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년 후 기자와 대담으로 당시의 당구계 상황 상세히 전달

6ㆍ25 직후의 당구계 상황을 안다는 것은 기록이나 또는 당시를 살았던 원로 당구인의 전언을 통해서만 가능하나, 불행히도 우리 당구계에는 그런 기록은 거의 없고 당시에 활동했던 당구인들의 입을 빌려 들으려해도 너무 때가 늦은 것 같다. 
 
그런데 <월간당구>가 1987년 2월에 창간호를 발간한 후 그 다음 해에 6ㆍ25 직후 승리기업사의 대표로서 최초의 국산 당구대를 생산하는 한편 대한당구선수회를 조직하여 한국 당구 발전의 선구자 역할을 한 방달성을 필자가 만나게 되어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최초의 당구 잡지를 발행한 분으로서 그때까지도 딸과 함께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당구장을 경영하면서 필자가 그를 방문하면 흔쾌히 시간을 내어 많은 이야기를 해주며 당구잡지 발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체득하고 있었기에 “김 사장! 참 대단한 일 하구먼. 수고가 많아.” 하고 나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는 그가 발행해 소장하고 있던 <월간당구> 창간호와 제2호와 함께 소중한 몇 가지 자료를 건네주었다. 
 
어느 날 필자가 방달성을 찾아갔을 때 한국권투위원회의 공인심판원인 김광수를 소개했다. 내가 권투를 좋아하는 편이라 TV 중계로 보던 그의 낯이 익어 곧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뜻밖에도 6ㆍ25 피난 수복 후에 방달성의 권유로 무교동에서 당구장을 경영했다고 하였다. 그때의 당구계 사정을 많이 알고 있으니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렇게 해서 1988년 5월 어느 날 <월간당구> 기자와 대담이 이루어졌다. 
 
그 대담 내용을 필자가 여러 번 거듭 읽어보아도 서울 수복 직후의 당구계 상황이 너무 잘 소개되어 있어서, 이것을 필자의 주관으로 재구성하는 것보다는 원문 그대로 싣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대담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기로 한다.
 
방달성 씨(좌)와 김광수 씨(우).

(1988 6월호
무교동 1호의 ‘대도당구구락부’  
 
현재 당구는 많은 발전에 힘입어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업소는 25,000에 이르고, 당구인구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800만을 자랑한다. 이것이야말로 말없이 맥을 이어온 당구계의 눈부신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에 뿌리가 있듯 당구 역사 또한 많은 선배님들의 노력으로 깊은 뿌리가 현재까지 면면히 지속되어옴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에 본지는 당구의 뿌리를 찾아 지난날 당구계에 몸담아 왔던 당구계의 산 증인을 통하여 그 당시의 당구계에 관한 내용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지금은 한국권투위원회의 공인심판원으로서 많은 권투 경기의 주심을 맡아오고 있는 낯익은 얼굴 김광수(67세) 씨를 만나 6ㆍ25 피난에서 수복한 후 서울 무교동에서 당구장 영업을 시작한 당시의 사정과 당구계의 흐름을 직접 들어 재조명해 본다. 
 
기자 : 바쁘신 가운데 시간을 할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세에 비해 무척 젊어 보이십니다. 요즘의 근황은 어떠하십니까. 
 
김광수 : 젊다니요, 이제는 다 늙었죠. 한국권투위원회에 소속되어 복싱 심판도 하고 복싱원로회에 몸 담고 있으면서 후배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한국 권투 발전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종종 당구장을 방문하여 게임도 하고 젊은이들을 만나 당구 역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기자 : 수복 후 무교동에서 당구장을 처음 개업하셨다는데 개업 동기에 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광수 : 내가 1955년 무교동에서 당구장을 개업하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무교동 1호라고 하더군요. 개업 동기를 이야기하자면 대한당구선수회 초대 회장을 지내는 등 우리나라 당구계 발전에 공로가 지대하며 현재 세종당구회관(서울 종로구 광화문 소재) 운영자이신 방달성 선생에 대해 먼저 언급을 해야 합니다. 내가 플라이급 권투선수 시절 방달성 선생께서는 동방권투구락부라는 체육관을 건축하시고 회장으로 계셨습니다. 1ㆍ4 후퇴 때 대구에서 피난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방달성 선생을 만나게 되어 앞으로 당구장 영업이 전망이 있다는 방 선생의 권유로 당구장을 개업했습니다. 요즘에는 당구장, 당구회관 하지만 그 당시에는 구락부라는 명칭을 많이 썼습니다. ‘대도당구구락부’라고 이름을 정하고 당구대 6대를 준비했었습니다. 그후 사업이 발전해 맞은 편에 ‘참피온당구구락부’를 하나 더 개업했죠. 참피온에는 당구대가 10대 있었으니까 내가 무교동에서 2개의 당구구락부를 운영하면서 16대의 당구대를 갖고 있었던거죠. 
 
기자 : 그 당시 물품 부족으로 당구용품 구입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당구대 구입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김광수 : 그 당시 당구대는 돌만 얹어 놓으면 다 당구대였죠. 수평 관계도 맞지 않아 당구공이 한쪽으로 몰리는 재미있는 사건도 발생했었습니다. 그때 방달성 선생께서 을지로2가에 승리기업사를 차려 당구대를 제작했었습니다. 그 당시 당구대는 맘보대(다리가 2개 있어서 일본의 게다를 생각해 ‘게다다이’라고도 하였음)가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승리기업사에서 요즘에 사용하고 있는 다리 4개의 당구대를 제작해서 대도당구구락부에 최초로 납품을 하였습니다. 품질이 좋고 획기적인 상품이었기에 저희 당구장이 일종의 전시장이 되어 매일 구락부에 운영자와 제조업자들로 항상 붐볐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었지만 일본에서도 역시 호평을 받아 일본으로 수출도 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설계도면을 가지고 보령 웅천에 있던 석판공장으로 직접 찾아와 주문을 했었습니다. 
 
기자 : 대도당구구락부를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는 ‘국회구락부’라고 불렀다고들 하는데 그 이유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김광수 : 저희 구락부에는 국회의원들의 출입이 많았습니다. 요즘에는 테니스, 수영, 조깅이니 하면서 아침 운동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당구가 귀족 스타일의 운동으로 인식되어 있어서 아침 운동으로 당구로 몸을 풀고 국회의사당으로 출근해 일을 보았었습니다. 언젠가 국회의원과 출입기자단의 친선 당구대회가 저희 구락부에서 열렸었는데, 국회의원들의 차량이 완전히 무교동을 메웠습니다. “국회의사당이 옮겨졌구만” 하고 어떤 기자가 농담삼아 한 말이 ‘국회구락부’로 된 것 같습니다. 이재학 국회부의장을 비롯하여 이OO 의원, 김OO 의원 등 많은 의원들이 저희 구락부를 출입하였습니다.
(편집자 주 : 대담 당시에는 당구에 대한 사회의 인식 때문에 국회의원의 실명을 밝히는 것은 누를 끼치는 것으로 생각되어 이OO 국회부의장, 이OO 의원, 김OO 의원으로 표기하였음)
 
기자 : 서울에 산재되어 있던 당구장의 수효와 허가기준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김광수 : 서울에는 250개 정도의 당구장이 있었습니다. 당구장의 양적 팽창을 억제시키려고 당구장과 당구장의 거리는 500m, 당구대와 당구대 사이의 간격은 3자 이상, 벽과 당구대의 간격은 5자 이상으로 규정되어 있어서 개설신청이 들어오면 시 위생과에서 설치장소를 방문하여 설치규정에의 적합 여부를 직접 확인했었습니다. 다만 당구장과 당구장의 거리에 있어서 먼저 개업한 주인의 동의가 있으면 거리에는 제한을 받지 않았습니다. 
 
당구장 발전의 저해 요인 너무 많아
 
기자 : 그 당시 당구업계에 계시면서 어려운 일이 있었다면?
 
김광수 : 한때는 당구가 서양인의 경기이므로 국내에서 추방운동이 벌어져 정부에서는 중과세를 매겨 자진폐업을 유도했었죠. 100원을 벌면 90원의 세금을 부과한거죠. 많은 당구인들이 그때 많은 고생을 했었고 부당함을 해결하려고 무척 노력도 했었습니다. 그 당시 한·일 친선경기를 하였는데 유명한 우리 교포 당구선수 다카키 씨를 초청하여 당구의 저변확대를 꾀하였습니다만, 그 내면에는 당구를 스포츠화시킴으로써 세금문제 해결이라는 속셈도 있었습니다. 
5ㆍ16 이후 정부에서는 학생과 공무원들의 다방과 당구장 출입을 금지시켰고 경찰의 잦은 순찰로 영업정지라는 무거운 중벌도 당구장에 가해졌었습니다.
 
기자 : 선생님과 이야기하려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권투와 당구가 4각이란 공통인자를 가지고 있는데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광수 : 글쎄요. 쉬우면서도 어려운 질문 같습니다. 나름대로 공통점을 찾는다면 권투선수가 로프를 최대로 이용하듯 당구 또한 쿠션을 이용한다는 것과 권투에서는 매회가 끝날 때마다 저지(심판)의 채점이 있듯 당구에서는 매큐마다 주판으로 점수를 합산하고, 권투는 선수 2명과 심판 1명인 3명으로 4각 안에서 경기에 임하고 있는 반면에 당구 또한 백구 2개와 적구 1개의 스리쿠션이 있잖습니까? 하하하
 
기자 : 많은 시간 감사합니다. 기회가 있으면 다시 찾아 뵙고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김광수 : 감사합니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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