동성은 당구도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이론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온 장안의 서점을 다 뒤졌으나 끝내 찾지를 못하였고, 일본에 가면 반드시 이 책자를 구입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도 이번 일본 여행의 큰 목적의 하나였다. 

당시에도 일본에 몇 가지 3쿠션 시스템 교본이 출판되어 있었지만, 조동성은 그중에서도 일본 내 3쿠션 당구법의 최고봉으로 일컬음을 받던 마쓰야마 긴레이가 쓴 3쿠션 책자를 입수했다.

이 책자는 그 훗날까지도 당구기술서 중의 교본으로서 3쿠션 수업자들에겐 가히 필독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조동성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이 책자는 30년이 지난 후에 조동성이 한국 최초의 3쿠션 시스템 교본을 발간할 때 기본이 되었다). 

조동성은 일본을 다녀온 뒤로는 국내 각지의 당구장도 편력했다. 그는 남쪽보다는 이북이 저변 인구나 기술면에서 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전한다.

특히 평양, 북청, 함흥, 천진 등지가 한바닥을 이루고 있었고 300점대 이상의 고점자도 많았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평양은 마치 안방을 드나들듯이 하룻길로 나들이한 적도 많았는데, 창경원 벚꽃이 만발할 때쯤이면 모란봉 벚꽃도 대략 1주일 뒤면 꽃순을 터뜨릴 때가 되므로, 꽃길을 따라 당구원정을 갔다.

주전 무대는 평양의 서문통당구장이었다. 실력을 떠나서 평양 젊은 패들과 당구로 봄밤을 새며 술로 교우했다. 
 

한일친선당구대회 참가를 위해 한국에 온 일본 선수단을 마중 나온 (사)대한당구협회 임원들과 일본 선수단. 오른쪽 2번째가 심판장 조동성, 5번째가 다카키 쇼지 일본빌리어드협회 사무국장(한국명 윤춘식), 7번째와 9번째가 세계 3쿠션 챔피언을 지낸 고모리와 고바야시. <사진 = 빌리어즈 자료사진>

■ 만주행 특급 희망호를 타고 봉천을 거쳐 북경을 가다 

조동성은 혜화전문 3년을 마치고 졸업하게 되자 새로운 대학 진학의 길을 모색해야 했다.

조동성의 부친은 일본 유학보다는 중국의 북경대학을 가기를 원했는데, 부친의 뜻에 따라 북경대학 문학부를 지원하기로 했다.

20세가 되던 1943년 여름의 어느 날 오후 6시 반에 조동성은 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서울역에서 만주행 특급 희망호를 탔다. 

다음 날 오후 4시 반에 봉천역에 열차가 도착하자 그는 전 일승정구락부 사원이었던 선배 당구인 박수복이 있는 청엽구락부로 직행했다.

그의 이 도중하차는 박수복을 오랜만에 한번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이곳 만주의 당구를 몸소 체험하고 싶은 젊은 호기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조동성은 낯선 이역에서 전날 친숙했던 박수복과 어울려 3일간을 머물며 이름 있는 당구장과 술집 명소들을 쏘다녔다.

봉천 시내에는 50여 개의 당구장이 있었으며 거의 대부분 일본인들의 경영이었고 따라서 시설이나 격조 모두 손색이 없었다.

그곳 당구 고객의 국적 비율은 1할 정도가 중국인, 2할이 한국인이고 태반이 일본인들이었다. 조동성이 당구를 관전하며 느낀 것은 당구대 위에서도 제각기 다른 국민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일본인은 쉬운 공부터 치되 섬세한 반면 스케일이 적어 모험성이 없고, 한국인은 실속보다는 과시 위주로 사내답게 도전하는 당법이고, 중국인은 실력면에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한 수 뒤졌지만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지더라도 대국적으로 게임의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조동성은 사흘 동안 박수복의 안내로 봉천 시내를 샅샅이 구경한 다음 입학원서 제출마감이 임박해서야 북경으로 출발했다.

기차를 타고 국경지대인 산해관을 통과하면서 역시 중국은 넓고 크다는 것을 느꼈고 큰 물에서 큰 인물이 돼야겠다는 포부가 조동성의 가슴을 부풀게 했다.

그러나 조동성의 사흘간의 봉천 당구 편력은 그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생의 패착이 되었다. 북경에 도착하자 입학원서를 접수하기 위해 곧장 북경대학을 찾았다.

하지만 그의 신원조회가 도착하지 않은 데다 모교의 추천서마저 양식을 구비하지 않아 요건을 갖추지 못해 원서접수가 되지 않았다.

만주에서 3일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재수속을 할 수 있었으나 마감이 임박하여 불가능했다.

조동성은 새삼 자신의 부질없는 호기를 후회하며 가슴을 쳤으나 이미 때가 늦었고, 그가 북경대학의 정문을 나올 때는 눈물이 앞을 가려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당구인원로회는 1996년 12월 연말대회 행사로서 ‘당구인의 밤’을 개최하며 초대 ‘명인’으로 조동성 회장을 추대, 상금 1만 달러를 시상하였다. 명인으로 추대된 조동성의 표정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사진 = 빌리어즈 자료사진>

그러나 이런 후회도 잠시, 조동성은 북경을 떠나 천진(天津)으로 달려갔다. 당시 천진은 프랑스의 조계권(租界圈)으로 중국에서 서양문물을 가장 먼저 접했던 곳이므로 기왕지사 대학 진학이 실패했으니 시야라도 넓히겠다는 생각이었다.

천진은 조동성이 듣던 대로 인종과 국적에 차별이 없는 자유천지였다. 시가지의 건물 모습부터 완전히 서양식으로 꾸며져 있어 이국정취가 물씬했고 난생처음 보는 온갖 진품들이 넘쳐 있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당구였다. 천진에 이틀간을 머물며 여기저기 당구장을 섭렵하였는데, 이곳은 국제도시답게 다른 도시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포켓 당구대 일색이었다. 조동성은 난생 처음으로 천진에서 로테이션 게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귀로에는 내친김에 다시 신경(新京)에 들렀다. 그는 어느덧 북경대학 입학 실패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당초의 상아탑 유학은 딴전인 채 당구 유학길인 양 새로운 당구문화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는 신경의 번화가에 자리 잡은 국옥당구장을 들어갔는데, 때마침 일본의 당구 고수 후지다가 묘기 시범을 펼치고 있었다.

큐대만으로 땅바닥의 공을 당구대까지 끌어올린다든지, 맥주병 위의 공을 아무런 손상 없이 가격하여 맞히는 등의 점프 묘기는 조동성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감탄할 당구의 또 다른 영역이었다.

후지다의 묘기는 관중들을 완전히 매료시켰고 일부 돈 많은 호사가들은 즉석에서 찬조금을 뿌리는가 하면 엄청난 거액을 제시하며 사사를 청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조동성의 대학 진학을 목적한 중국 방문길은 엉뚱하게도 당구 유학의 길로 변모했지만, 그에게는 일평생 좋은 경험과 수업이 되었다. 

그해 말께는 2차 대전의 전황이 점점 급박해졌고 일본은 국가총동원령을 내렸는데, 이것은 한 마디로 생활 전반을 전쟁으로 끌어들이는 비상 긴축정책이었다.

따라서 당구장도 오후 5시부터 밤 11시까지의 반나절 장사로 바뀌며 서울시내에는 30개의 당구장이 명맥을 유지했다. 

이듬해인 1944년에는 일본의 패전이 느껴졌고 이런 상황 속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끌려갔으며, 조동성도 학도지원병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니카타의 보병사단에 입대해 종전까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살다가 일본의 패전으로 한국으로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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