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어즈=김민영 기자] 지금의 국회의원 정두언을 있게 한 것은 당구였다. 왜냐하면 학교 다닐 때 담임선생님이 부모님의 직업을 묻는 게 가장 싫었다는 그의 집이 바로 당구장이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된 당구장집 아들의 삶은 학창시절 내내 계속되었고, 때로는 그의 무기가 되기도, 때로는 그의 약점이 되기도 했다.
 
정두언 의원(17~19대 새누리당 국회의원 / 국회 국방위원장)

어린시절 부모님께서 당구장을 운영하면서 자연스레 당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구장집 아들이라서 좋았던 점도, 혹은 싫었던 점도 있었을 텐데. 

원래 빵집 아들이 빵 안 좋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놀러 가는 당구장이야 항상 재미있겠지만, 거기서 살아야 하는 입장은 좀 다르다.
 
일단 공부를 해야 하는데 손님들이 시끌시끌하니까 공부를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게다가 그 옛날엔 왜 그리도 당구장에서 싸우는 건달들이 많았는지 툭하면 싸움이 벌어지고, 경찰들은 시시때때로 단속을 나오고, 부모님은 전전긍긍하고 그런 게 참 싫었다. 게다가 손님이 없으면 어린 마음에도 불안했다. 
 
반면, 좋았던 점은 내가 친구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는 당구장에 미성년자들이 출입할 수 없어서 학생들이 당구장에 가는 게 불법이었는데, 나는 거기가 집이니까 치고 싶을 때 당구를 칠 수 있어서 좋았고 초등학생 때부터 200점을 쳐서 중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거의 다 내 제자였다. 
 
초등학생 때 200점이면 지금은 실력이 엄청나겠다.
 
그렇지 않다. 초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200이다. 이상하게 당구가 안 늘더라. 왜 내 실력은 항상 이 정도일까 의문스러웠는데, 한참 후에야 내가 오른손잡이임에도 불구하고 왼손으로 당구를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그때 나에게 처음 당구를 가르쳐줬던 당구장에서 일하는 형이 왼손잡이였나 보다. 형이 하는 걸 똑같이 따라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웃음)
 
그럼 지금은 당구를 오른손으로 치나.
 
여전히 왼손으로 친다. 대학생 때 200 놓고 왼손으로 당구를 치니까 친구들은 내가 진짜 당구를 잘 치는 줄 알았다.
 
우리 또래는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당구를 많이 쳤다. 그런데 나는 당구 치자는 친구가 제일 싫었다. 당구장에서 학교로 왔는데, 또 당구장에 가자니. 당구장집 아들한테 당구장 가자는 친구가 이상한 거다.
 
우리 과에 당구에만 미쳐서 학교에 안 나오는 친구가 2명이나 있었다. 어찌 보면 어려서 일찍 당구를 친 게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어떤가. 아직도 당구장 가자는 친구가 싫은가.
 
아니다. 지금은 주로 가족들과 당구장에 간다, 아들이랑 사위랑. 주로 4구를 많이 치고, 가끔 포켓볼을 치기도 하는데 포켓볼은 항상 내가 이긴다.
 
이제는 당구장에 가면 옛 향수를 느낀다. 가끔 손님이 별로 없는 당구장을 보면 어릴 적 부모님 걱정했던 마음이 되살아나서 마음이 짠하다. 
 
가장 가까이에서 당구를 지켜봤는데, 당구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접근성이 좋은 게 당구의 가장 큰 매력이자 장점이다. 어디서나 언제든 쉽게 갈 수 있다는 것, 일부러 장비를 구입할 필요도 없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날씨가 춥건 덥건 상관없이 즐길 수 있는 점이 당구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생각한다.
 
졸업식날, 신촌당구장에서 부모님과 함께.

당구장에서 겪었던 인상 깊었던 사건이 있었나.

그땐 왜 그랬는지, 주로 싸운 기억이 많다. 그 당시 우리 <신촌당구장>이 있던 신촌은 시골 같았다. 지금의 양화대교인 제2 한강교가 놓이고 신촌이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건달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 동네 건달들이 술 마시고 와서 당구 치고 게임비 안 내고 나가려다가 아버지한테 두드려 맞기를 몇 차례 하더니, 하루는 떼거리로 건달들이 몰려왔다.
 
온 식구가 놀라서 떨고 있는데 아버지가 건달들을 다 데리고 나가셨다. 엄마한테는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시고서는.
 
밤이 늦도록 연락이 없던 아버지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셔서 돌아오셨는데, 그 뒤로 낮에 데리고 나갔던 건달들이 우르르 따라 들오면서 아버지한테 형님이라고 부르더라.
 
이 삼촌들이 나중에 늙어서도 아버지 생신이면 꼭 우리 집에 모이곤 했다. 
 
당구가 그동안 많이 변했다. 사람들이 스포츠로 당구를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예전의 어두운 이미지를 많이 벗었다. 오랜 시간 당구를 지켜본 입장에서 당구가 어떻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당구가 왜 성인들만 즐겨야 하는 오락인지 어렸을 때부터 이해가 안 갔다. 오히려 미성년자 출입금지로 만드는 바람에 당구장이 더 음지화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야 정상적으로 돌아온 거다. 청소년들도 부모들과 친구들과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되어야 비로소 스포츠화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당구가 붐이라고 하는데 막상 당구장에 가면 사람들이 별로 없다. 요즘은 젊은 친구들의 놀이가 많다.
 
그렇다 보니 당구는 실버스포츠로 자리를 굳혀가는 모양새다. 젊은이들이 당구를 즐길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국회의원의 관점에서 법으로 제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
 
어린 학생들이 당구를 친근하게 배울 수 있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그들이 커서도 당구를 친다. 친구들을 만나도 당구장에서 놀고, 데이트도 당구장에서 하고 얼마나 건전하고 좋은가. 
 
당구장은 손님들이 많이 와서 좋고 일거양득이다. 이런 문화를 조성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흡연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당구장은 아직도 흡연이 가능하다. 물론 당구장이 금연구역으로 정해지면 장단점이 있겠지만, 술집에서 담배를 못 피우는 요즘에 당구장만 흡연이 가능하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이제 당구장에 미성년자 출입이 가능하다지만 아직도 어린 자녀가 당구장에 간다고 하면 잘 다녀와라 하는 부모가 거의 없다.
 
이게 당구장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인데, 그중에 흡연문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당구장 업주들의 결단이 꼭 필요한 부분이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언제였나. 만약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면 어떤 일을 해보고 싶은가.
 
항상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솔직히 이걸 깨달은 건 얼마 전이다. 과거는 그저 과거일 뿐이다.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그래도 만약 나에게 젊은 시절로 돌아가라고 한다면 그때는 영어 공부를 진짜 열심히 하고 싶다. 만약 램프의 요정 지니가 소원을 하나 들어준다면 영어를 잘하게 해달라고 부탁할 거다. 
 
그래서인가,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문과에 재학 중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재학 중이 아니라 졸업을 못 하고 있는 거다. 방통대가 공부를 제대로 안 하면 졸업을 할 수 없는 학교다. 덕분에 아직도 재학 중이다.
 
공부는 평생 하는 거다. 책 읽는 것도, 사색하는 것도, 당구를 배우는 것도 다 공부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국회의원에서 가수가 된 첫 케이스다. 음반도 내고, 가수협회 등록도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어쩌다 보니 음반을 4장이나 내게 됐다. 대학교 때부터 그룹사운드에서 보컬로 활동을 했는데, 가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당시 송창식이나 조용필만큼 노래를 잘 부를 자신은 없었기에 과감히 접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선택했다.
 
요즘도 행사장에 가면 축사 대신 축가를 한다. 여전히 노래 부르는 게 행복하다.
 

홈페이지에 유독 자전거 타는 사진이 많다. 음반 앨범 사진에도 꼭 등장하고. 자전거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

자전거를 타면 얻는 게 많다. 일단 건강을 얻고, 교통난에도 기여를 할 수 있고, 그리고 사람들과 가까이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이던 시절, 서울시 부시장이었는데 그때 대중교통 개혁을 같이했다.
 
이명박 시장은 지하철을 자주 타고 다녀서 나도 실천하자고 생각했는데, 우리 집에서 시청까지 오는 지하철 노선이 없어서 대신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면 다들 반갑게 손을 흔들어 준다.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정치인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치인에 대한 불신이 있다.
 
‘그래도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더라’라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그렇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한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 중이다.
 
정치를 시작할 때 부당한 기득권 구조를 깨는 게 나의 목표였다. 여전히 우리나라는 공정하지 않은 게 많다.
 
그 불공평한 기득권 구조를 깨는 게 아직도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한때 당구와 동고동락했던 당구 가족으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통 3쿠션을 먼저 다 치면 “아줌마 났어요!”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된다.
 
만약에 내가 먼저 쳤다면 다음 사람까지 다 치고 나서 그 사람이 못 치면 내가 이긴 거다. 후구인 사람에게도 기회를 줘야 공평한 스포츠인 것이다.
 
만약에 1,000점을 치는 두 사람이 대결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먼저 친 사람이 한 큐에 다 끝낼 수 있다. 그러고 나서 이겼다고 하면 뒷사람은 쳐보지도 못하고 진 거다. 이게 공평한 건가.
 
상대 선수도 한 큐에 다 칠 수 있는 실력자인데, 무승부가 될지 아닐지 끝까지 지켜봐야 스포츠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두 명이 치든, 세 명이 치든 먼저 다 친 사람이 이겼다고 하고 끝을 낸다.
 
하지만 내 순서가 2번이었다면, 3번, 4번에게도 기회를 줘야 한다. 그게 진짜 공정한 것이고, 스포츠인 것이다.
 
당구대회에도 후구제가 도입된 게 불과 몇 년 전이다. 스포츠라면서 룰조차 공평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이게 너무 이상했다. 아저씨들이 나랑 게임을 칠 때 후구인 나에게 기회도 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났다고, 이겼다고 그러는 게 너무 억울했다.
 
나도 다 쳐서 무승부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세상살이 대부분이 이렇다. 불합리하고 불공평한 일이 많다.
 
그럴 땐 의문을 던져줘야 한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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