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천의 사후에 BCA(미국당구협회)가 ‘명예의 전당’에 헌정함으로써
미국이 그의 위대성을 인정하였다
 
■ 이상천 타계 후 2년 5개월 만에 2007년 ‘명예의 전당’ 위대한 선수 부문 입회자로 선정
 
불세출의 당구천재 이상천(미국명 Sang Lee)이 그의 생애 전성기를 보냈던 미국에서 그 위대성을 인정받았다. 
 
BCA(미국당구협회)는 2007년 3월 3일(한국시간) “1990년부터 12년 연속 미국 당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한 한국 출신 이상천 씨가 2007년 ‘명예의 전당’ 위대한 선수 부문 입회자로 선정되었다.”며 “5월 15일(한국시간 16일) 라스베이거스 리비에라호텔 카지노에서 헌정 기념식이 열릴 것”이라고 홈페이지를 통해 발표하였다. 
 
‘명예의 전당’ 이사회가 후보를 정하지 않고 실시한 자유투표에서 이상천은 31표 중 22표(70.9%)를 얻어 미국의 앨런 홉킨스를 누르고 1위에 오름으로써 헌정자로 결정되었다. 이 결정은 이상천이 2004년 10월 19일 갑작스러운 위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 51세의 나이로 타계한 후 2년 5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헌정 기념식은 BCA가 발표한 대로 5월 15일 라스베이거스의 리비에라호텔 카지노에서 BCA의 300여 명의 회원과 많은 하객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치러졌다. 기념식에는 이상천의 미망인과 그의 단 하나의 혈육인 딸 올리비아 리가 참석해 헌정패를 수상하였으며, 이상천의 생전에 그로부터 많은 지도를 받았던 한국 출신의 포켓볼 선수 자넷 리도 자리를 같이 하였다.
 
올리비아는 가족을 대표한 소감에서 “아버지가 이 자리에 계셨으면 더욱 뜻이 깊었을 것이며, 아버지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열심히 살겠다”고 했다. 
 
BCA가 미국 당구선수권 12년 연속 제패와 미국 대회 41연승의 대기록을 세우고 93년 월드컵 챔피언에 오른 이상천을 2007년 ‘명예의 전당’ 헌정자로 결정한 것은 1966년 제1회 헌정자로 랄프 그린리프 등 3명을 선정한 후 꼭 50번째이다. 
 
이상천이 BCA의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사실에 대하여 한국의 당구인들은 미국이 늦게나마 이상천의 위대성을 인정해 주어 고맙고 다행한 일로 평가하였다. 이상천이 타계한 후에도 그를 추모하는 당구대회가 미국에서 열리고 있다.
 
이 해에도 제3회 상리오픈3쿠션대회가 8월 13~20일 세계 유명 3쿠션 선수들이 참가한 가운데 이상천의 생전 손때가 묻은 뉴욕의 ‘캐롬카페’에서 개최되어 한국의 박병문, 안지수, 김경률이 참가하였다. 이상천이 왜 위대한 당구선수이며, BCA ‘명예의 전당’ 이사회가 왜 그를 압도적으로 지지해 헌정하였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 번 살펴본다.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당구대회'에 참가한 이상천 선수
 
■ 당구선수로서의 위대성
 
이상천은 1954년 7월 13일 서울 중구 충무로에서 태어났다. 1978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이상천은 학업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당구의 매력에 빠져 자비로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등 당구선수로서의 길에 들어섰다. 1979년 7월 전국당구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1981년, 1982년, 1984년, 1985년 전국대회를 석권하였다. 
 
1987년 4월 그는 벨기에의 스파대회에 참석했다가 큰 뜻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가 1990년 상리(Sang Lee)라는 미국 이름과 함께 미국 당구 프로에 입문하여 미국 내셔널 챔피언십 우승을 시작으로 2001년까지 12년 연속 미국 내셔널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상천은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여 동안 미국 내에서 열린 각종 대회에서 41연승을 기록하면서 종전 최다 연승 기록(36연승 · 1941년 윌리 호프)을 갈아치웠다. 
 
1991년에는 BWA(세계프로당구협회)가 주최하는 독일 베를린 월드컵 대회 첫 우승을 시작으로 벨기에 브뤼셀 월드컵, 터키 이스탄불 월드컵,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월드컵 대회를 석권하며 1993년 세계 투어 6개국 대회 성적을 종합한 순위에서 승승장구 중인 토브욘 블롬달(스웨덴)을 물리치고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 세계 3쿠션을 평정하였다. 
 
1999년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하자 <뉴욕 타임스>는 이상천을 ‘3쿠션 당구계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업적으로 뉴욕에 미니바와 카페, 그리고 당구장이 어우러진 ‘캐롬카페’라는 대형 복합 당구클럽을 운영함으로써 동료 세계 당구선수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그리고 2002년에는 조국의 부름을 받아 제14회 부산 아시안게임에 3쿠션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태극마크를 달고 당시 49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은메달을 따 국위를 선양하였다.
 
2003년에는 한국 당구의 활성화와 당구붐을 조성하기 위해 귀국하여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국 투어’를 2차례 개최하면서 당구 전성기를 여는 데 공헌하였고, 이 투어 과정에서 이상천은 직접 경기에 참가해 29연승의 대기록과 하이런 19점의 기록을 작성하였다. 이때의 그의 경기력은 전성기를 방불케 하였다. 
 
이상천은 그의 세계적인 선수 역량을 이용해 1991년 서울 3쿠션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유명 3쿠션 선수들을 한국에 데려와 각종 대회와 이벤트를 열 수 있도록 주선함으로써 한국 당구선수들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한국 당구를 국제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국당구대회’ 포스터와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는 순간 큐를 번쩍 들어 올리는 이상천.
■ 당구 지도자로서의 위대성
 
이상천이 주도한 ‘당구를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전국대회’ 투어는 세계적인 견문과 안목이 없으면 불가능한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혁신적인 기획이었다. 
 
이상천은 전국 투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깨닫고, 마침내 당구선수의 입장에서만 최선을 다할 것이 아니라 한국 당구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발전시키는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대한당구연맹의 수장(首長)이 될 것을 자청하였다.
 
때마침 제3대 유태성 회장의 유고로 회장이 공석이었으므로 이상천은 회장에 출사표를 던지고 대의원들의 협조를 구하였다. 그러나 처음 대의원들은 선수 출신인 이상천의 회장 입후보에 그의 능력에 회의감을 가지고 반대하는 분위기였으나, 한편으로는 그의 진취적이고 실천적이며 파격적인 기획력을 인정해 회장으로 추대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전제되었다. 초대 회장 취임식에서 올림픽파크텔에 미지급한 부채를 비롯해 2대, 3대 회장을 거쳐 오면서 누적된 각종 부채를 모두 상환하는 조건이었다.
 
선수 출신인 그에게는 가혹한 조건이었지만, 이상천은 이를 수락하고 그의 대회 우승 상금과 후원금으로 그때까지 누구도 청산하지 못했던 악성 부채를 모두 깨끗이 청산하였다. 
 
이상천은 2004년 5월 대한당구연맹 대의원총회에서 만장일치로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로써 이상천은 한국 당구계를 이끌어갈 지도자로서의 중책을 맡아 같은 해 6월 27일에 대한당구연맹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당구연맹 제4대 회장 취임식에서의 이상천 회장 (왼쪽에서 두 번째)
취임식의 인사말에서 이상천은 “세계 챔피언을 꿈꾸었던 제가, 이제 대한민국 최고 스포츠로서의 당구를 만드는 꿈을 회장으로서 여러 당구인들과 함께 꾸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천은 취임식에 지팡이를 짚고 나왔고, 이 모습은 취임식에 참석한 당구인들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하였다.
 
그는 몇 개월 전부터 위통을 느껴 통증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으나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회장 취임식 때까지 검진을 미루어 왔다. 취임식 후 종합검진을 받은 결과 중증의 위암으로 판명되었다. 
 
이상천은 한국 당구의 발전과 개혁이라는 목표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건강조차 돌보지 않고 목표를 향해 우직하게 돌진하였다. 그는 투병 중에도 회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업무를 지시하고 체크하였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당구천재 이상천은 끝내 병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2004년 10월 19일 오후 2시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51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하였다.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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