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해 본지 6월호를 통해“한국 당구의 기원은 1909년이 아닌, 그보다 25년 전으로 앞당겨 써져야 한다”라고 조심스럽게 주장한 바 있다. 이 주장은 한국 당구계의 거목인 조동성 씨가 1980년 <내가 본 당구사>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 당구사의 시작을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이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에서 어용 옥돌대 2대를 구비해 여가 선용과 건강 유지를 위해 애용하였다는 <순종국장록>(1920년 발행)에 근거하여 1909년을 기원으로 해왔던 종전 당구사를 완전히 변개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조동성 씨의 저서 발간 이래 지난 30여 년간 새로운 역사적 고증 자료들이 계속 발굴됨으로써 한국 당구의 기원은 그보다 훨씬 앞당겨지지 않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선인들의 주장이나 역사적 논거를 고친다거나 뒤집는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생각되어, 나는 지난해 8월호부터 본지에 연재 중인 한국당구 100년사를 새로 기록하는 한국 당구사로 고쳐 한국 당구의 기원은 1884년, 일본에서 당구대가 수입되어…라고 하여 완벽한 자료들을 첨부, 지난 몇 개월 동안 연재하여 왔다.

그 역사적 자료들에 따르면, 한국 기독교의 첫 출발로 인정받고 있는 미국의 의료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이 1884년 9월 20일 제물포(인천)의 한 오두막 호텔에서 한국 입국의 첫 밤을 지낼 때 침대 구실을 해주었던 것이 당구대였다고 하는 최초의 기록으로 나타났고, 이보다 2개월 후에 일본 외무성이 발간한 <통상휘편> 제5책 532쪽 인천항의‘수입품요략’에 옥돌대 1대가 수입된 사실이 기록되었다.

따라서 1884년을 한국 당구가 발견되는 최초의 해로 고증할 수밖에 없으며, 종전의 1909년(조동성 씨가 주장한 해이며, 실제로 동행각에 당구대가 설치된 해는 1912년임)보다 25년이 앞당겨져야 하는 것이다.

이 이후에도 순종의 인정전 동행각에 당구대 2대가 설치되기까지 많은 역사적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나는 새로 기록하는 한국 당구사에 이 자료들을 모두 소개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당구사의 25년 전 회귀는 이제 부동의 사실로 인정되어야 할 것이다.

이 연재 후에 당구계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본지에만 수록된 제한된 주장이므로 당구인들이 모두 알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당구대회 중계를 하는 해설자들도 아직“한국 당구 100년사에…”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당구계의 요직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당구 역사가 오래 되어야 좋은 것인지, 짧아야 좋은 것인지, 이를 단언하고 말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역사적 사실은 옳든 그르든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한국의 당구 기원은 1909년이 아니라 이보다 25년이 앞당겨진 1884년이라는 사실이다. 이 사실을 대내적으로 빨리 공론화하고, 대외적으로 공표해야 한다. 이미 역사적 고증 자료에 의하여 분명히 확정된 사실을 당구계의 공론으로 채택하지 못한다면 수치가 될 뿐이다.

이를 공론화하는 데는 대한당구연맹과 국민생활체육 전국당구연합회, 그리고 (사)대한당구협회 등 당구계의 단체, 협회들이 앞장서야 한다. 홍보물을 통해서 이를 알리고 각종 행사와 대회에서 이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당구인뿐만 아니라 비당구인들도 빨리 숙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가능하다면 한국 당구 131주년 기념대회 같은 것을 개최하는 것도 한국 당구 역사를 정확히 알리는 한 방법이다.

나는 올해 첫 잡지의 머리글을 쓰면서, 2015년은 한국 당구‘131주년’이 되는 해임을 당구인들이 모두 알고, 이를 널리 알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올해에 당구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뿌리를 정확히 알고 알리는 데에도 힘을 쏟아야 하리라 본다.

 

저작권자 © 빌리어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