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2월 '월간 당구' 창간 이후 34년 동안 400호 발행하며 한국 당구계 이끌어

당구인 중 6·25전쟁 끝나고 최초로 당구대 만든 방달성 대표 가장 기억에 남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정싱종목 채택 험난한 과정 생생하게 기억

체육단체 통합 후 구태 정리되지 않은 KBF 비리 문제 숙제로 남아 무척 아쉬워

"프로당구 성공적 출범 자랑스러운 일"... PBA-UMB-KBF 원만한 해결책 찾기를 바래

후대에 당구의 올바른 역사 전하기 위해 장구한 135년 한국 당구史 발간 연내 마무리할 것

당구 전문지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사진=이우성
당구 전문지 '빌리어즈' 김기제 발행인. 사진=이우성

[빌리어즈=김민영 기자] 기자 출신인 김기제 발행인이 1987년 창간한 <빌리어즈>는 지난 34년 동안 당구계를 기록으로 남겨왔다. 그 기간 동안 한국에서 당구는 유기 종목에서 스포츠로 완전하게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잡지가 발행되기 전에는 꿈이었던 일들이 김기제 발행인의 펜 끝에서 하나둘씩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며, 변화와 혁신을 거듭했다.

지난 34년 동안 김기제 발행인이 써온 많은 기사와 칼럼은 때로는 헌법재판소에서는 증거로 인정받고,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는 당구를 알리고 선수들의 활약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당구는 길을 잃지 않고 올바른 방향으로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었다.

1935년생으로 올해 85세가 된 김기제 발행인은 여전히 현역에서 한국 당구의 방향을 제시하며 지난 135년의 한국 당구 역사를 기록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고려대 법학과를 나온 엘리트 출신인 그가 당구계에 몸담고 ‘한국 당구의 산증인’의 길을 걷게 된 때부터 현재까지 당구와 함께한 34년이라는 긴 시간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당구 잡지를 만들게 된 계기는.

1986년 당시 나는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월간 자동차>와 <월간 주유소>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간혹 지인들과 당구장에 들러 당구를 치곤했는데, 지인 중의 한 사람이 “빌딩마다 당구장이 있고 당구 인구도 꽤 많은데 당구 잡지가 없는 것 같아, 내가 알기로는 당구가 분명히 스포츠인데 오락이나 놀이 정도로 인식되고 있으니, 당구 잡지를 발행하면 목표도 있을 것 같고, 당구장에서 한 권씩만 잡지를 구독해 주어도 운영이 무난할 것 같으니, 김 사장이 당구 잡지 허가를 내서 한번 시작해 보는 게 어때?”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 말에 공감하고 얼마 후 <월간 당구(현 빌리어즈)>라는 제호로 정기간행물 등록신청을 한 다음 정부 허가를 받아 1987년 2월에 창간호를 발행하게 되었다.


당구 잡지를 만들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나.

당시 당구계 사정을 소상히 알지는 못했다. 그래서 잡지등록증을 들고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를 찾아가 박성오 회장을 만나 잡지 발행에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자 박 회장은 “안 그래도 당구계를 대변할 잡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라며 적극 협조를 약속했다.

박 회장은 당구계 사정을 알려줄 원로 당구인 조동성 씨와 양창종 씨를 소개해주었고, 두 사람을 편집고문으로 영입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 당구계에 들어왔을 때 당구계의 상황은 어떠했나.

정부가 인정하는 법정 단체는 보건사회부 산하에 등록된 사단법인 대한당구협회가 유일했다. 당구장 경영주 단체인 대한당구협회는 정관에 선수국을 두고 각종 당구대회와 선수들의 국제대회 출전까지 관장했다.

당시 대한당구협회에서는 경기인들과의 원만한 업무 유대를 위해 김명석 부회장이 선수 담당을, 경기인 신항균 씨가 선수국장을 맡고 있었다.

경기인 단체는 임의 단체로 한국당구회가 김영재 회장을 중심으로 결속되어 있었고, 한국당구인원로회가 결성되어 이한종 회장 이하 30여 명의 회원이 매월 월례대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하고 있었다.

세계 당구계에서는 UMB 세계캐롬연맹에서 주최하는 세계3쿠션선수권대회와 86년 조직된 BWA 세계당구월드컵협회에서 3쿠션 당구월드컵을 개최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한국 당구는 유기(遊技)로 치부되어 스포츠의 길이 요원한 현실이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당구계 환경이 좋지 않았는데, 전문 잡지를 만드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잡지가 매월 발간되려면 채산성에 맞아야 하는데, 대한당구협회 협조로 각 지회를 통해 잡지를 보급하려던 계획이 제2호를 발행한 다음 분홍빛 꿈이었음을 깨달았고, 광고게재료도 잡지 발행에 충분하지 못해 창간 3개월 만에 난관에 부딪혔다.

그러나 발행을 중지할 수 없어서 같이 발행하던 <월간 주유소> 판권을 매각했고, 운영하던 출판사에서 적자를 보전해 가면서 어렵게 당구 잡지 발행을 이어올 수 있었다.

1987년 2월에 발행된 창간호를 들고 있는 김기제 발행인.  사진=이우성
1987년 2월에 발행된 창간호를 들고 있는 김기제 발행인. 사진=이우성

지난 34년 동안 통권 400호의 잡지를 만들면서 느낀 소감은.

매월 새로운 잡지가 나올 때마다 수고한 보람을 느꼈다. 당구계가 변화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일을 통권 400호까지 해올 수 있었고, 지금 되돌아보니 감회가 새롭다. 


한국 당구 역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누구인가.

당구 잡지를 발행하고 난 1년쯤 되던 어느 날, 6·25전쟁이 끝나고 당구계가 정상화되면서 한국 최초의 당구대를 충남 보령의 웅천석판을 사용해서 짜기 시작한 ‘승리기업사’의 방달성 대표가 나를 만나자고 해서 광화문 세종회관 근처의 커피숍에서 만났다.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손을 꼭 붙들고 “김 사장, 참 대단해. 이 척박한 당구계에서 매월 당구 잡지를 계속해서 발행하고 있으니 말이야” 하며 진심에서 우러난 칭찬을 해주었다.

방 대표는 당구용품 생산뿐 아니라 당구의 발전을 위해 최초의 전국 선수 단체인 대한당구선수회를 조직했고, 국내 최초로 당구 잡지를 발행했던 당구계의 선각자다.

그래서 그는 월간으로 당구 잡지를 발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몸소 체험으로 알고 있었기에 과분한 칭찬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방달성 대표는 그가 발행했던 당구 잡지의 창간호와 제2호를 주었고, 몇 가지 관련 자료도 전달하면서 “당구계 발전을 위해 계속 잡지 발행을 이어가 달라”라고 연신 당부했다.

그리고 세종회관 옆 지하 아케이드에서 그의 딸이 운영하고 있는 당구장에 데려가 당구대 조립 장인인 이수명 씨가 초창기에 만든 당구대를 보여 주기도 했다.

그 후에도 그는 나를 몇 차례 만나 당구계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와 조언을 해주었다. 선각자 방달성 씨는 당구계에서 만난 인물 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인물이다.


한국 당구의 발전 과정에 공헌이 큰 인물과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해 달라.

첫 번째 인물은 앞에서 언급한 승리기업사 방달성 대표를 꼽고 싶다. 그는 한국 최초로 당구대를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1957년 1월 31일에 한국 최초의 전국 선수단체인 대한당구선수회 창립총회를 38명의 각 지역 선수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개최하고 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최초의 당구 잡지를 2호까지 발간하는 등 한국 당구의 선각자로 당구계에 공헌했다.

두 번째 인물은 김영재 회장으로, 그는 대한당구경기인협회 회장으로서 1991년 1월에 한국 최초로 서울3쿠션당구월드컵을 많은 경제적 부담을 지고 유치했다.

또한, 대한포켓당구연맹을 설립하여 부회장과 회장을 맡아 포켓당구 발전에 기여했고, KBF의 전신인 대한스포츠당구협회 제2대 회장으로서 대한체육회 준가맹과 부산 아시안게임에 당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는데 기여했다.

특히 대만, 중국, 일본, 유럽 등 세계 각지에 선수들을 직접 인솔하고 대회에 나가 한국의 포켓볼과 3쿠션 선수들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국제적인 경험을 쌓게 함으로써 당구 발전에 기여했다.

세 번째는 ‘18세 미만자 당구장 출입금지’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해 위헌 판결을 받아낸 대한당구협회 은평지회 박기호 지회장을 들고 싶다. 1989년 7월에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당구장이 체육시설이 되기는 했어도 여전히 당구를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규제들이 남아 있었으므로 박 회장은 이를 혁파하는 데 앞장섰다.

1993년 5월에 위헌 판결이 있은 후 박 지회장은 다시 학교 앞 정화구역 철폐에 대한 위헌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따라 1997년에 초, 중, 고교 앞은 정화구역으로 남게 되었지만, 대학과 유치원 앞에서는 위헌 판결을 얻어내 정화구역 규제가 해제되었다.

박기호 지회장은 이 일을 당구인이라는 사명감 하나로 협회 차원의 도움도 없이 자비로 변호사 수임료를 지불하며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묵묵히 실행한 인물이다.

그동안 당구계에서 일어난 사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 일인가.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개최 중에 현지에서 열린 OCA(아시아올림픽평의회) 집행위원회에서 차기 부산 아시안게임에 당구가 채택되지 못한다는 보도가 나와 한국 당구계는 큰 충격에 빠졌었다.

그래서 본지 권두언 칼럼에 “부산에서 개최되는 아시안게임에서 당구가 종목에서 탈락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므로 범당구계적으로 대책기구를 만들자”라고 제의했고, 이에 공감한 당구용품 생산업체 모임 ‘원우회’ 회장인 (주)허리우드 홍광선 대표이사와 선수 단체를 대표하는 대한스포츠당구협회 김영재 회장과 내가 주축이 되어 ‘부산아시안게임당구정식종목채택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이 기구에 대한당구협회와 대한당구원로회까지 참여시켜 10인 위원회에서 계획을 수립했고, 아시아당구연맹과 당구에 관련된 각 국제 스포츠단체에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하는 한편, 부산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와 대한체육회 최고위 관계자를 만나 당구의 종목 채택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협조를 요청했다. 그리고 종목 채택을 기원하는 아시아 당구대회를 개최하고, 동시에 100만 명 서명운동에 착수하는 등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2000년 11월 2일 부산 벡스코에서 OCA 집행위원회가 열려 추가 종목 확정이 결정되었는데, 그 현장에 김영재 회장과 백상영 전무이사가 내려가 운명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척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얼마 후 김영재 회장이 전화를 걸어왔고,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김 사장! 해냈습니다. 부산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당구가 채택되었습니다”

김영재 회장의 투박하고 떨리는 목소리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국 당구가 발전할 수 있었던 사건 중 가장 중요한 사건을 하나 손꼽는다면.

단연코 2007년에 수원 세계3쿠션당구월드컵을 유치해 6년 연속 개최한 다음 2013년부터 4년간 구리에서 3쿠션 당구월드컵을 이어간 이 10년간의 한국에서의 월드컵 개최라고 생각한다.

이 기간에 한국의 3쿠션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세계의 중심 국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경률 선수가 2008년 수원월드컵에서 준우승을 하고 그 여세를 몰아 2010년 안탈리아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 최초로 월드컵 챔피언을 쟁취했고, 2013년 구리월드컵에서는 강동궁 선수가 우승하는 등 한국 선수들의 기량을 세계 정상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이 기간에 한국 선수들이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대회에 출전하여 외국 선수들과 실력을 겨루고 실전 경험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수확이었다.

또한, 외국 선수들이 10년간 대회 출전을 위해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한국과 한국 당구를 이해하고 알게 된 성과가 있었다. 한국 당구는 이 10년간을 토대로 PBA 프로당구로 연결하는 계기까지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동안 했던 수많은 인터뷰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가 있다면.

<월간 당구>가 창간된 후 1년쯤 되던 1988년 1월 말에, 당시 10년 동안 일본에서만 개최되어 오던 ‘세계3쿠션선수권대회 아시아대표 결정전’이 처음으로 한국에서 열렸고, 한국, 일본, 대만이 참가한 포켓9볼 대회가 서울 정동에 있었던 MBC 문화체육관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 일본 선수단을 인솔하고 온 일본빌리아드협회 니시오 가쿠 전무이사와 대회가 진행되던 문화체육관 특별실에서 대담을 가졌다.

한국 당구는 일본 당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당구계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한국 당구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해 ‘일본 당구계를 알아본다’라는 타이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본의 당구산업, 당구 인구, 협회 조직, 프로와 아마추어 조직, 일본 당구의 스포츠적 지위, 당구선수의 수입, 일본 여성의 포켓볼 선호 실태, 개인 큐 소지 추세 등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인터뷰를 ’특별대담‘이라는 타이틀로 1988년 3월호에 9페이지에 걸쳐 실었는데, 당구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1990년대 초반에 ‘18세 미만자 당구장 출입금지’ 헌법 소원 위헌 판결 과정에 대해 설명해달라.

1989년 7월 1일에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어 당구장이 「공중위생법」의 적용을 받는 유기장에서 마침내 체육시설로 바뀌었다.

그러나 동 시행규칙 제5조에 ‘출입문에 18세 미만자의 출입을 금지하는 내용의 표시를 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을 남겨 다른 스포츠 종목에는 없는 차별 조항을 두었다. 그 밖에도 「학교보건법」에 정화구역 규정을 만들어 학교 정문으로부터 직선거리로 200m 안에서는 당구장 설치를 못하도록 규제했다.

이에 대한당구협회 은평지회장이자 은평구의회 의원인 박기호 씨가 법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

1992년 3월에 「체육시설의 설치·이용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 제5조의 ‘안전관리 및 위생기준’은 청소년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이 법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위헌 소송을 헌법재판소에 제기했다. 그리고 자비를 부담하며 국회의원인 이원형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였다. 

박 지회장은 재판 진행상 필요한 각종 증거물을 찾고 준비서면을 작성하기 위한 뒷바라지를 하는 데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쳤다. 이 재판에는 수년 동안 발행된 본지의 기사와 칼럼이 증거자료로 90% 이상 제출되었다.

이 헌법소원은 소송을 제기한 지 1년 2개월 만인 1993년 5월 13일에 마침내 재판관 13명의 전원 일치 ‘위헌’으로 판결되었고, 당구장 출입문의 ‘18세 미만자 출입금지’ 표시는 즉시 제거되었으며, 당구는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스포츠로 처음 인정되었다.

"UMB와 KBF, PBA는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고 화합하는 자세로 당구선수들의 이익을 위한 최선책을 찾아야 한다"  사진=이우성
"UMB와 KBF, PBA는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고 화합하는 자세로 당구선수들의 이익을 위한 최선책을 찾아야 한다" 사진=이우성

34년간 당구 잡지를 발행하는 동안 혹시 아쉬운 일이 있었다면.

2016년에 당구 단체가 역사적인 통합을 이루어 사단법인 대한당구연맹(KBF) 초대 회장을 선출하면서 어떤 사람이 후보로 나설까 하고 당구인들이 많은 기대를 했다. 뜻밖에 유명 인사 여러 명이 입후보하여 다른 종목 단체들의 부러움을 사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양대학교 특임교수 남삼현 씨가 회장에 당선된 이후에 이 선거를 통해 취임한 집행부는 지난 4년 내내 분란의 중심에 서며 UMB, PBA 등과 갈등을 야기하며 통합으로 더 나은 미래를 기대했던 당구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겼다. 

통합 전 MBC 뉴스에 보도가 된 당구 역사상 최악의 비리 사건인 ‘KBF의 금전비리 사태’의 징계도 유야무야되어 중징계 대상자인 직원들이 여전히 KBF 사무처에 남아있게 되면서 아직도 당구선수들과 당구인들의 큰 원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원로 당구인의 한사람으로 후배 당구인들이 2020년까지도 눈치를 보고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난 4년 동안 큰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당구계가 아직 제자리에 머물러 있고, 이러한 4년 전의 숙제가 남아 있게 되어 무척 아쉽다.


앞으로 한국 당구의 발전 방향에 대해 조언을 부탁한다.

지난해 PBA 프로당구협회(총재 김영수)가 창립하고, 세계 3쿠션 당구 역사상 최대 규모의 프로당구 투어가 첫 시즌을 마치고 두 번째 막을 올렸다.

프로는 우리 당구인들이 이루어야 할 마지막 목표다. 당구계에 몸담았던 여러 사람이 꿈꾸고 시도해왔던 프로는 지금 PBA의 규모에 크게 미치지 못했고, 이만큼의 성과와 희망을 내다보지도 못했다.

PBA 첫 시즌의 결과로 많은 기업이 당구에 후원을 계획하고 참여함으로써 당구는 단기간에 몇 단계나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에 대한 열망과 기대는 단체 간의 불협화음으로 벌어진 피해가 당구선수들에게 돌아가면서 안타까운 일도 있다.

PBA와 KBF의 상생협약으로 모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듯했지만, 막바지에 결렬되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UMB와 KBF, PBA는 서로 존중하고 양보하고 화합하는 자세로 당구선수들의 이익을 위한 최선책을 찾아야 한다.

또한, 당구산업과 당구인들의 이익에도 해가 가지 않도록 각 단체의 책임자들은 사적 이익을 취하지 않겠다는 양심을 걸고 당구계를 위한다는 솔직하고 진실된 자세로 협상을 추진해야 한다.

이러한 결과를 만들어 화합의 길을 열었을 때, 당구 역사와 후대는 이들을 기억하게 될 것이고, 반대로 사적인 이익을 취하고 당구선수와 당구인에게 해가 되는 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그대로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영원한 승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 역사에는 오직 진실만 남는다.


당구인으로서 PBA 프로당구 투어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에서도 1986년부터 이한종, 김영재, 김문장 씨 등이 프로당구를 성공시키겠다고 6차례의 대회를 개최하며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같은 해에 BWA를 UMB 산하에 두고 세계선수들의 프로화를 시도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최근 10여 년 동안 한국의 당구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세계 3쿠션의 중심에 서는 때에 맞춰 PBA 프로당구가 작년에 출범을 선포한 것은 타이밍이 적기였다.

프로당구가 한국에서 시작되어 원년 시즌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두 번째 시즌을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랑스러운 일이다.

아무쪼록 당구인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앞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궤도 진입에 성공하여 안착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당구 135년사>에 대한 관심이 높다. 135년사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우선 발간이 늦어진 점에 대해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135년의 장구한 역사를 한 사람이 집필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한국 당구사 발간을 내가 당구계에 종사했던 모든 것의 결정(結晶)이라 생각하고 심혈을 기울여 집필하다 보니 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단순한 사건의 나열에 그친다면 쉽게 끝날 수도 있다. 시대에 따라 이슈별로 분류하여 스토리가 있는 내용으로 기록했다.

초창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당구 이야기를 한 권의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나갔다고 보면 될 것이다.


당구 135년사 집필에 대한 의미는 무엇인가.

인간은 삶의 발자취를 기록으로 남겨 후대에 전하고 있다. 그래야만 후대가 선대보다 나은 삶의 발자취를 그 후대에 다시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당구계에는 1980년에 조동성 씨가 <내가 본 당구사>를 집필하였는데 이것이 유일한 당구계의 기록이다.

그러나 이 기록에는 조선조 마지막 순종 임금이 1909년에 어용 당구대를 사용했던 것을 한국 당구의 기원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 당구에 관한 새로운 사료(史料)들이 발굴됨으로써 한국 당구의 기원은 25년 전인 188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 당구의 초창기 역사를 다시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역사는 고증에 의하여 정확하게 기록되어야 한다. 추정으로 기록하거나 연대 하나라도 오류가 없도록 해야 한다.

간혹 언론에 당구 역사를 기고하는 당구인들이 있는데, 기사에서는 어떤 것은 과장이 심하고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내용도 발견된다.

만약 한국 당구계에 제대로 된 역사서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는다면 한국 당구사가 올바로 기록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80세가 넘은 노령으로 한국 당구사 집필의 마지막 작업에 심혈을 쏟고 있는 것은 후대에 당구의 올바른 역사를 전하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독자와 당구인들에게 한 말씀 해달라.

<빌리어즈>가 통권 400호를 발간할 수 있었던 것은 독자와 당구인들의 성원과 매월 광고로 지원해준 용품업체들의 배려에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잡지를 만들어도 읽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지속적으로 발행이 가능하겠는가.

앞으로도 <빌리어즈>는 한국 당구 발전에 도움이 되고 독자들에게 유익한 잡지를 발간할 것을 약속드린다.

독자 여러분들과 당구인들의 지속적인 성원을 부탁드린다.


인터뷰=김민영 기자
사진=이우성(675스튜디오)
헤어&메이크업=신오키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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